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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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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살리라 (롬 1:16-17)


I. 기쁜 소식

태양이 발하는 에너지를 1초동안만 정확하게 축적할 수만 있다면 이 지구상에 있는 60억 인구가 100년을 쓰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다고 합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 한방울은 사탄의 권세를 부수고 만인간을 구원하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 한방울이면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고도 넉넉히 남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새가족이 계시면 오늘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구원 얻고 영생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큰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단 한 명이라도 주님 앞에 돌아와 주님을 만날 수만 있다고 하면 전 목이 터져라 설교해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준비하고 여기 수천의 한소망의 모든 가족들이 함께 이 예배에 동참하여 그 한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끝난다 할지라도 오늘은 멋진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교는 반드시 새신자들만을 위한 설교는 아닙니다. 

가끔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신앙생활에 감격이 없고 미지근한 사람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 믿은지 오래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무감각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보게 됩니다. 예외없이 그들은 교회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를 새롭게 만나야 될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피 묻은 복음 앞에 녹아지고 깨지는 경험을 해야 될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고치기 어려운 병 중에 하나가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 십자가 복음에 무식한 사람이 앓는 질병입니다. 예수의 공로는 모르고 자기 공로만 드러내고 사는 사람이 가장 심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설교, 회개 설교, 복음 설교를 하게 되면 ‘다 아는 얘기, 기초적인 얘기하고 있네’ 시큰 둥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바로 그 사람이 기초가 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새신자들은 구원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오랜 신자들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로마서 1장 1절부터 17절까지 읽어보면 복음이란 단어가 부려 일곱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 - “유앙겔리온” 이 말은 “유” 좋다 “겔리온” 소식이란 뜻입니다. 바로 유앙겔리온은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Godspell - 좋은 이야기, 복된 이야기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끝날 즈음에 모든 영국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속에서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기면 유럽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여기서 패하는 날이면 전유럽이 나폴레옹의 말발굽아래 처절하게 짓밟히기 때문입니다. 웰링톤 장군이 패배했을까? 아니면 승전소식을 가지고 돌아와 줄 것인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전보도 전화도 e-mail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전쟁의 결과는 오직 높은 탑 위에 올라가서 알려주는 파수병의 신호로 전 런던 시민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드디어 수기 신호가 올라가는데 안개속으로 어렴풋한 글씨가 보여집니다. “웰링턴 장군이 참패” 온백성 앞에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 2시간이후 안개가 걷힌 다음에 또 다른 한 글씨가 보였습니다. “웰링턴이 참패시켜 승리하였다!” 이 승전 소식을 유앙겔리온 -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승리하면 자유인이요 패하면 노예로써 멸망당하던 사도 바울 당시 전쟁의 승전보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이 사회적인 개념을 기독교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그를 의지하는 모든 백성을 살려내는 영원한 구원의 소식을 “복음” 유앙겔리온이란 단어로 소화를 시켰습니다. 예수 그 분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영육간에 모두 다 부활할 영원한 승리를 유앙겔리온, 복음이란 단어로 소화를 시켰습니다. 

II.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

종교 개혁가들의 대 헌장이 되었던 본문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에 대한 강조어입니다. 반어법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명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당당한 권세를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없이 부끄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가던 사람이었죠.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내용이 로마 시민을 향해 외치는 서신이라는데 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힘만이 통하는 국가였습니다. 여기서 강자만이 진리요 약자는 불의였습니다. 승리만이 진리 즉 살아남는 것이 진리였습니다.

더구나 그 중에서도 로마인들은 유대인을 몹시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유대 땅 나사렛 사람 예수 사건, 살인 강도와 함께 무력하게 죽은 예수, 거기서 그들이 외치는 설교는 로마 시민들이 그렇게도 부끄럽게 생각하던 겸손, 사랑, 회개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로마를 향하여 그들과 함께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금 선전 포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앙겔리온-승전의 소식은 로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분의 복음 안에 있다고 외칩니다. 로마인들이여 너희들이 말하는 힘, 능력이 무엇인가? 진정한 능력은 복음 안에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 한마디는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로마가 힘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이 힘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능력이라는 말은 원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 폭탄을 말합니다. 즉 반석이라도 폭발시켜 산산조각을 내는 엄청난 힘, 초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는 현대의 문명을 다이나마이트의 문명 즉 폭탄의 문명이라고 이름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통 시대를 가능케 했던 것이 다이나마이트입니다. 선로 고속도로 다리 등을 가능케 했던 것이 다이나마이트의 능력이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는 산도 헐고 바위도 타작하듯이 깨트려 버립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수많은 위인과 성인과 철인들이 천성가는 길을 뚫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였으나 그들의 수고는 헛수고였습니다. 성인 현인들의 수고는 호미 한 자루에 불과했습니다. 괭이질, 삽질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이나마이트만이 천국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대로마제국이 영원히 나라를 다스릴 것 같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영원히 이어질 왕국은 따로 있다. 그 왕국이 하나님 나라이다. 로마의 황제가 세계를 정복했다고 외치지 말아라. 그들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나사렛 예수만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만왕의 왕이 되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시다. 로마의 가치관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는 영원히 이 땅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토록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 복음의 특권을 알고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숨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다가 손해 볼 수 있습니다. 핍박당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그 무엇도 자랑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자랑합니다. 그때 복음의 능력이 내 안에서 폭발적인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복음이 가져다 주는 능력이 무엇인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많은 능력가운데서도 구원하는 능력이 바울에게서 그토록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지옥가지 않아도 되었다.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받은 백성, 영생얻은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그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구원은 지옥가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천당 가는 겁니다. 천당 가기 위해서 지옥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현대인들은 퍽 자존심 상해합니다. 그래서 고상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고상함이 무엇입니까? 사탄의 올무에서 해방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고상함보다 더 큰 고상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옥의 백성들이 영원한 천국의 백성들이 되는 것 보다도 더 고상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죄악의 자녀들이 되어서 죄악을 물 먹듯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 보다도 더 복되고 고상한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할 때 그래서 자기의 행위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신분증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허물이 많습니다. 내 힘 가지고 내 재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죄인이라는 신분증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여러분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확신과 긍지를 가지고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리하여야 여러분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이웃을 구원할 열정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확신이 있을 때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감격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웃들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없을 때에 세상의 작은 일들 때문에 금방 쓰러지고 넘어지는 현실적인 그리스도인들, 일시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맙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될 때에 세상이 우리를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III.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이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 아닙니다. 내 공로 아니라. 내 자격으로 얻은 것 아닙니다. 내 선행을 쌓아서 얻는 것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어떤 때는 구원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이렇게 믿어 가지고 구원받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예수 믿는 갈등이 있습니다. 좀 열심을 내고 착하게 사는 듯 할 때는 ‘내가 구원받았지’ 싶다가 실수합니다. 넘어집니다. 그리고 가끔 죄악에 쓰러지고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구원을 잃어 버린 것처럼 여겨집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지는 갈등이 있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잘나서 얻는 것이라고 하면 불안할 수 밖에요. 변덕스러울 수 밖에요. 내 딸과 내 아들이 내 자녀로 한번 태어나면 그 효과는 영원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내게 효도하고 착하게 굴 때만 내 자녀이고 아이들이 실수하고 내 속을 썩일 때면 내 아이들이 아닌 것 아닙니다. 부모 자녀 관계는 자식의 태도 여하에 상관없이 영원히 내 부모요 내 자녀입니다. 

한 번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삼아 주셨으면 내가 실수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 여러분이 실수하여 넘어진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주실 수 있다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속죄함을 얻습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선포가 바로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몇 가지 진리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 생명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유일한 진리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현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그래야 이 다양한 시대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도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샤머니즘에도 구원이 있다. 힌두교도 괜찮다.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사상에서 보면 기독교는 독선이요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이 기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현대인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현대인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진리는 하나입니다. 내 아버지 한 분이요, 내 어머니 한 분이듯 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구원의 길도 하나 밖에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만이 갈 수가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신부가 목탁 두드리는데 가서 앉아 있고 승녀가 성당미사에 앉아 있는 것이 통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언론들이 저마다 폭넓은 종교로 칭찬을 합니다. 멋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의 눈으로 보면 신령한 하나님의 눈, 거룩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증스러운 일들입니다. 우리는 천주교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불교를 불교로 인정하고 천주교를 천주교 자체로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여기 지금 죽어가는 중병환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약은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착하고 신실한 의사라고 하면 이 약 먹어야 삽니다. 먹기 힘들어도 먹어야 합니다. 구하기 힘들어도 구해서 드셔야 한다고 분명히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 힘들다 그래서 그냥 머큐롬 발라도 괜찮습니다. 두통 약 한 알이면 끝날 겁니다. 소화제 한 알이면 끝납니다. 그럴 수 없는 게 의사의 양심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셋째, 오늘 본문은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1: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처방전이 있습니다. 믿으라! 믿으면 끝난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 보아도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다른 처방이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기가막힌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까? 그래서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좋은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IV.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사람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이 얼마나 간사합니까? 구원 얻는 길이 너무 쉬우니까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다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히 사는 천국에 간다”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뭔가를 보태는 겁니다. 선행도 조금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믿음생활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뭔가를 보태고 싶은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50%는 믿음으로 되지만 50%는 선행이 따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그렇듯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99%는 하나님의 은혜요 1%는 내 선행이 아닙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99%는 믿어야 되고 1%는 내 선행이 보태져야 하는게 아닙니다. 100%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인간은 자신이 뭔가를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가증스러운 현대인들에게 비위를 마칠 수 있겠습니까? 그 현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들의 논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구원 얻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는 하늘 문입니다. 여기엔 제한이 없습니다. 국경이 없습니다. 남녀노소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지식인이나 야만인이나 히브리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의 자리에서 내가 내려 앉는 것입니다. 내 욕망이 내려 앉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던 사탄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중심의 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그 분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 그 분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분이 당신을 만나 주셨음을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할 수 있을 때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얻은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은혜입니다. 100% 은혜입니다. 100% 믿음 외에 다른 길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몇날 며칠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너무도 배가 고팠습니다. 저만큼 원두막이 보였습니다. 원두막에 갔더니 마침 주인이 없습니다. 원두막에 궁둥이를 걸치고 주인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 주인 오면 돈 주면 되지 생각하고 토마토를 하나 뚝 따서 슥슥 문질러 먹었습니다. 그리고 참외 하나, 수박 퍽 쪼개서 퍼먹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주인이 나타나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내려왔지요. 본의 아니게 도둑놈이 된 겁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교회에서 은혜스럽게 설교를 했겠죠. 그리고 교인들을 다 보내고 묵상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네 눈이 범죄하거든 눈알을 빼 버려라” “하나님 제 이놈의 눈이 토마토 보니 주인은 없는데 그만 먹고 싶어서 먹었습니다. 수박도 쪼개서 먹었습니다. 이 눈을 빼야 할 까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종아 눈알만 뺄 일이 아니다. 네 손이 수박 깼으니까 손도 잘라라” “하나님 손 자르면 어떡합니까?” “아니다. 네 발이 뚜벅 뚜벅 남의 수박 밭에 들어갔으니까 발도 잘라야 할게다” “하나님 발 자르면 어떡합니까?” “아니다. 그 수박이 네 목을 타고 내려갔으니까 목도 잘라라. 아니다. 네가 먹은 수박이 온 핏속에 지금 흐르고 있으니 피를 다 뽑아라” “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이군요” 그래서 이 목사님이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은혜받은 것이 아니고 남의 수박 따먹고 은혜 받았습니다.

 ♪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 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257장)    (통189장)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하나님 도둑놈 된 다음에 은혜가 오는 군요. 하나님 토마토 따먹고 은혜 받습니다. 

이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함 받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V.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오늘 본문은 놀라운 한 선언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구약에서 일찍이 선지자들이 외쳤던 선언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외쳤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을 기록하며 놀라운 선언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함께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문장의 주어 동사는 “의인은 살리라” 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하는 것은 수식어죠. 이것을 형용사 형으로 볼 것인가? 부사형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부사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살리라를 꾸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 먹고 산다.”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식어를 형용사형으로 보면 의인을 꾸미는 단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이런 뜻이 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의 신학사상으로 보아서 신구약 사상으로 보아서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경가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을 살리라. 즉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죽는다는 겁니다.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들, 자기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 구원을 위해서 가기 자격과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종교, 죽는다. 사는 길이 없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이 말은 예수를 믿으면 당장 의로워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아직까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배짱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평생 사람만 살리는 인간 구조사가 있다고 하십시다. 평생 100명의 죽어가는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러다가 홧김에 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살인자입니다. 평생 자선사업만 하고 살아가던 사람이 한번 탈세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범법자인 것입니다. 거대한 바위도 물에 가라앉습니다. 조그마한 모래알도 물에 가라앉습니다. 평생 죄를 지은 사람도 지옥 갑니다. 평생 선을 행하다가 한번 죄를 범해도 그는 지옥 가기는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면 그 자리에서 끝장이 나는 겁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사람이다”고 얘기했습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 앞에 들춰내서 보면 율법의 눈으로 나를 바라다 보면 나는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발라서 예수님의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보면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이미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이 복음은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히브리 사람들에겐 꺼리끼는 것이요 로마인들에겐 멸시함 받는 것이지만 믿는 자 특별히 사도 바울에겐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서 결코 사도 바울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았던 이 복음이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누구든지 주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절대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아니할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예수 믿는 당신을 부끄럽게 만들지 않습니다.

유사이레 진정으로 그 앞에 찾아 나온 단 한 사람도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당신의 영혼이 비록 지옥에 있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건져낼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 보실까.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실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습니다. 

한 얘기 엄마가 복잡한 길에 나아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길잃은 아이는 “엄마~ 엄마~” 엄마를 찾아서 울고 있습니다. 이 아이를 찾는 어머니는 헝클어진 복장에다 소지품이 어디 갔는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동분서주 허겁지겁 뛰어다닙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길을 잃어버린 아이의 마음이 불안할까요 아니면 이 아이를 찾는 어머니의 마음이 더 불안할까요? 내가 길 잃고 방황할 때에,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갈 때에, 우리 아버지 마음 아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을 죽이시고 피흘리게 만드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돌아와~ 돌아와~ 돌아오기만 하면 나를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 뭘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믿음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뭘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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