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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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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사 43:1-7)
 

이 세상 그 어디를 가도 안전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집집마다 이중 삼중으로 시건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예사입니다. 부모들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에게도 핸드폰을 사주는데 그것은 자녀들의 안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암과 같은 병에 걸리면 어쩌나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재앙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교통사고와 같은 불상사를 당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합니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으로 가난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 친밀한 관계가 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늙음과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비롯해서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요한일서 4장 18절 말씀과 같이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두려움 자체가 이미 형벌입니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두려워한다면 이미 패한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수술을 두려워하는데 수술을 강행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 쉽습니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 31개 국가 가운데 1위라고 합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자살을 선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살아갈 자신이 있다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용기가 있다면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살한 사람은 누구나 다 겁쟁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좀 용감한 사람도 있고, 겁이 좀 많은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차이는 오십보백보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모든 종류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 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질병에 걸릴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평소에 식생활을 개선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방법으로 그 두려움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없애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과 같은 재난은 개인의 노력으로 방지할 수 없으므로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악화된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합니다. 

한편, 악한 자들은 그들의 악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과거 독재자들은 고문이나 투옥, 사회적인 불이익이라는 무기로 국민들을 두렵게 해서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공산정권은 정치범 수용소를 여러 곳 만들어 놓고 공포정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깡패들은 폭력을 무기 삼아 상대방을 두렵게 만들어 돈을 갈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두려움은 마귀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14)…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서 지배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인 이사야 43장 1-7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근거 중에서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시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마귀나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도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로써 구속하셔서 자기 자녀로 삼으신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가장 첫 번 째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길 때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소리 내어 암송해 보십시오. 그리할 때 두려움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갈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연히 어쩌다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시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택하신 결과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매 우리를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악한 자들이 성도들을 해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도 악한 자가 자기 자녀를 해치려고 하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서 지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를 값 주고 사신 성도들을 악한 자들의 손에 내버려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31절로 39절에 보면,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를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시편 118편 6절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영의 아버지가 되셔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무엇을 두려워할 게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어 보면, 다윗처럼 두려운 형편에 자주 직면했던 사람도 드뭅니다. 그는 채 20세가 되기 전에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적이 있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나 되는 어려서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용사입니다. 거기 비하면 다윗은 그때까지 목동 노릇을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용맹한 군사들이 하나같이 골리앗 앞에서 숨기 바빴습니다. 두려움이 이스라엘 진영을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골리앗에게로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 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45)…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 우리는 이 같이 말하는 다윗에게서 터럭만큼의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일약 영웅이 되고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으나 그로 인해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삼천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을 추격하니 그야말로 다윗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습니다. 그 위태로운 때에 다윗은 이같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믿음을 진술했습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3)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4)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 

과연,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이 되시니 사울 왕이 그에게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은 망하였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승리가 귀한 것은 무수한 두려움을 이겨낸 후에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는 다윗의 시대보다 더 악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택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두려움을 너끈히 물리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에 이르기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선민 이스라엘이 홍해 가운데로 건넜던 역사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홍해가 갈라져서 좌우에 물이 벽을 이루었고, 그 사이에 난 길로 이스라엘 자손은 무사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 따르던 애굽의 마병들은 다 홍해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는 홍해가 살 길을 열어주었으나 애굽의 마병들에게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서에 보면, 광야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자손이 요단을 건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시기는 요단강이 범람하는 때였으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딛고 서자 강물이 상류에서부터 멈추어 서서 위로 쌓였고, 아래의 물은 다 흘러가서 이스라엘 자손은 드러난 강바닥을 밟고 건넜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죄로 일곱 배나 뜨겁게 달군 풀무 속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 불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세 사람을 던져넣던 군사들이 타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보니까 불속에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네 사람이 불 가운데를 거닐고 있었고, 그 넷째는 신의 아들과 같아 보였습니다. 맹렬한 불 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그 불의 세력이 세 사람을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이사야 41:10에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두려워할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셔서 우리를 굳세게 붙들어주시며 능력의 손길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성도들은 절대로 어려운 일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이기 때문에 환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환난과 어려움이라도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성도들을 두렵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는 자기가 당한 환난을 이같이 진술합니다. 

“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어려움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고 하나같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도 남을 것들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그 모든 환난을 이겨낸 비결이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1장에 그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심령 속에 넘치면 그 어떤 가공할 환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그 모든 두려움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환난과 두려움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며 함께 하실 것이시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보신다는 사실보다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요? 누구나 보배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우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임금의 집안 자손들을 일컬어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 ‘금 가지와 옥 잎사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리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처럼 마음 든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마귀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실지라도 우리에게 그만한 대우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같은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보아주신 결과입니다. 

육신의 혈통 상으로 보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9장에 이르기를 “25)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3장에 보니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양자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자녀 된 성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사야 49:15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고, 그 16절에 보면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편 8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면서 이 같이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은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이 같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가 그 가운데 속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자다가도 놀라 깨어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시련과 환난과 시험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방에서 두려운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야곱아”라고 부르십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인간 야곱의 꾸밈없는 본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위기를 만나 두려워하는 야곱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야곱을 잊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다정하게 “야곱아!” 불러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길에서 지쳐 쓰러지고 시험에 빠져 넘어져 있을 때, 온화하신 음성으로 “아무개야”하고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것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도와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언제나 야곱으로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야곱아”라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밤새도록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긴 후에 얻은 영광스런 이름입니다. 그 뜻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겼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얻은 그 날부터 야곱은 ‘이스라엘’로 불렸고, 선민의 조상답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심으로 선민의 고귀한 신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야곱은 인생의 밑바닥에 주저앉아 탄식할지라도 이스라엘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거나, 탐욕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새로 지어주신 경우가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주셨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심으로써 그들의 이름 속에 은혜로운 언약을 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민을 향하여 “이스라엘아”라고 부르셨을 때, 거기에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기대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거룩하고 복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우리에게 성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무슨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과연 그것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일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문자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인 것이 확실한가? 나는 구원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가? 이러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귀도, 시험도, 환난도, 역경도, 악한 자들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담대하게 신앙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날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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