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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빌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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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빌 2:1-8)


광고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유재하 씨가, “20세기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21세기 문맹자는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했습니다. 

우리는 외모를 대단히 중시합니다. 얼굴, 헤어스타일, 옷맵시만 외모가 아니지요. 본질과 크게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주일예배 오실 때도 2~30분 정도는 다 투자하셨잖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예배할 것인가도 준비하셨는지요?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네 자신을 鍊鍛하라 했습니다(鍊鍛: 쇠붙이를 불에 불리어 단단하게 함; 마음이나 정신을 강한 의지를 갖도록 修練하는 것).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연단하는 것’입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섭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시절에, 국정홍보처의 한 간부가 “우리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말을 해, 주목받았던 일이 있습니다(정권교체기에…어려움 多). 그 말이 언론에 보도되자,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개탄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영혼 없는 공무원을 요구하잖습니까? 우리는, 司法機關 檢察을 ‘권력의 시녀’라고 공공연하게 말하잖았습니까? 法보다 大統領의 의지가 중요하고, 권력가진 자의 마음이 더 중요했던 거지요.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공직자라면, 영혼 없는 공직자가 아니라 마땅히 ‘영혼 있는 공직자’가 되어야 합니다. 소설가(언론인)였던 ‘현진건’ 선생님(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이, 일제강점기의 한국사회를 ‘술 권하는 사회’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바로 박힌 놈(사람)은 피를 토하고 줄을 수밖에 없지”라며, “이 사회가 내게 술을 권한다” 했습니다(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못 살아가게 하는 사회라는 거지요).

만일,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지 않는다면, 교회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늘 말씀의 맥을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라”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분석을 해 보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대전제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무슨 일”이라는 상황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권면을 할 때’, ‘사랑으로 위로 할 때’, ‘성령으로 교제할 때, 긍휼을 베풀 때, 자비를 베풀 때’라는 상황조건이 있습니다. 그럴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基本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지만, 어느 공직자의 진솔한 고백처럼 ‘영혼 없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마음은 온데간데없는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일 때가 많습니다. 정신 꼿꼿이 세우고 예수님 마음 품고 산다는 게 말처럼 쉽잖습니다. 현진건 선생님은, ‘이 사회가 내게 술을 권한다’고 했지만, 우리에게 이 사회는 ‘예수님 마음 없는 삶’을 권합니다. 예수님 마음 찾을 길 없는 구조적인 사회악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혼 없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항변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이 말씀 앞에서 자문자답해 봐야 합니다. 

바울의 옥중서신 수신자인 빌립보교회는, 참 훌륭한 교회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의 제목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에 동역자가 되었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교회는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女人이 改宗하면서 자기 집을 개방해 시작된 교회입니다. 당시 자줏빛 옷감은, 로마와 로마제국령 식민지국가의 공식적인 복장이기 때문에, 그 수요가 대단했습니다. 루디아가 엄청남 재력가였다는 말이지요(“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 “그녀와 그녀의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 행 16, 14-15).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교회이다 보니, 자연적으로 ‘루디아’의 헌신과 영향력이 컸지 않겠습니까? 특히, 빌립보 교회 안에 유력한 두 女人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빌 4, 3).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자주 장사 ‘루디아’가 이 두 여인 중 하나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위해서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교회입니다. 바울과 복음의 멍에를 함께 맨 자들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빌립보 교회 안에, 특히 교회의 핵심적인 리더십 그룹이었던 두 여인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두 여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합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 2-3).

빌립보 교회의 이 두 여인 간의 분쟁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 순 없습니다. 바울은 누가 잘 했고, 누가 잘못했다고 지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되면, 그들의 불화가 해결될 것이라 권면합니다(주 안에서 같은 마음 무엇? 자신을 비우셨던 예수님의 겸손). 혹, 바울의 초기서신인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던 아주 激情的인 태도를 기억하십니까? “다른 복음은 없다 하면서(예루살렘교회 그룹 중, 할례를 주장하던 유대 특수주의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 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바울의 이와 같은 과격한 표현은 옳지 못합니다).

이런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와는 달리,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그런 과격한 격정적인 표현 없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아주 대조적인 태도입니다. 이들 두 여인 간에 있었던 不和, 葛藤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라든지 福音에 반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얘기지요. 個人的인 문제였고, 성향의 문제였다는 얘깁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에는 진리의 문제, 복음의 문제가 아니라도,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바울의 권면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합니다. 바울이 품으라고 권면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겸손 곧 十字架에 죽으심이라 합니다(하나님과 동등하신 권한과 자리까지도 내려놓으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같은 마음, 같은 사랑, 뜻을 합함, 무슨 일이든 다툼(말다툼, 당파심)이나 허영(내용 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구함)으로 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가짐입니다. 로마제국 당시 謙遜은, 美德이 아닙니다. 奴隸 根性에서 나오는 ‘굴욕’과 ‘비굴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굴욕과 비굴한 뜻을 가진 謙遜의 意味를 바꾸신 분입니다. 죄인 된 우리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심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굴욕과 비굴함을 하나님의 義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바꾸셨습니다. 

또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이 예수님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봄이 예수님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 마음을 품고, 무슨 일이든지 하라는 겁니다.

예수님 마음 없는 교회, 예수님 교회 아닙니다. 요즘, 자꾸 사람들이 교회를 가리켜 그러잖아요. 예수 없는 예수교회라고.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고. 교회는, 교회 DNA가 있어야 교회인데, 교회에 교회 DNA인 예수님 마음이 없다고.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선교사 Horace G. Underwood(1859-1916) 선교사 아시지요(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상륙). 한국에 들어올 때 그는 이미 韓國人이수정이 번역한 우리말 성경을 손에 들고 들어왔습니다(선교사가 선교지에 갈 때, 이미 그곳 방언으로 번역된 성경을 갖고 들어간 예,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 유학 간 개화파 인사들 유성준, 김옥균, 이수정). 

지난 6월 23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에딘버러세계선교대회 100년기념 ‘2010한국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때,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4代 孫女인 ‘엘리자베스 언더우드’(미국 이스턴 켄터기대 교수, 사회학)가 주제 강사로 와서 강연하면서, 한국교회에 直言을 했습니다. 무슨 충고를 했을까요?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초기 선교사들의 공적 띄우기를 너무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 동안, 한국장로교회는 기회만 있으면 너무 자주 “한국교회가 성장한 이유를 曾祖父인 ‘언더우드’ 선교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傲慢하고 주제넘습니까? 하나님이 한국에서 일하셨고(Missio Dei), 主님은 나의 曾祖父母가 그 사역(Missio Dei)의 일부가 되게 하락하신 것입니다. 한국에 왔던 외국 선교사들을 神話化하는 것은 말씀의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세계선교의 질적 개선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던 반면,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기념비 세우기’에 더 많은 힘을 쏟은 것에 대한 직설적인 충고였습니다. 엘리자베스 교수가 또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자신의 증조할머니에 대해서 말하면서 자기 증조할머니는, 자신이 다른 기독교인들보다 더 거룩하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美國故鄕에서 느꼈던 것과 같이, 한국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결코 더 나은 것이 없는 ‘동일한 罪人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셨던 분이라 했습니다. 

특히, 천국엔 백인들만 있다고 생각하셨는데, 증조 할머니의 아들이 한국인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백인들만의 천국’ 환상이 깨어진 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특히 “증조할머니 릴리어스의 연약함과 19세기 문화가 가지고 있던 죄악을 담은 릴리어스의 고백을 읽으면서, 자기 선조들의 失敗와 罪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다”는 솔직한 고백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쉬운 일 아니지요).

그러면서도, “우리가 바라볼 대상은 선교사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더 이상(조상들의 연약함과 실패와 죄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도리어 한국교회에 대하여는 배울 점이 많다는 것도 강조했습니다(새벽기도, 산기도, 개인전도, 재정적인 지원, 십일조 형태의 ‘날 연보’ 성경공부 열정 등이 미국인보다 뛰어나다). 

우리가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부모님이 완벽하시기 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른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흠이 없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겸손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위해서, 우리의 어른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자기를 비우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기꺼이 거절하시고, 도리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 마음 품으십시다. 정권이 수시로 바뀌고, 자치 단체장의 소속정당이 바뀐다고 해서, 그 때마다 공무원들이 ‘영혼 없는 공무원’ 되서야 어찌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한다 하겠습니까? 이 시대가 예수님 마음 품고 살기에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님 마음 품지 않고 예수 믿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예수님 마음 없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바로 서야, 나라도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한국교회는 민주화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민주화 되어가면서, 지금 교회는 더 이상 그렇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오히려, 권위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돼가는 역주행을 일삼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가 예수 믿는다면서, 예수님 닮기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닮기가 너무 어렵고 멀어 보이면, 예수님 닮으려고 고민하는 사람들 가까이서, 그들과 함께 겸손하게 예수님 닮기를 노력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서 배우라하십니다. 아니, 어린아이 같이 되라 하십니다. 우리의 기존사고를 180° 전환시키라 요구하십니다(마 18, 1-10). 

우리는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세상의 온갖 때묻은 우리 어른과 같이 어른化시키는 것’을 교육이라 하잖습니까? 가정교육도, 학교교육도, 종교교육도….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교육목표와 방향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 18, 3-5).

하루 용돈 2000원이면 행복하다던 故 千祥炳 시인의 삶과 그의 詩 歸天은, 마음이 富하기로 그지없는 우리들을 많이 부끄럽게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오늘 말씀 우리 마음에, 우리 삶에 새기십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 5). 예수의 마음 품은 공동체가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 마음 품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씀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응답해 보십시다. 아멘.

[기도] 하나님, 우리는 너무 교만합니다. 부요합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굴종과 비굴함의 상징이었던 겸손을, 하나님의 의로 바꾸시고, 하나님의 救援과 能力으로, 하나님 나라의 眞理로 바꾸신 ‘예수님 마음’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 우리 교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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