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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에 굳게 서라 (고전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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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굳게 서라 (고전 16:13)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고 나서 믿는 책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이해가 되는 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탁월한 과학자들도 믿지 못하는 사실을 어떻게 의심 없이 믿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창조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저들은 우주가 본래부터 있었다거나 모든 생명체가 우연히 생겨난 단세포 아메바에서 진화되었다는 황당한 진화론을 믿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이 증언하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 받는데도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천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서른 살 쯤 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여 약 3년 반 정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다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 모독죄로 정죄 받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합니다. 

반면에 세인들은 이 같은 기독교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들도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인정하며,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인간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존경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예수님의 인품에 감동을 받고, 그 도덕적인 가르침을 따를지라도, 만약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왜 모든 사람이 동일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8절에 이르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은 우리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만이 받게 되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우리의 지성으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을 금 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고 하였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지극히 작은 믿음이라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아니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마가복음 9장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활용하는 성경적인 방법을 제대로 알고 적용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승리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성도들이 힘써야 할 믿음의 자세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깨어 있으라”는 권면을 자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에 보니,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였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 보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 함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나태해 지지 말고 항상 정신을 차리고 매사에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마귀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영적인 싸움터이며, 성도들은 싸움터에 나선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람이 아니라 영적 존재인 사탄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6장 12절에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다양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어떤 때는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무서운 모습을 하고 달려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광명의 천사처럼 꾸미고 다가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혀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만류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이 아니라 그 순간 사단의 꾐에 빠져서 사단의 대변인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뒤로 물러가라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내 뒤로 물러가라 곧 나의 뒤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살다보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시험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아니하면 마귀의 궤계를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마귀의 사악한 계교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능히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물욕이 가득한 것은 영적인 잠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월남전 당시에, 베트콩들은 부비트랩이라고 하는 위장 폭탄을 이용해서 적을 괴롭혔습니다. 그 방법은 폭탄을 적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몰래 설치하고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가는 철사로 부비트랩의 뇌관과 연결시킨 시계나 만년필 따위를 길가에 놓아둡니다. 그러면 그 길로 지나던 적군이 그 시계나 만년필을 보고 욕심이 생겨서 줍는 순간 숨겨둔 폭탄이 폭발합니다. 월남전 당시에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므로 병사들에게 아무리 귀한 물건이 떨어져 있더라도 줍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교육을 시켰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부비트랩을 설치해 두고 재물을 미끼로 삼아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속에 물욕을 품게 해서 사단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돈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한 디모데전서 6장 10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물질의 유혹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깨어서 재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미끼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세상 즐거움은 우리를 영적인 잠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6절에 이르기를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7-8)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밤에 속하였으나 성도들은 낮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은 성경적인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그 신앙의 토대 위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되, 그 분을 누구로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따르는 자들도 있었는가 하면,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 나온 자들도 있었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신기한 광경을 보기 위해 모여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표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신 18:15)고 하였던 바로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 아니냐고 한 것입니다. 

모세가 오리라 예언한 그 선지자는 곧 메시야를 가리킨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리가 한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모세의 말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인생들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분이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곧 유대인들이 처해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가 떡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는 분이라면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자기들의 왕으로 삼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찾아온 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였으므로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지지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 속하는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한 것을 보면, 유대교의 지도 계층이 예수님을 적대한 것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평판이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아는 것으로는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믿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게 됩니다(막 16:16).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듯이, 진품이 있으면 모조품이 생겨나듯이, 복음에도 참된 복음과 거짓된 복음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변질된 복음이 생겨나서 신자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입니다. 율법주의라 함은,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므로 그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라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부정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먹고 마시는 것 가지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할례를 행하거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하고도 관련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에 인간적인 그 무엇도 보태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 다음, 영지주의는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희랍 철학에 근거한 것으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악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리가 없으며,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또다시 악한 몸을 갖게 될 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과 몸의 부활은 성경의 불변하는 가르침입니다. 육체나 물질이 악하다는 생각은 비 성경적입니다. 죄는 육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있습니다. 

죄의 주체는 인간의 영혼이고 육신은 영혼이 명하는 대로 행하는 하인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지적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로 3절에 이르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은 예수님의 신성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역시 복음을 변질시킨 자들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 이론이 번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또 종류도 다양해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를 살펴본다면,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안위가 걸린 신앙에 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베드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른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항상 복음의 진리를 굳게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남자답게 강건해야 합니다.

먼저, “남자답다”는 말이 여자를 무시하는 뜻에서 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남녀를 대등하게 대우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1장 11절에 이르기를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언급한 부분이 많지만, 그와 동시에 어머니의 심정을 가지고 그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13절에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자신을 새끼를 날개 아래 품어 보호하는 암닭에 비유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는 사자 같은 마귀와 싸워서 이기려면 영적으로 강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귀를 인간의 완력이나 지혜나 수단으로 이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포나 총으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싸움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영적인 힘이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심령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강건해질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6장 10절에 이르기를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심령이 주님의 능력을 힙 입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에베소서 4장 16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준이나 규범을 무시하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의리나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도덕이나 신앙조차도 현세적인 성공과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강림이 임박했지만 다들 졸며 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오늘 말씀과 같이,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한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답게 마귀와 세상을 이기고 영광스런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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