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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평하는 요나 (욘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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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하는 요나 (욘 4:1-5)


윤석전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연세중앙침례교회가 지금의 성전으로 옮기면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목사님께서 성전 건축 때문에 너무 힘들고 고민이 되어서 자기 교회에 나오는 돈 많은 성도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교회가 어려운데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겠다는 성령의 감동이 안 오십니까?"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건축헌금을 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올까 봐 기도를 세게 안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사실 교인들 가운데 보면 은혜 받는 일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헌신도 더 해야 하는데 그것이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주머니에 대해서도 자유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예수 믿고 적당히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초라하게 하는 것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다는 말은 우리와의 관계가 지극히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격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감동과 감화가 없다면 그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오는 순간에 기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솔직히 물질이 없기 때문에 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오고 은혜를 받으면 그보다 더 큰 일도 감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지금 내가 드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드릴 수 있음에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일에 내가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 앞에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는 가운데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민감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그분의 역사 앞에 예민하게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사모하는 그 심령에 성령의 감화와 감동하심이 뜨겁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인생에 나이를 먹어갈수록 목사이기 이전에 아이들의 부모로써, 또 하나님 앞에 선 부족한 존재로써 하나님을 더 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강해집니다.  내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강해집니다.  내 육체의 남은 때를 주를 위해서 정말로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만을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제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서입니다.

먼 훗날 제 아이들이 장성하여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을 의지하기보다는 제가 믿고 의지했던 그 하나님을 제 아이들과 그 아이들도 믿고 의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 아이들이 아버지인 저를 생각할 때 내 아버지는 정말 부끄럽지 않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문에 그의 후손들이 믿음의 가문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제 아이들이 제가 뿌려놓은 그 믿음의 씨앗을 통해서 열매를 거둘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신앙의 흔적을 남겨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믿음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리고 또 뿌리십시오.  언젠가 여러분의 자녀들과 그 자녀의 자녀들이 여러분이 뿌려놓은 그 믿음의 씨앗을 통해서 반드시 열매를 거두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헌신과 수고와 섬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내 때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면 내 자녀들의 때에 반드시 누릴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과 섬김은 하늘 나라에서 별처럼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 변하기가 그렇게 힘들고, 인간 됨의 변화가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이제는 뭔가 좀 바뀌었으면 참으로 좋겠는데…,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 적지 않게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 사람 하나가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나, 이 사람을 보게 되면 사람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요나를 정리해 보면 1장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외치라는 사명을 받았던 요나가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폭풍을 만나 수많은 사람들이 물질의 손실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에 그는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폭풍 속으로 던짐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2장에서는 불순종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살점에 떨어져 나가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 앞에 굴종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니느웨성과 그 백성들을 싫어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마음을 접고 굴종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을 갚겠다고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또다시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위대한 사명을 주십니다.

3장을 보게 되면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고작 다섯 마디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마디의 외침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성의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까지도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철저하고도 엄청난 회개의 역사를 보시고 40일 후에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애초의 마음을 바꿔서 그 성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3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나 3장을 읽다가 본문의 4장을 읽으면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확 뚫리는 것 같던 것이 4장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집니다.  3장을 읽으면서 니느웨성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부흥 앞에 감동했던 그 흥분이 4장을 읽으면서 갑자기 내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3장에서 요나가 일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아름다운 사명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이렇게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면서 은혜롭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요나는 또다시 주저 앉아버린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명을 감당하던 그 요나가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던 그 요나가 이제는 불평하는 자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는 주저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별히 4장에 나타난 요나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불평하는 요나'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어제 은혜를 받고 사명을 감당하겠노라고 다짐을 하다가 오늘 불평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헌신을 하다가도 아주 작은 일들에 넘어져서 요나처럼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평하고 있는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요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자 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십시오.  이 짧은 본문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내가', '내가', '내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를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3장 4절에서처럼 요나는 니느웨 성을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정말로 그의 말처럼 니느웨성이 무너지기를 바랬습니다.  니느웨성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처럼 다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성의 사람들이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사실이 그로 하여금 불평의 자리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나가 불평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많은 선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의 역할은 범죄한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 망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범죄를 해서 하나님의 징계 앞에 직면해 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했던 시절에,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라의 멸망이라는 징계 앞에 서 있었던 이사야 시절에 이사야가 외친 말씀의 핵심도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것이 이 땅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참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요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요나가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망한다고 외친 그 외침은 정말로 니느웨 성이 망한다는 그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의 범죄로 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참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참 뜻은 외면하고, 요나는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복음 15장에서의 탕자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의 궁극적인 관심은 영혼 구원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참된 뜻도 영혼 구원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이 철저하게 죄에서 떠나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온 그 사건 앞에서 요나는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평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망한다고 외쳤는데 망하지 않는다면 내 입장은 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보다 자기가 내 뱉은 말대로 되지 않은 그 사실 앞에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구겨진 자신의 체면 앞에서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은 알았지만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참 뜻은 몰랐습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은 알았지만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말하고 외친 그 말 그대로만 되기를 바랬을 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옹졸한 사람의 모습입니까?

두 번째로, 요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나에게는 수용성이 없었습니다.  수용성이란 어떤 상황이든지 자기의 뜻을 접고 가슴을 열고 전적으로 받아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수용적인 자세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수용성이 부족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뜻과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원만한 공동체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이 수용성이 약한 사람은 그래서 언제나 불평 불만이 가득합니다.  지금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는 바로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수용성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이 그대로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면 사명을 믿음으로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자기 뜻과 다른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일에 대하여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어도 그 일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어느 누구든지, 설령 그가 철천지원수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에 들어와서 편안히 쉬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나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폐쇄적이고 편협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본문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에 보면,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너무나도 훌륭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그 속성을 자기중심적인 편협된 신앙 안에서만 한정시켜서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인애를 더하시는 분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의 나라를 위해서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는 결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도망가던 요나가 회개할 때 용서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의 사람들이 회개할 때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나는 자기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편협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이러한 요나의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요나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을 지극히 유한한 자신의 감정과 자기 중심적인 신앙 속에만 가두어놓으려고 합니다.  나 자신의 편협된 눈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야 합니다.  나를 향해서는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특별히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에게는 절대로 그렇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나는 용서를 받아야 하고, 그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이해를 받아야 하지만 그는 철저히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한 범위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내가 듣기에 좋은 것은 귀를 쫑긋 세워서 듣습니다.  그러나 내 귀에 거슬리는 내용은 철저하게 외면해버립니다.  내 입맛에 맞는 설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내 심령을 아프게 하는 설교는 불평과 원망과 미움으로 충만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생활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질 때에 사명을 감당하는 열심은 그만큼 더 뜨거워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끊임없이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더 옳다고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요나, 그는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고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한 마디로 말해서 저 이방인들이 구원받아 잘 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니느웨에 임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니느웨가 회개하면 제일 먼저 감격하고 감사해야 할 사람은 요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편견과 고집으로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죽여 달라고 합니다.  2장 2절에서는 그는 살려 달라고 했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서원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서는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니느웨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엄청난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의 이같은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때때로 어떤 일을 하다가 감정이 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했던 적이 없었습니까?
가정 일에서나, 교회 일에 있어서 사소한 감정 때문에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분란을 일으켰던 때는 없었습니까?
그래서 불평하고 뒤로 빠져서 구경군의 자리에 머물렀던 때는 없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자기 감정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옛 성품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이 중심이 되면 그의 입술에는 항상 불평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쉽게 불평하게 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불평하는 사람은 혼자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는 자신만의 불평 불만을 마치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한 사람의 불만으로 인하여 전체가 흩어지게 되고,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불평하는 사람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서 어느 누군가가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를 멀리 하셔도 좋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를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4장 1절에서 매우 싫어하고 성냈던 요나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고작 초막을 짓고 앉아서 구경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일어났던 그 엄청난 부흥의 역사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요나에게서는 더 이상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쓰시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은 강하게 하셔서 쓰시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미련 없이 버리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왕기하 18장에 기록되고 있는 갈멜산상에서 이방 선지자들과 대결을 하는 엘리야의 위대하고도 위풍당당한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을 단칼에 죽여버렸습니다.  그랬던 그가 자기를 죽이려는 이세벨이 두려워서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대신하여 엘리사를 세우게 하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내가 불평하는 자리에 서 있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신다는 말입니다.  내 입술에 불평으로 가득 차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세우셨던 계획들을 거두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불평하는 그 자리에 서 있는 순간 하나님은 축복의 촛대를 옮길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화를 내고 불평하면서 죽기를 원하는 요나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는 지금 요나가 화를 내고 불평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니느웨 성읍이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원망하고 못마땅해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선지자인 네가, 사명자인 네가 가져야 할 태도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지금 니느웨 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요나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본문 5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앉아서", "앉았다"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 3장 3절에 보면 니느웨 성읍은 사흘 동안 걸어야 할만큼 큰 성읍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요나는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앞으로 이틀은 더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5절에 보면 요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것도 성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말입니다.  그는 더 이상 사명자가 아닙니다.  그는 구경꾼입니다.  그는 더 이상 헌신자가 아닙니다.  그는 방관자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포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감정을 뱉어내는 불평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의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진노를 거두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싫어하고 화를 내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성 밖에 나가서 성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저는 요나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면서 인간의 못돼먹은 심보를 떠올려 봅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엔가는 이와 같은 못된 심보가 숨어 있습니다.  나는 잘 되고 남은 망해도 좋다는 마음이 우리들의 죄악된 심성에 다 있습니다.  사촌 논밭 사면 배가 아픕니다.  인류의 다른 모든 것은 다 변해도 이 심보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화를 기뻐하는 것이 자기의 복보다는 훨씬 기쁘다"
버어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란 남이 겪고 있는 불행이나 괴로움에 대하여 적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
입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갖는 것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앉아서 불평하고 구경만 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일어나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사명자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명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헌신하면서 묵묵히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은 그저 남들이 헌신하면서 봉사하는 것을 불평하고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돈이 많고, 권세가 높고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확실하게 알고 그 사명을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가정에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요나처럼 불평자로 살지는 마십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요나처럼 앉아서 구경하는 그런 삶을 살지는 마십시다.  비록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사십시다.  구경꾼이 아니라 사명자로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면서 충성되게 사십시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요,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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