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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중요한 것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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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4 (레 8:22-23) 

  
원문의 '살셀레트' 기호는, '다시 본문을 생각하고, 깊은 의미를 뽑아내라.'는 기호라고 말씀드렸다. 살셀레트 기호가 구약성경에 4번 나오는데 ① (창19:16) '지체하매'라는 동사에, 처음 나온다. 생명이 가장 중요하니, 돈이나 쾌락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② (창24:12) '그가 이르되'라는 동사에 붙어있다. 좋은 짝을 만나서, 좋은 결혼을 할 때,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생육하고 번성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게 된다. 이렇게 소중한 결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③ (창39:8) '요셉이 거절하며'라는 동사에 붙어있다. 요셉은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신앙교육의 힘이다. 교육은 영어단어나, 수학공식을 외우고 활용하는 지식을 넣어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이, 진정한 교육이다. 

오늘 말씀은 살셀레트 기호가, 4번째 붙어 있는 말씀이다. (레8장)은 아론과 그의 후손들로 구성된 제사장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받는 과정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거룩하게 구별한다. 

(1-4)은 제사장 위임식 준비, (5-13)은 제사장으로 위임하는 의식이다. 위임식 의식을 마친 모세는, 위임식 제사를 거행한다. 먼저 (14-17)은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를 (18-21) 헌신과 충성을 맹세하는 번제를, (22-29) 하나님과 화목하며, 성결한 삶을 다짐하는 소제를 겸한, 화목제의 순서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제사장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정결해야하고, 봉사와 헌신의 삶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특별히, 부름 받은 제사장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1. 제사장은 누구인가? 

제사장 직분은 모세로부터 시작되었다. 오직 아론과 아론의 후손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출28:1). 모세와 아론은 레위인인데(출4:14), 레위는 '연합'이라는 뜻이다. 제사장은 연결하는 자이다.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다른 사람도 하나님과 연합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거룩한 중재자로 세우셨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시다(히6:20). 예수님은 죄 많은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죄의 종, 마귀의 자녀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없었다. 오히려 환난과 근심, 질병과 고통, 절망과 좌절, 시기와 질투…, 죽음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한 자기 자녀들을, 더 이상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비록 인간은 죄를 지었지만,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로부터, 자기 백성을 찾기로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 거룩한 곳이기에, 죄를 가진 인간은 들어갈 수 없다. 

죄를 해결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죄인 된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죄의 종인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셨는가? 하나님은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결했다. 

먼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고,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셨다. 언제 죄를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나? 침례요한에게 침례 받을 때,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 침례를 통해 죄인과 연합되었다. (롬6장)보면, 침례의 의미는 연합이다. 

그래서 이제, 주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었다.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죄를 씻는 세례가 아니라, 연합을 말하는 침례를 받으셨음을 말한다. 예수님이 침례 받고 요한에게 나오실 때,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말했다. 

침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보좌로 가는 길이, 십자가로 열렸다.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 일은 성령이 아니고는, 알 수 없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성령 받기 전에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우리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성령이 아니고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다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알아야 한다. 부활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영적 전쟁의 승리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요,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될 수 있다. 그런데 신분이 회복됐지만, 교제를 나누지 않고 살겠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을, 복음이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다. 만일 구원이 목적이라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다음에는, 목적이 이루어졌기에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영적 방황을 하게 된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내심이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벧전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하였다.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다. 

구원받은 성도는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한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 바란다. 

2. 거룩한 제사장이 되려면 

먼저 3가지 제사, 속죄제, 번제, 화목제를 드려야 했다. 
(1) 속죄제(14-17) 

"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속죄제의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또 내장에 덮인 모든 기름과, 간 꺼풀과 두 콩팥과, 그 기름을 가져다가, 모세가 제단 위에 불사르고, 그 수송아지 곧,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이 속죄제는 위임식 속죄제이기에, 평상시의 의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참조:레4장). 

속죄제는 죄를 용서받는 제사다.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다. 제사장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려야만 했다. 그 이유는 신분에 따른 죄의 영향력이 큰, 심각성 때문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온전하지 않기에 제물을 드려야 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의 중재자로, 남을 위해 속죄를 드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한다. 제사장은 수송아지 머리 위에 안수함으로, 죄를 옮기고, 짐승을 죽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온전한 분이니, 자신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다(히7:27). 

위임식의 속죄제에는, 번제단을 중심으로, 피뿌림 의식이 이루어졌다. 번제단이 모든 제사 의식의 중심이 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모든 의식은 거룩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기름을 불살라야만 했다. 기름은 가장 좋은 것을 말한다. 태워드린다는 말은, 충성과 헌신을 올려드린다는 말이다. 

간은 무겁다,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서 나왔다. 이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의미로 태워드렸다. 콩팥은 감정과 애정을 말한다. 이것도 같이 올려드린다는 의미로 태워드렸다. 가장 좋은 성령으로 자신을 올려드리고, 가장 중요한 마음과, 감정과 애정도 통회하며, 올려 드린다는 말이다. 

(2) 번제(18-21) 
"또 번제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아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그 숫양의 각을 뜨고, 모세가 그 머리와, 각 뜬 것과 기름을 불사르고,  

물로 내장과 정강이들을 씻고, 모세가 그 숫양의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번제는 짐승을 죽이고, 각을 떠서, 다 불로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다. 

각을 뜬다는 말은, 조각 낸다는 말이다. 자신을 찢어바치는 헌신을 말한다. 불로 태워드림은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불로 태워서, 희생한다는 말이다. 제사장은 이처럼 직분을 감당하기 전,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성도를 섬기는, 온전한 헌신자가 되야 한다. 

(3) 화목제(22-29) 
(22-23) "또 다른 숫양, 곧 위임식의 숫양을 드릴새,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르고" 다른 의식은 화목제 의식과 같지만, 몸에 피를 바르는 의식이 위임식에는 다르다. 여기서 바른 피는, 제사장 몸에서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쪽 엄지손가락, 오른쪽 엄지발가락이었다.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덮어져 정결하고 구별되게 사용하겠다는 의미다. 

제사장은 화목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피를 귓부리에 발랐다.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데, 이 귀를 사용하겠다는 의식이다.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피를 바른 이유는, 손으로 하는 모든 일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뜻이다.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고, 축복하는데 사용하겠다는 결단이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의식이다. 그런데 여기에 히브리 원전의 4번째 살셀레트 기호가 있다. (23)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그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바르고" 

여기서 '잡고(바 잇스하트,      )'라는 동사에, 살셀레트 기호가 붙어 있는데, 그 의미는 "제물을 죽이다, 속죄를 위하여 도살하다, 양을 잡아 희생제사를 드리다"는 뜻이다. 구약의 예배는, 흠이 없는 동물을 희생제사로 드렸다. 무슨 말인가? 제사장이 되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 죄를 용서받고, 용서하는 자가 되려면, 또 온전히 헌신하는 자로,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되려면, 죽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자가 되려면, 3가지 면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제사는 오늘날 예배라고 말할 수 있다. 죽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올바르지 않다는 말이다. 

3.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나,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식도 아니다.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일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감격하며, 죄를 뉘우치고 은혜를 경험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생활에 연결되어질 때,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남이 사라진 예배는, 사명감이 없는 예배는, 모든 방종한 삶의 원인이 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형식적 예배에 빠지면, 신자들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예배시간에 들은, 설교의 본문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교회를 빠져나간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예배당을 총알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나? 

영적인 군사의 용맹스러움을 볼 수 있나? 지금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신다. 

저는 커다란 건물을 가진 교회나, 값비싼 파이프 오르간이 있고, 수많은 인파가 예배당을 메운 교회가 원하지 않다.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교회는,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성도들의 사랑이 살아 있는 교회를 갈망한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성도들은, 예배의 거룩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배자의 가장 큰 제물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상한 마음이며, 자기 죄를 참회하는 심령이다. 우리의 전 인격을 바쳐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 

(1) 예배의 종류 
예배는 영적예배와, 육적예배로 나누어진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한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 예배를 드린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이 받으셔야만 올바른 예배가 된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가정에, 왜 문제가 끊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하는 사람은, 대부분 예배에 실패해서 그렇다. 예배는 내 마음에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쇼에 불과하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 관습적으로 예배를 드리기에, 결코 하나님께 상당하지 못한다. 온전히 드리지 않아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드리는 예배는, 육적 예배에 불과하다. 
달콤한 노래나, 아름답게 디자인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는, 경건한 두려움이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기획된 예배나 계산된 예배 인도자의 멘트로도,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는 죽음이 있는 곳에 있다. 내가 죽고, 주님이 죽으신 곳에 있다. 

(2) 어떠한 예배가 영적인 예배인가? 
피가 있는 예배다. 피가 없는 예배는, 육적예배다. 가인은 육적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아벨은 영적 예배를 드렸다. 그러면 가인의 예배는, 왜 육적예배인가? 피 흘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희생이 없는 예배의 특징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형식적이다. 희생 없는 가짜 예배, 형식과 의식에 사로잡혀, 내용 없는 공허한 예배는, 아무리 떠들고 소리지르고 법석을 떨어도, 하나님은 그곳에 안 계신다. 진정한 예배는 자신을 잡아야 한다. 

자신을 쪼개서, 진실하게 고할 때, 진정한 예배가 된다. 희생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오락이요 광란일 뿐이다.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어야만 하는데, 사랑의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알고, 두려움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가야, 진정한 예배다. 이것이 경외심이다. 

이런 경외심을 가질 때, 마음의 자랑과 교만이 사라지고, 겸손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피흘림이 없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는가? 내가 죽지 않는 예배이기에 가짜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피가 없기에, 감격이 없다. 나는 죽지 않고, 예수님만 혼자 죽는 십자가만 믿었기에,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예배할 때,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이 있어, 감사하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예배를 해서 하나님을 만나자. 하나님과 거룩한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십자가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자기 만족이나 놀음이 아니다.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잡아, 쪼개고, 자르고, 분해해서, 자신의 진실한 모든 일을 고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행위가 된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아야 한다(갈5:24).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래서 바울은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에 성공해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살셀레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기호다. 우리는 살셀레트가 붙은 말씀들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하여,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심고, 무엇이 가장 귀한지 알고 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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