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의 등을 보다 (출 33:18-23)

  • 잡초 잡초
  • 452
  • 0

첨부 1


주님의 등을 보다 (출 33:18-23)


[그 때에 모세가 “저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너는 나의 옆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 ‘나’를 넘어 ‘우리’ 되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해졌습니다. 모세의 부재가 곧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굴복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모아 오라고 이른 후, 그 금을 녹여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아론은 소의 형상으로 표상되었던 애굽의 아피스(Apis) 신과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금송아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상’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이나 표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지하여 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뭔가를 추구했기에 즉시 금송아지를 숭배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상징과 실재의 역전입니다. 언약 혹은 약속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언약의 파트너를 신뢰한다면 불안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 사이에서 늘 흔들립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불안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광야의 히브리인들은 아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금송아지는 그들의 불안을 달래줄 대용물이었습니다. 그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금송아지 앞에 앉아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습니다. 광야의 축제가 종교적 주신제(酒神祭, religious orgy)로 변질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런 불신앙적이고 무분별한 모습에 염증을 느끼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심판하려 하십니다. 모세는 내리치려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출32:32)

모세의 이런 간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며 ‘나의 천사’가 너희를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호한 하나님의 다짐을 듣고도 모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중재자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아멘’으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주님의 계획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할 뿐 아니라, 이 백성을 주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순종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순종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서서 백성들을 위해 중재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그리하여 네가 안전하게 하겠다.”(14)

주님은 나의 천사를 보내겠다는 말씀을 거두시고,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동행의 대상이 히브리 백성이 아니라 ‘모세’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려면, 우리를 이곳에서 떠나 올려 보내지 마십시오.”(15)

함께 가는 대상이 ‘나’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인간됨의 본질은 이처럼 다른 이들과의 ‘연루됨’(connectedness)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외로움의 뿌리는 다른 이들과의 깊은 결속의 감정을 잃어버린 데 있습니다.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공동체야말로 우리 감정의 닻(emotional anchor)입니다. 

• 주님의 환한 얼굴

주님은 마침내 뜻을 돌이키시고 모세가 요청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확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렸다는 징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당신의 속성을 다시 한번 드러내십니다.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19)

‘나의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는 말에 담긴 속뜻은 주님은 인간의 언어나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는 ‘긍휼矜恤’입니다. 이 단어는 감정 상태만이 아니라 어떤 몸의 체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긍휼이란 누군가의 아픔을 단순히 마음으로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똑같이 아파하고 또 불쌍히 여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을 뜻하는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는 단어와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0개월 동안 아이를 태중에 품고, 출산의 모험을 감행했던 어머니는 자식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낍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 사랑에 눈을 뜬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너무도 소중히 여겨 나는 귀한 사람이 되었답니다’라고 노래했던 김용택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파하는 사랑으로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겠다고 하신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다소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헷갈리지요? 하지만 질문 속에 답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 ‘사실’(fact)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truth)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둘 다가 됩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했다는 11절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친밀함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는 20절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실체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선언 중에는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6:25)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시편 시인들은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실 때의 두려움을 도처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인들은 주님의 환한 얼굴(시31:16)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 얼굴은 실체로서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의와 친밀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주님의 얼굴, 어디서 보나?

여러분은 어느 때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십니까? 삶의 어느 순간 마치 하나님을 본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찾아간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해변으로 밀려왔다 물러서는 파도의 리듬에 우리 의식이 조율되는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고, 어떤 충일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을 오랫동안 응시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아름다운 산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그 순간은 적어도 ‘나’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입니다. 내 욕심, 편견, 걱정 근심, 슬픔이 잦아드는 순간 우리는 무한히 큰 질서 속에 녹아들고 있음을 자각합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얼굴을 언뜻 보는 순간입니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는 그런 순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을 돌보는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얼굴빛은 하나님의 현존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당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며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경탄합니다. 야곱 이야기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어떤 낯선 존재와 씨름을 벌였습니다. 어쩌면 그 싸움은 자기 속에 있는 부끄러운 기억이나 부정적 감정과의 싸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형 에서를 만나야 하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 밤은 마치 거울의 수은 막처럼 의식에 드리워 그의 내면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실존의 어둔 밤을 거치며 그는 마침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고, 자신이 지향해야 할 삶의 본분을 알았습니다. 

그 밤에 그의 마음은 고운 흙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다음 날 그는 형 에서를 향해 나갔고, 너그럽게 맞아주는 형을 보며 마치 하나님을 얼굴을 뵙는 듯하다(창33:10)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의 한계 그리고 부끄러움과 대면했기에 형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까? 말이 거칠고 표정 사나운 이들을 보면 슬픕니다. 냉소적인 표정과 경계심에 가득 찬 얼굴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거칠어질 때마다 저는 이 찬양을 반복합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사랑하며 섬기리” 

형제자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마음에 더께로 앉은 죄와 허물을 부끄러워하며 참으로 울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과 눈을 씻으시어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하십니다. 

• 드러내면서 숨기시는 하나님

이제는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바위 위에 서라고 하신 후에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 틈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주님이 손바닥을 거두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될 텐데, 정면이 아니라 배면背面 즉 등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까꿍놀이도 아니고, 이제 무슨 의미일까요? 사실 까꿍놀이는 매우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태어난 지 5개월 쯤 되면 이 놀이에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엄마나 아빠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아이는 엄마/아빠의 부재에 당황합니다. 하지만 ‘까꿍’ 하며 손을 떼는 순간 낯익은 얼굴이 등장하고, 아이는 긴장이 해소되어 웃음을 터뜨립니다. 이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사물의 영속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기는 ‘보이지 않을 뿐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익히면서 세상의 외로움과 맞서는 것일까요? 하나님도 우리와 까꿍놀이를 하시는 것일까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지만,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매사가 잘 진행될 때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라야 절박하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언제나 기대처럼 속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고, 넘어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우리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 지나간 후, 가만히 앉아 뒤를 돌아봅니다. 그 어려운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냈던가 생각해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문득 그 시간이야말로 하나님 부재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 안에 있던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뒷모습, 곧 하나님의 등입니다. 하나님이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분은 해와 달과 별, 산과 강과 들, 나무와 꽃의 모습으로도 다가오시고, 이웃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다가오시고,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도 다가오십니다.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며 살지만, 삶에 대한 이해는 돌아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가장 절박한 시간,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세월이 흘러 살아온 날 돌아보면, 비로소 하나님의 등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홀로인 것 같아도 하나님이 곁에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 위에 인생의 집을 짓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십시오. 눈에 보이진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이 확신으로 오늘을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