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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곡 성도의 4대 정의 (눅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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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곡 성도의 4대 정의 (눅 3:15-17)


<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 >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여겨지는 헤밍웨이는 원래 신실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도자 무디와 친했고, 그의 아버지는 선교사의 비전을 가진 신실한 의사였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도 오직 예수만 알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도 청년 때까지는 신앙생활을 잘했지만 나중에 인기를 얻고 노벨상까지 받으면서 점차 신앙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무수히 경고했습니다. “얘야! 너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는 잠시 성공해도 영원히 망한다.” 그래도 계속 딴 길로 나가자 마침내 어머니는 그의 생일에 보낸 케이크에 그의 아버지가 쓰던 권총을 넣어 보내면서 편지를 썼습니다. “너, 정말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이 권총으로 네 명예를 지켜라!” 그러자 헤밍웨이는 답장을 썼습니다. “어머님! 저는 하나님을 믿어요. 제발 그런 편지는 보내지 마세요.” 

그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살다가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는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산 근처에서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쏴서 자살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공허하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얻어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허한 쭉정이 인생이 아닌 알곡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어떻게 구분될까요? 첫째, 속을 보면 구분됩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겉모습은 유사하지만 속을 보면 금방 구분이 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쭉정이 신자는 말만 앞세우고, 봉사도 남의 눈의 띄는 봉사만 좋아하고, 책임감이 없는 반면에 알곡 신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항상 조용히 헌신하고 봉사하니까 누가 봐도 신뢰가 갑니다. 

둘째, 알곡과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보면 구분이 됩니다. 그래서 환난의 바람이 불면 알곡 신자와 쭉정이 신자는 정확히 구분됩니다. 책망의 말씀을 들을 때도 알곡 신자는 “저 말씀은 내게 하는 말씀이구나!”라고 회개하고 더 헌신하지만 쭉정이 신자는 불만을 품고 변명을 합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핑계와 변명이 많습니다. 그처럼 핑계를 좋아하고, 시기와 질투와 교만을 가지고 남만 탓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입니다. 

어느 사진관 주인 말에 의하면 고객 중에도 세리 고객과 바리새인 고객이 있다고 합니다. 세리 고객은 사진이 잘못 나와서 주인이 미안해하면 “제 모습이 원래 그래요.”라고 하면서 그냥 사진을 찾아갑니다. 반면에 바리새인 고객은 자기 모습 그대로 사진이 나와도 “왜 이렇게 잘못 나왔느냐? 다시 찍어 달라.”고 트집을 잡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남만 탓하는 바리새인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알곡과 쭉정이는 심어 보면 구분이 됩니다. 알곡은 땅에 묻히면 곧 싹이 나고 성장하지만 쭉정이는 아무리 기다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쭉정이 신자는 무엇 하나 꾸준히 계속하지 못하고, 좋은 일도 잠시 반짝 하다가 끝납니다. 반면에 알곡 신자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제 코스로 달리다가 결국 생명의 열매를 맺고 다음 생명을 준비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 알곡 성도의 4대 정의 > 

우리는 다른 성공은 못해도 믿음생활에서 알곡 성도가 되는 성공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알곡 성도란 어떤 성도를 말합니까? 

1. 속사람이 강건한 성도 

속사람이 강건해지려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기독교 생활의 전부와 같습니다. 성령의 임재로 살인자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했고, 키 150센티에 몸무게 45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훈련된 싸움의 결과가 아니라 영적인 능력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게 살고, 알곡 성도가 되기를 원하면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속사람이 강해지면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주님이 빠진 자신감은 허무한 것이지만 주님 안에서 가지는 자신감은 아주 필요합니다. 돌다리를 건널 때 주저하고 긴장한 채 흐르는 물을 보면 제대로 건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든 말든 자신 있게 뛰면 무사히 개천을 건너게 됩니다. 

사하라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상상할 수 없는 방대한 물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 물을 거대한 송수관을 통해 사막을 녹지화 시키려는 공사가 바로 리비아 대수로 공사입니다. 그처럼 아무리 척박한 사막도 계속 파고 파면 물이 나오는 것처럼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계속 도전하면 반드시 그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나옵니다. 

가끔 어려울 때는 마치 나만 그런 어려움에 처한 것 같고 도무지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끔 뉴스에서 어떤 것에 금방 몇 억씩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소식이 나오면 서민들의 마음은 크게 상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게 사는 분들에게 비춰지는 세상의 모습은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살아가지만 속사람이 강하면 그런 것들도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를 횡단하다가 야수에게 물려 거의 죽게 되자 시종이 죽지 말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리빙스턴이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다 할 때까지 결코 죽지 않아.” 그런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 마뎀의 연구에 의하면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성령님이 주신 자신감은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가장 큰 힘입니다. 


2. 겸손한 성도 

들판에 나가 보면 속이 빈 쭉정이는 머리를 바짝 들고 서 있지만 속이 꽉 찬 알곡은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처럼 속이 차고 성숙한 성도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존귀의 선봉입니다. 교만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겸손하면 누구에게나 환영받습니다. 

어느 날, 한 교회에서 드러나기를 좋아했던 김 장로와 조용히 헌신하던 박 장로가 동시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 김 장로는 백마, 적마, 흑마의 세 마리의 말에 아홉 상자의 보물을 싣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의 분기점에 이르렀는데 천사가 그를 보자마자 대뜸 “이 쭉정이 장로야!”하고 크게 화를 내며 그를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곧 이어 박 장로도 천국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천사가 “당신이 내세울 것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박 장로가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천사는 “알곡과 같은 장로님! 어서 오십시오. 세상에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천국으로 안내했다고 합니다. 

겸손해야 세상에서도 대우받고 천국에서도 대우받습니다. 겸손이 없으면 눈물과 희생을 통해 삶을 깊이 보는 지혜가 생기지 않고, 십자가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겸손이 없으면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고, 순종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좋은 일을 시작했다가도 금방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날 왜 사람들이 버티기보다 그만두는데 익숙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버티면 버틸 수 있지만 그만두면 모든 길이 막히고, 심지어는 열릴 길도 막힙니다. 우리는 가끔 힘들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고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나옵니다. 그런 생각에 지지 말아야 합니다. 나쁜 일은 과감히 끊어야 하지만 좋은 일을 시작했으면 승리할 때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밀고 나가는 힘이 바로 겸손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주어진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던지 어설프게 하지 않았습니다. 

교만이란 턱을 쭉 내밀고 뽐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시작했다가 성급히 포기하는 것도 바로 교만함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맡았거든 도중에 포기하지 말고 그 일을 온전히 이뤄내야 합니다. 어떻든지 포기는 항상 이른 것입니다. 그처럼 맡은 일을 끝까지 잘 완수하는 것이 겸손한 알곡 성도의 모습입니다. 


3. 종자를 남기는 성도 

쭉정이는 껍질만 있기 때문에 번식할 수 없지만 알곡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번식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영생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전도는 남의 영혼도 살려주지만 내 영혼도 살려줍니다. 전도가 없으면 내 영혼부터 죽게 됩니다. 반면에 전도가 있으면 내 영혼부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예수’라는 생명의 씨가 있다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 씨를 다른 심령에 심는 일은 더욱 고귀한 일입니다. 

생명이란 활동, 열심, 그리고 정열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을 남에게 나눠주지 않으면 생명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어둠을 깨칠 강력한 열정을 가지고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전도가 없는 것은 성도의 가장 큰 책임회피와 직무유기중의 하나입니다. 

2차 대전 때, 한 프랑스 청년이 총살당하면서 총을 겨누는 병사 앞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왜 저를 죽이려 합니까? 저는 나라도 배신하지 않았고, 동지들도 죽이지 않았고, 국가 기밀을 팔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총을 겨눈 병사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야, 자네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 바로 죄야.” 우리는 전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4. 고난 중에 빛나는 성도 

알곡과 쭉정이는 언제 가장 잘 구별됩니까? 바람이 불 때입니다. 바람이 불면 알곡은 안으로 더욱 파고들지만 쭉정이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처럼 문제가 있을 때 더욱 예배에 힘쓰고, 더욱 기도하고, 더욱 헌신하는 성도가 알곡 성도입니다. 교회도 약해질 때 더욱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가 알곡 성도입니다. 

사람 됨됨이는 고난 중에 다 나타납니다. 힘들 때 성격이 나타나고,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노출됩니다. 또한 누군가 떠날 때 그 뒤에 무엇이 남는가에 따라서 인간성이 다 드러납니다. 누군가 떠날 때 “그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하는 반응이 있는 사람은 알곡으로 잘 사신 사람입니다. 반면에 “그 사람이 떠나니 속이 후련하다.”하는 반응이 있는 사람은 쭉정이처럼 살았던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쭉정이 못지않게 불행한 존재가 싸라기입니다. ‘싸라기’는 ‘절미’라고 하는 ‘부스러진 쌀알’로 알곡 틈에 끼어 있지만 진짜 알곡이 아닙니다. 그처럼 싸라기 신자들은 축복에는 관심이 있지만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싸라기 신자는 교제하고 남에게 인정받고 재밌는 봉사는 하지만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해 있으니까 비판과 불평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순수하게 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가끔 보면 유난히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불평 중에는 타당한 불평도 있지만 대개 보면 공동체 생활을 모르고, 가치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판단만 믿고 시기와 질투와 교만으로 불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처럼 자기 맡은 일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의 일과 스타일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하고 비판하면 공동체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쭉정이보다 싸라기가 더 공동체를 힘들게 합니다. 

목회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목회를 시작하고 처음 10년 동안은 대개 그런 분들을 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거의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영혼을 잃게 하고, 교회에 후유증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서서히 리더십의 변화가 오고 목회자에게도 점차 강한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어느 공동체에 가든지 ‘잃어버린 양’은 되는 한이 있어도 ‘떼어내야 할 암’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 믿는 자는 패배가 없습니다 > 

결국 공동체에 부는 환난의 바람에는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 바람에 쭉정이처럼 사라지는 존재는 이미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사명을 따라 좁은 문으로 날아가는 삶은 축복이지만 바람을 따라 넓은 문으로 날아가는 삶은 저주입니다. 결국 진실한 성도에게 생기는 환난의 바람은 더욱 큰 축복을 위해 주어진 바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바람에 맞서야 합니다. 바람에 맞설 줄 아는 큰 믿음이 결국 큰 역사를 만들어냅니다. 

믿는 자는 큰 의미에서 결코 패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패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고난과 아픔은 최종 승리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세상은 학문과 ‘빽’을 가져야 진급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야 진급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을 포기하면 하나님의 도움도 포기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는 믿음을 포기하는 실패입니다. 

이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전진하십시오. 그리고 좀 더 가벼운 짐이 아니라 좀 더 강한 등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서 약해지지 말고 고난 속에서 더욱 강해져야 합니다. 

히브리 겪언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곡식은 부서져야 빵이 되고, 포도는 으깨어져야 포도주가 되고, 꽃이 짓이겨져야 향수가 됩니다. 음식도 단단한 입안에서 잘게 부서져야 소화되어 영양분이 됩니다. 그처럼 성숙한 신앙과 인격을 갖추려면 반드시 부서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부서짐의 크기가 성숙의 크기입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추수한 곡식을 앞마당에 펼쳐놓고 농부들이 사정없이 도리개질을 했습니다. 그때 곡식들은 “아파 죽겠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외쳐대지만 농부는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때리는 것은 곡식이 미워서 아프라고 때리는 것도 아니라 껍데기를 벗겨내 알곡을 만들려고 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도리개질을 하실 때 때로는 너무 아프고, 때로는 “왜 제가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불평도 나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계속 도리개질을 하십니다. 그것은 더 많이 부서지고,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죽으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서진 만큼 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통해 살고, 부서짐을 통해 새롭게 되고, 깨짐을 통해 쓰임 받고, 버림을 통해 얻는 종교입니다. 그 원리를 알고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루만 죽어도 안 되고, 한번만 죽어도 안 되고, 한번만 깨지고 부서져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 때문에 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실제보다 더 힘들게 느낍니까? “나는 날마다 사노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왜 불쑥 혈기가 나고, 미움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원망과 짜증에 시달립니까? 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과 절망감이 생깁니까? 그것은 아직 덜 죽고, 덜 깨지고, 덜 부서져서 그렇습니다. 잘 죽으면 잘 살 일만 남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소망을 잃지 말고 고난을 통해 파도타기를 즐기십시오. 

참된 성도는 ‘편하게 살면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믿으면 편하게 살 줄 알고, 만사형통할 줄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깊어지면 편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헌신하며 사는 것이 행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생기면서 힘들 때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것이 참된 믿음을 가진 증거입니다. 


< 누림이 진짜 영성입니다 > 

살다 보면 믿음 때문에 손해보고, 믿음 때문에 참아야 하고, 믿음 때문에 기다려야 하고 믿음 때문에 상처와 고통과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을 통해 환경을 바꾸는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고난은 죄와 저주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진실한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려는 연단과정이기도 합니다. 

기도 응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몇 달, 몇 년 동안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인내하면 반드시 축복의 때가 옵니다.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25년을 믿음으로 이겨서 마침내 이삭을 얻었습니다. 태를 닫으시는 하나님이 때가 되면 태를 여십니다. 

범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때를 모세는 40년, 야곱은 21년, 요셉의 1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결국 기다림이 믿음이고 기다림이 영력입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이 와도 “내 영혼 평안해!”라고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극심한 고통 중에 평안할 수 있습니까? 남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말이 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이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얻었는가?”에 있지 않고, “무엇을 '누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주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바로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 누림이 진짜 영성입니다. 영혼은 누리지 못하면 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고난이 찾아올 생각도 하지 못하게 먼저 적극 헌신함으로 다가오는 고난에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합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평안은 편안을 포기할 때 주어집니다. 편안하게 살 수도 있지만 그 편안함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포기하고, 쉽게 살 수 있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넓은 문을 뻔히 두고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이 바로 참된 믿음을 가진 알곡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때 하나님은 평안도 주시고, 조만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편안함이 행복의 이유가 아니듯 불편함이 불행의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을 깨닫고 사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갈 때 비록 현실은 초라해보여도 그 비전은 반드시 이뤄지게 될 것이고,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될 것입니다. 

모세는 척박한 호렙산에서 약속의 가나안 땅을 보았고, 엘리야는 메마른 갈멜산에서 소낙비를 보았고, 요한은 외로운 밧모 섬에서 인류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고난 중에 환상을 품는 사람 편에 섭니다. 그러므로 어려워도 꿈과 비전을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아침에 다시 한 번 꿈과 비전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일을 감당하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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