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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 (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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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 (롬 5:1-11)


성령강림 주일 이후로 성령이 함께 하는 삶이 무엇인지 연속으로 강론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령은 채우셔서 세력을 얻게 하신’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충만에 대하여 무엇이 충만케 하는 일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왜 어떤 목적으로 충만케 하시는가에 대하여도 너무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채우시는 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말씀을 더 정확히 알게 하여 능히 유대인과의 변론에서 이기게 하였습니다. 또 요한의 세례만 알던 제자들에게 예수의 세례를 베풀고 방언과 예언이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말씀을 날마다 강론하는 학교를 세워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듣도록 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이처럼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케 합니다. 그 결과로 세력을 얻게 합니다. 그 세력을 얻은 결과는 에베소 성 사람들이 은 5만이나 되는 마술책을 불사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케 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케 하는 사역은 사도행전 19:20절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오늘은 로마서에서 말하는 성령에 대하여 강론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4복음서로부터 시작한 성령에 대한 강론을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그 중심적인 내용만을 증거하여 성령 안에 사는 삶이 무엇인지 전체적으로 가닥을 잡는 일을 2010년에 설교봉사로써 감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음 주일은 고린도전서가 말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의 성령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제가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오늘 설교제목과 같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붓는다.’로 성령의 사역을 규정할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씀하는 책이니 결국 로마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의 통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을 ‘다스리는 법’으로 말할 때, 로마서 13:10절의 말씀을 우리는 잘 새겨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므로 성령으로 함께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라고 풀이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를 알고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가 곧 주님의 자녀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을까요?’라고 묻는 자들이 혹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가 답변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하여는 저는 다시 여러분께 되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하게 되면 전혀 자기 안이나 밖으로 변화를 느끼지 못하십니까?’라고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랑을 하게 되면 자기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우선 사랑이 갑자기 어디서부터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저는 사랑을 하게 되면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것이 뚜렷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얼굴도 웃음으로 가득차고 모든 일에 성내거나 하지 않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즐거워함이 저는 사랑을 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의 증거는 사랑을 지켜내기 위하여 아주 강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착하기만 한 소녀같은 아이가 만일 자기 사랑에 대하여 부모님이 인정을 하지 않거나 반대할 경우에는 매우 강한 태도를 보입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관계를 끊더라도 자기의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놀라운 결단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사랑의 관계를 파괴시키지 못하도록 능히 담대함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은 ‘이김’이라고 다른 말로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즐거움과 이김을 동반한다고 저는 봅니다. 사랑을 하는 즐거움, 사랑으로 이기는 기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이런 사랑의 모습도 있는데, 그렇다면 로마서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랑이 부어졌는지 함께 알아보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로마서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1:1절에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1:2-4절에 말해 주었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 보십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그 아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로마도 이방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1:15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로마에 갈 수 있는 길을 찾았었으나 가지 못했습니다. 로마교회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고, 이렇게 편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까? 다른 이방인 교회처럼 열매를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서 문맥으로 보자면 이 열매는 복음의 사역에 로마교회가 동참하여 후원하는 일입니다.

그럼 왜 꼭 복음이어야만 합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1:16-17절에 답변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복음에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함으로 모든 만민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능력이 복음에 있다는 말입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능력이 있고, 이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이며 차별이 없습니다. 그럼 복음에 나타난 의는 또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의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끝나는 순간까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러니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사도 바울은 복음의 의로 말미암아 사는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절대적인 거룩함이나 깨끗함을 뜻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더더구나 의는 도덕적인 의를 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의입니다. 어머니로서의 의, 아버지로서의 의, 그리고 자식으로서의 의라고 할 때, 이런 의는 항상 관계를 동반합니다. 

부부관계에서의 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으로서 의롭다는 말은 남편이 착하다, 순수하다,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함이 남편의 의입니다. 이는 아내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로마서의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새로운 관계가 나타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 관계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완성되며 전혀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의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했습니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8-3:20절까지 말했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 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까? 1:18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의 진노는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경건치 않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아니하여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함입니다. 그러한 결과로 자신이 모든 일을 판단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런 불의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떤 진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이것이 진리대로 심판하심입니다. 각 사람의 행함은 무엇입니까? 2:7-8절에 말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선을 행함은 그저 착한 사업을 많이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이 선을 행함입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가 퍼부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나중에 언급이 되겠지만 사도 바울이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할례를 받았다 하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할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만 아니라 지금 세상도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썩을 피조물을 썩지 않을 조물주와 바꾸어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우선 가장 기본적인 연합관계인 부부관계가 파괴되는 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산업사회가 진행되고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어도 오히려 인간의 기본적인 관계는 너무 쉽게 파괴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보응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남편의 잘못도 아내의 잘못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역시 현재에도 유대인과 같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으시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현재의 구원교리는 예수 믿고 나서 아무렇게 살아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꼭 천당가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불의가 진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판단보다 구원의 교리적 판단이 더 우위에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교회를 속이고 교회를 어둠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복음에 나타난 의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3:21절 이하에 상세히 기술합니다. 21-22절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복음에 나타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에 나타난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며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까? 3:23-24절에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어떤 의로움입니까? 하나님과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었던 관계를 끝내고 하나님과 화목관계를 누리게 된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3:25-26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의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이방인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의는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도리어 굳게 세웁니다. 

그럼 이렇게 모든 만민에게 미치는 믿음의 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유대인이 자랑하는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바울은 로마서 4장에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비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삶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8장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로 나타나는 삶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바로 5:1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삶은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었던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럼 화평은 우리가 친목회를 자주 하라는 말입니까? 웃고 즐기고 기쁜 행사를 많이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화평을 말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아브라함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됨이 곧 화평입니다. 그럼 어떤 친구인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서로 의논을 한 친구관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에 두고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의논하셨습니다. ‘의인 50인이 있으면, 의인 45인이 있으면 ...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누림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움에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함께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평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으로 삼으셔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이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늘 나라를 세움이 곧 우리의, 신약백성의 화평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땅끝 서바나까지 가는 길에 너희가 후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이 나라에 들어오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이 일에 로마교회가 동참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일이 복음을 로마교회에게 전한 목적이었습니다.

화평을 누리는 삶의 특색은 무엇입니까? 5장 2절 이하에 말씀합니다. 그 특색은 즐거워함입니다. 앞의 설교 처음에서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사랑은 즐거움을 동반한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은 즐거움이 그 특징입니다. 그래서 5:2절과 11절에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 즐거움은 어떤 즐거움입니까? 우선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항상 그러하듯이 구약의 들어감이 무엇인지,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 지성소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성소에 즐거움으로 서 있지 못하였고 죽을까봐 두려움으로 서 있었습니다. 거기서 여호와의 영광을 무서운 가운데 잠깐 동안 뵈었습니다. 또한 들어갈 때는 향단의 연기로 가리우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연기로 가리웠으니 여호와의 영광을 직접 대면하여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 구약의 나라는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에 들어감은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 말하는 것처럼 죄와 사망의 왕국이 아니라 생명과 의가 왕노릇하는 나라에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아담의 나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습니다. 이 왕국은 순전히 은혜의 나라입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도록 많은 선물과 은사가 주어지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관계로 함께 하는 그런 은혜의 나라입니다. 이런 생명의 교제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즐거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즐거움으로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즐거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더 발전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5:3-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 즐거움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왜 환난 중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이 환난이 인내를 주며, 인내는 연단을 주며,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환난이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도리어 성숙하게 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소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난도 즐거워합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 때문에 소망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성령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붓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오후 성경강론 시간에 로마서 8장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혼식을 하면서 그 결혼의 모든 결말을 다 보고, 다 알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맹세하면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사랑으로 사는 삶 가운데 이런저런 시련과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더 성숙해지고 상호간에 더 이해가 많아지는 방식으로 풍성해집니다. 결코 다른 시련들이 이 사랑의 연합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즐거움으로, 행복한 얼굴로 결혼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붓습니다. 어떤 사랑을 붓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붓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사랑을 확인했습니까? 
로마서 5:6-8절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신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연약할 때는 경건치 않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로마서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고 있을 때,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도 아니할 때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혹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죄인, 즉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치 않으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얼마 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를 읽었습니다. 노대통령은 자기 가족들과 자기를 따랐던 사람들에게 죄어오는 감옥의 사슬을 풀어주기 위하여 스스로 자기 몸을 부엉이 바위에서 던짐으로 그들을 살렸습니다. 이러한 죽음이 세상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와 같고 죄인들을 위하여 하늘 보좌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사랑은 어떤 목표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까? 로마서 5:9-10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살아나심으로 설명합니다.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살아나심으로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이곳에서 살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으니 이제 좋은 천당으로 갈 입장권을 받아 놓은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이제 자신이 더 나은 성결함으로 발전하는 상태를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내면의 변화를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구원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만 끝나도 됩니다. 단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이 되기 위한 구원이라면 그의 죽으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화목하게 된 것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끝이 아닙니다.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의 살아나심과 함께 하는 것이 곧 구원의 완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고 했던 것과 같이 이제 살아나심과 함께 하는 삶이 곧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은 곧 사망이 왕노릇하던 나라로부터 생명이 왕노릇하는 나라에로 구원을 받음과 같은 뜻입니다. 이제 로마서 5장12절 이하에 전개되는 두 왕국의 비교로 말미암아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이제 우리가 사망의 나라로부터 생명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면 이제 이 나라는 은혜의 왕국이어서 생명이 왕노릇하도록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는 백성으로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도록, 불의의 병기로 자신을 드리지 않도록,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주어 죄의 권세에 패하지 않고 넉넉히 이기도록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구원을 얻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의 살아나심은 그냥 골동품처럼 박물관에 전시되어 한 번 역사적으로 ‘살아났었다’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확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를 이긴 능력으로 우리도 함께 살도록 은사들을 넘치게 공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나심과 동행하여야 한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아무리 재벌이라도,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공급할 능력이 있어도 자식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환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의의 병기로 자신을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들을 위하여 그의 살아나심으로 얻은 전리품을 자녀들에게 공급하실 것입니다. 우리고 넉넉히 이기도록.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면 이제 그의 살아나심을 인하여 우리는 그의 살아나신 능력을, 곧 죄에서 승리하신 능력을 그의 은사로 교회에 붓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고, 어떤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게 할 수 없다고 로마서 8장은 그 화평함의 결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죄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이러한 반복이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죄에게 번번히 지고 있다는 말이지 승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번번히 지는 자가 어찌 장래의 승리를 확신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건 세상에도 없는 이치입니다. 매일 지고 있으면서 앞으로는 승리할 거라고 믿는 그런 스포츠 선수들이 어디 있답니까? 그건 모두 거짓말입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는 속임수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사랑이 모든 지혜의 왕입니다. 사랑 때문에 모든 역경을 이기지 않습니까? 사랑이 주어졌는데 우리가 번번히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그런 경험을 통하여 차츰 차츰 승리하게 된다는 것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다 통과하며 이기는 것이지, 사랑으로 인하여 패배를 늘 경험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5:11절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화목한 자로서는 또한 즐거워합니다. 왜 즐겁습니까? 이 화목이 끝나지 않으며, 이 사랑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위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합니다. 

군대 말년에 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군인은 항상 미소가 그 얼굴에 있습니다. 비록 현재는 아직 상관이 괴롭히고, 작업이 힘들고, 훈련이 심하여도 그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항상 그의 말에는 ‘나 몇일 남았냐?’고 나옵니다. 자기 아래 있는 신참들에게 매일 점호 때마다 자랑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소망도 바로 이런 즐거움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과 삶이 고단할지라도 그는 즐겁습니다. 주님의 구원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확증되었고, 자기 맘에 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부은 바 되었습니까? 이 세상의 썩음으로 끝나고, 죽음 때문에 끝나는 그런 사랑이었습니까? 죽으심과 살아나심으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우리를 죄의 나라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이르도록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도록 할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구원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로마서 8:37-39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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