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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다 (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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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다 (창 25:27-34)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뜻을 맞추지 못한 이삭 부부

이삭의 가정은 문제가 있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싸웠던 에서와 야곱은 자라면서도 다른 성향을 보입니다.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으로 활달하지만 조심성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집에 머물기를 좋아했습니다. 형제들의 성격이야 이처럼 다를 수 있지만 정작 문제는 그 둘을 대하는 부모들의 태도였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더 사랑합니다. 반면에 어머니 리브가는 성격이 서로 맞아서 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해서 그런지 야곱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편애는 마지막 축복을 받는 장면에서 극에 달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주는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 합니다. 반면에 리브가는 이런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도록 야곱을 충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단지 야곱에 대한 편애만 있습니다. 리브가는 그 그릇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하는 데는 야곱이 더 적합하다고 냉철한 판단을 내렸을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삭이 에서만 사랑하고 야곱을 미워한 데 대한 반발로 야곱만을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가족 간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부부가 서로 뜻을 맞추지 못하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편애를 한다는 점입니다. 부부는 서로 의논하고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이 부부 아닙니까? 결국 하나가 되는 데 실패하니까 부부 간에 서로 속이는 일이 발생하고, 형제 간에는 서로 죽이려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런 일은 야곱의 대에도 발생합니다. 야곱이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만 편애하여 그에게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비싼 채색옷을 입힙니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시기한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고 결국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리고 맙니다. 자식 중에는 분명 더 사랑스러운 자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모두를 균등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들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부부는 서로 대화를 하고 또 중요한 일은 함께 결정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속이게 됩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에서

장자권을 향한 치열한 싸움은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평생 동안 지속됩니다. 항상 싸움을 거는 쪽은 야곱이었습니다. 이는 야곱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형 에서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고 야곱은 거기에 도전하는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어느 날 죽을 쑤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34절에 ‘팥죽’이라고 번역을 하였지만 아마 붉은 색의 콩죽이었을 것입니다. 중동지방 사람들은 이런 콩죽을 잘 먹습니다.

에서는 아마 사냥을 나갔다왔나 봅니다. 배가 몹시 고팠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그 붉은 것을 나에게 달라고 합니다. 여기 붉다는 단어는 ‘에돔’과 같은 어근입니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고 이후 에서가 이룬 민족이 에돔 족입니다. 에돔 족은 그 조상 에서를 닮아 피부가 붉었습니다. 붉은 죽은 단순한 먹을 것이 아니라 에서의 삶을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야곱이 딜을 요구합니다. 팥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맞바꾸자고 합니다. 이런 제안에 대해서 에서는 32절에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하고는 장자의 명분을 팔고는 대신 팥 죽 한 그릇을 얻어먹습니다. 33절에서 야곱이 이 일에 대해서 맹세하라고 하니 맹세까지 합니다.

여러분 이 계약이 성사된 것입니까? 또 이 계약이 올바른 것입니까? 말로 이루어진 계약이기에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이 계약은 지금 에서가 배가 고파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27장 36절에서 에서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를 속였다고 하였습니다. 형법에도 위법성 조각사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조건입니다. 이 계약은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취소도 가능할 것입니다. 저는 이 계약이 유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장자권을 대하는 에서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34절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에서는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의 에피소드와 같은 사건이지만 이는 에서가 평소 장자권이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단순한 하나의 예지만 에서의 인격과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에 대해서 평가를 할 때는 단순히 한 사건 때문에 그런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켜본 결과입니다. 장자권과 관련한 에서의 태도는 그 아내를 얻는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34절 이하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창26:34-35) 에서는 가나안 족속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신앙적 가치관에서 멀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지 못한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한 번의 실수나 성공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한두 번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용서해 주시고 오랜 동안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여 하나님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을 버리신 사건일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계기가 되었던 것은 제사장 사무엘이 제 시간에 오지 않자 자기가 번제의 제사를 드린 사건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을 책망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마치 곧 사울의 왕위가 곧 끝날 것 같은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매우 엄격한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작은 실수에 대해서 가혹한 판단을 내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울 즉위 2년째 일어난 일이고 사울은 그 후로도 38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냉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이 자신의 태도를 돌이킬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어서 아말렉 족속과 그 우양을 다 진멸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좋은 것을 남겨두는 불순종을 저지릅니다. 이때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 후로도 사울의 실패는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을 품지 못하고 계속 죽이려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신접한 여자인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기까지 하였고 마지막 죽음은 자결로 마무리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기까지 이른 데는 이처럼 단지 한 사건이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와 인격 때문이었습니다.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이 한 사건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인생의 전반에 걸쳐 약속의 자손으로 살 수 있는 믿음을 져버렸고, 결국 이 때문에 언약의 계보를 이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를 대하는 하나님의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동시에 경고가 됩니다. 위로가 되는 이유는 한 두 번의 실수 때문에 우리가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러 번 실수해도 봐주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점으로 보면 안 되고 선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과거에는 어땠는데 현재는 어떠한지 좀 더 나아졌는지 아니면 더 나빠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오래 지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깐 우리를 속일 수 있어도 오랜 시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지켜보면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또한 우리는 경고의 말씀으로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팥 죽 한 그릇에 대한 태도이지만 이런 순간순간의 태도와 삶의 결정들이 모여 결국 우리 인생이라는 큰 그림이 완성됩니다. 점 하나 선 하나에 정성을 다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속에 그리는 목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며 그리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그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점과 선에는 실수도 있고 치우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립니다. 

어떤 분(신영복 선생)이 서예를 배우면서 깨달은 것이었는데 서예는 조화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쓰다가 잘못되면 서예의 특성상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글자를 통해서 그 실수를 보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한 획을 쓰다가 좀 뉘어지면 다른 획을 세워서 그 획에 잘못된 것을 고칩니다. 이렇게 잘못된 한 획 한 획이 모여 온전한 한 글자가 됩니다. 글을 쓰다가 한 행이 잘못 되면 다음 행으로 보충하고, 한 연이 잘못되면 다음 연에서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집니다. 부분 부분이 모두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보다 이렇게 실수와 실수, 거기에 대한 보상과 보충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글은 훨씬 정감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라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왜요? 사랑에는 실수가 많기 때문에 곧바로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럴 수 없습니다. 실수에 대해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그 실수를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실수하고 보충하고, 실수하고 보충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은 뒤돌아보면 구비구비 굴곡이 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에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조화를 이루어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가 그리는 삶의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목표로 그리다 보면 자기가 원하던 작품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의 잘못은 그런 그림이 없었거나 잘못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성공은 비록 실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그 그림을 목표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장자권의 의미

그렇다면 이 싸움의 정체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했을까요? 사실 장자권이라고 하지만 별거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축복을 누가 받을 거냐는 싸움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이삭이 임종을 앞두고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7장 28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축복권은 어떤 땅이나 권리를 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실 미래의 축복입니다. 실제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단 한 평의 땅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싸우는 것은 현재의 물질이 아니라 미래의 축복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매우 위대한 싸움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미래를 놓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보이지 않은 미래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모세의 삶 또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참고 현재의 부요함을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현재 잘 되는 것보다 미래가 잘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발전을 하고 또 타락하지 않습니다. 목표 없이 한가할 때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현재 우리 민족 비극은 미래에 대한 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일과 발전 더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라는 비전을 주셨지만 그것을 우리들의 목표로 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방자해졌습니다. 삶에서 절제와 나눔도 모르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양보하고 더 큰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기보다는 서로 분열하고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안달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인내하고 훈련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도전정신이 사라졌습니다. 가슴에 불이 없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미래에 대한 선명한 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보다 미래를 택한 민족은 현명합니다. 그들은 발전할 것이고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싸움은 당장 손에 쥔 것은 없지만 미래의 축복을 받고자 하는 위대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싸움에서 우리는 야곱의 선택을 하기보다는 에서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과 욕심을 좇아 행동합니다. 우리 또한 팥죽 한 그릇에 미래도 자존심도 팔고 있지 않습니까? 팥죽 한 그릇 못 먹어 죽습니까? 그런데 에서는 마치 죽을 것처럼 말합니다. 32절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것이 밥의 유혹입니다.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치 죽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사탄에게 처음으로 시험받았던 것입니다. 

40일 동안 주리셨던 예수님에게 사탄은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하며 이 유혹을 물리칩니다. 40일 굶었으면 죽을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위기도 바로 그렇게 찾아옵니다. 마치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극한적 상황에서도 결코 사람이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를 비겁하게 만드는 것도 이 팥죽 한 그릇입니다. 밥줄이 끊어질까봐 우리는 비겁해집니다. 한국 사회가 요즘 민주화의 위기라고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선과 권위적인 리더십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길로 가면 모두가 “아니오.”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밥줄이 끊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검찰도 검사복을 벗게 될까, 더 높은 자리에 못 올라가게 될까 두려워하고 비겁해집니다. 그래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회사의 잘못된 모습이나 사회의 불의 앞에서도 눈을 감습니다. 다 팥죽 한 그릇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이런 세태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절개와 자존심, 정의감으로 가득한 선비의 정신입니다. 선비의 대명사로 우리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들 수 있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들이었습니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동생은 형에게 형은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올랐고, 이 둘은 주나라 문왕이 있는 나라에 의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왕이 죽자마자 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주무왕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재상 강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살아나게 됩니다. 무왕은 은나라를 토벌하고 결국 주나라 시대를 열게 됩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가 망한 뒤에도 은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만 먹고 지냅니다. 나중에는 주나라에서 나는 고사리마저 먹을 수 없다고 하여 먹기를 거부하다 결국 굶어죽게 됩니다. 그들이 지은 채미가(採薇歌)란 노래가 있습니다. “저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었건만 그 잘못을 모르는구나. 신농, 우, 하나라 시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아아 이제는 죽음뿐, 우리 운명도 다하였구나!”

너무 고지식한 면도 없지 않지만 너무 지나치게 밥줄에 매인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니 이런 선비정신이 그립기도 합니다. 제가 밥줄 밥줄 하지만 현대인들이 느끼는 밥줄이 주는 공포감은 옛시대 사람들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풍요를 다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에어콘 없이 살 수 없고 도시가 주는 문화나 그 풍요함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정신적 가치나 삶의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오직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는 밥줄은 곧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매월 날아드는 카드대금과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우리는 악착같이 직장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아서밀러의 유명한 희곡 중에 <어느 샐러리맨의 죽음>이 있습니다. 1940년대 미국 사회의 샐러리맨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윌리 로먼이라는 샐러리맨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커다란 가방을 양손에 들고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는 세일즈맨 윌리,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라 불행의 전조이다. 그 짐을 지고 그 짐의 무게를 느낄 때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 짐을 놓아버렸을 때 이미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와 다를 바 없다.”

윌리 로먼은 아주 충실한 세일즈맨으로 평생 동안 줄곧 한 회사 물건을 선전하며 외판하고 다닙니다. 그의 꿈은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그 분야에서 오래 살아남는 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고, “지금 나는 이렇게 살더라도 자식들에게는 내 가난을 대물림해선 안 되지” 하며 그들을 위해서 희생을 합니다. 그렇지만 아들들은 자기의 희생만큼 자기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회사에서 해고되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할부금을 낼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됩니다. 궁지에 몰린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란 것은 자기 앞으로 들어 있는 보험금을 노리고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한 샐러리맨의 희생으로 가족은 살았지만 정작 그는 쓸쓸히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인생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팥 죽 한 그릇의 유혹은 결코 단순한 유혹이 아닙니다. 이 순간에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 풍요롭고 더 민주화된 시대를 맞고 있지만 우리 시대에 선비정신은 더 찾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팥죽 한 그릇 대신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선택하는 결단은 그 어떤 시대보다 더 위대한 결단이 될 것이란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점에서 야곱의 싸움은 치사하고 교묘한 것 같지만 분명 위대한 투쟁입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의 풍요보다 미래의 축복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버지 집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결국 그 믿음대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쫓아갔던 에서는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선택했던 야곱은 영원히 살아남았습니다. 

신앙인들은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으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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