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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말 하나님을 압니까? (호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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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을 압니까? (호 6:1-3) 
 

1. 알아야 산다!

영국 BBC 방송이 사람의 ‘몸’에 대해 기획, 제작한 <우리 몸, 알아야 산다>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방송사를 통해서도 두 번이나 방영이 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무관심한 현대인들에게 ‘과연 자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腎臟이 두 개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 그럼, 오른쪽 신장이 클까요, 왼쪽 신장이 클까요? 아니 신장이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신장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일반인의 약 10%에 불과하다고 하니까,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신장의 위치를 잘 모를 것 같습니다. 허리 위 배꼽과 마주하고 있다고 하니까, 나중에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장은 어떤 질병과 관계가 있을까요? 아마 당뇨 환자나 신부전증 환자들은 신장의 기능과 중요성을 잘 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肺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폐의 기능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폐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병이 생길까요? 心臟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심장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심장에 이상에 있으면 어떤 병이 생길까요? 酷寒과 暴炎의 기후 변화 속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는 첨병이 皮膚라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BBC 방송이 이 5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의도는 표제 그대로 “알아야 산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생각 밖으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것, 그 무지 때문에 더 큰 화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해 아는 것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필수적인 일일 뿐 아니라, 건강을 넘어서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육신적인 생존을 위해서만 아니라, 내세와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여러분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지식’입니다. 도대체 ‘하나님 지식’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지금과 다음을 결정짓는 것이 된다는 말일까요? 오늘 성경은 역사적인 증거를 통하여 그 답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아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

1) 불행한 이스라엘

오늘 본문을 기록한 호세아는 주전 752년경부터 722년 직후까지 북 이스라엘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사역했던 선지자입니다. 즉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가장 어려울 때 사역했던 선지자라는 것이죠. 

이 호세아가 선지자로서 사역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우선적으로 명령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라’는 말씀이었습니다(1:2). 결혼은 분명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호세아의 결혼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1:2). 여기서 “음란한 여인”이란 직업적인 창녀라기보다는, 행실이 부도덕하여 결혼을 해도 바람을 피우고 남편과 가정에 충실하지 않을 여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의 부인은 결혼 전부터 행실이 부도덕하다고 소문이 난 여인이었고, 결혼 후에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까지 명령하셨는데요. “음란한 자식들”이란 그 어미가 음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내가 부도덕하고 그 자식들까지 아내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달고 살아야 할 처지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호세아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머뭇거리면서 시간을 끌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이고 전적으로 순종하여 ‘디블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했고, 二男一女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3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호세아와 결혼한 고멜은 자녀를 셋이나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세 아이들을 버려두고 가출해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의 결혼생활은 이렇게 불행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호세아는 이런 불행한 가정을 이루어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미워하셔서 그를 징벌하기 위하여 이런 결혼을 명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그리고 호세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선지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던 여로보암 Ⅱ세 때의 북 이스라엘은 太平聖代를 謳歌하고 있었던 시대로, 모든 면에서 매우 안정되고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백성들은 바알 신을 비롯한 이방신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종교는 바알 종교와 혼합되어 있었고, 제사장들도 타락하여 종교 혼합을 조장하고 성직자로서의 임무와 사명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物質萬能主義가 팽배하고, 성도덕이 문란하였으며, 가난한 자들이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부정과 부패가 팽배하여 공의와 사랑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또한 여로보암 Ⅱ세가 죽은 후, 국내 정치는 불안해져 政變이 계속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동쪽의 앗시리아 제국의 티글랏빌레셀 Ⅲ세(B.C. 745~727)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모든 것을 약탈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렇게 북 이스라엘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죄, 영적인 죄였습니다. 그들의 죄는 정말 갈 때까지 간 모습이었는데, 그 핵심에는 신랑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심각성은 호세아 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비롯한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과 함께, 건포도 떡으로 즐기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었던 ‘건포도가 들어간 빵’은 먼저 우상에게 바치고 물려 낸 것으로 그것을 즐거워하면서 먹었다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온전한 마음으로 우상을 섬겼고, 그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즐겁게 잔치하면서 먹는 것이 그들의 日常生活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이 바로 한 남자의 아내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음란을 행한 것과 같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보이시기 위하여 호세아와 그 가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로서 호세아의 메시지는 입술로 선포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과 가정을 통하여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충실한 아내가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비롯한 이방신들을 섬기는 음란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선지자의 가정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선지자 호세아의 사역은 이스라엘의 죄짓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다 중요한 메시지가 그 뒤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악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3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가출하여 다른 남자와 동거 중에 있는 그 아내 고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무슨 말입니까? 호세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셋이나 둔 고멜이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남편과 세 아이들을 버려두고 가출해 있었습니다. 

어쩌면 선지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성향이나 결혼 전까지 살아 온 것과는 너무나 달라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출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껏, 먹고 싶고, 가고 싶고, 즐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다가, 한 남자와 가정에 매이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일인데,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고멜은 가출을 했고, 다른 남자의 품에 있었습니다. 당시 법으로, 남편 있는 여자가 음행을 하거나 다른 남자의 품에 가 있으면 두말할 것 없이 그냥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호세아에게 ‘가서 고멜의 몸값을 주고 다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가 가서 “내 마누라요”하고 그냥 데려오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그녀의 몸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2절에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었습니다. 돈으로 치면 약 30 세겔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여종의 몸값이었고, 다른 남자 품으로 달아난 부인을 되찾는데 드는 비용이었습니다. 여러분, ‘은 30 세겔’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예,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배신당할 때 그들이 주고받은 금액이 바로 은 30세겔이었습니다. 

성경은 정말 놀랍습니다. 아무튼 여러분, 이것이 남자가 할 일입니까?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과 자녀들과 가정을 버리고 간 여인을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몸값까지 지불하고 데리고 오라니요? 차라리 지나가는 거지에게 그 돈 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를 위하여 그를 사라(3:2)!” 무슨 말씀입니까? ‘호세아야, 네 아내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데려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 정말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길거야! 네가 네 아내에 대해서도 그러한데, 나를 버리고 내 목전에서 온갖 우상을 섬김으로 죄를 범한 내 백성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어떻겠니? 그러나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이 언제든지 돌아오면 반겨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는데 비용이 든다면 얼마든지 지불해서라도 그들을 데려올 것이다. 그러니 너는 이러한 나의 마음과 뜻을 잘 알고 순종하여 너와 너의 사랑을 통하여 나와 나의 사랑을 증거해라!’ 하나님을 위하여 가출한 아내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호세아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라는 신학자이자 설교자는 호세아서를 ‘성경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 이야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예, 요한복음 3장 16절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 다음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는 호세아서이고, “그 중에서도 호세아 3장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장”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생각으로 또 다른 어느 학자는 호세아 3장을 구약의 “요한복음 3장”이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불행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 싫다고 다른 남자 찾아가서 그나마 행복하다면 다행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편은 우상을 섬기면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미 시작 부분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은 총체적인 난국이자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종교는 이미 하나님과 말씀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힘 있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짓밟히고 있었으며, 사회는 썩을 때로 썩어있었습니다. 국내 정치는 끊임없는 政變으로 엉망이었고, 나라 밖에는 이스라엘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나라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하나님 없이 산 그것이 그들을 가장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이 그 어떤 행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불행 타파의 길!

<호세아서>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3절,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서 “여호와를 알자”고 할 때의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아트’인데, 이 말은 ‘야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으로 또는 머리로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의 지성적 능력과 이성적 기능을 발휘하여 판단하고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여 아는 지식입니다. 또 하나는 경험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직접 눈으로 보아서 알고, 손으로 만져서 알고, 자신이 부딪쳐보고서 아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이 중에서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후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안다’는 말인 이 ‘야다’는 항상 듣는 것과 보는 것과 관련된 동사가 함께 쓰였습니다. 이렇게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을 뜻하는 이 ‘알다’는 단어가 창세기 4장 1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에서 보듯이 “동침하다”라는 아주 특별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뿐 아니라 창세기 19:8, 민수기 31:17, 35, 사사기 11:39, 21:11, 열왕기상 1:4, 사무엘상 1:19 등에서도 아주 완곡하게 표현되긴 했지만 남녀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의 ‘안다’는 말은 무엇과 같습니까? 
➊ 첫째로 성경의 안다는 말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관계를 가져서 어린아이를 낳는 것처럼 그렇게 아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성도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어 서로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 그 정도 되어야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수 조영남 씨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후에, 자기가 알게 된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의 샅바를 잡고』라는 책을 통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도 예수를 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조영남 씨가 주님을 바로 안 것입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가 한 여성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여성 편력이 많은 것은 그가 사람을 아는 데 있어서도 부족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그런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었겠으며, 따라서 그가 “나도 예수를 안다. 그러나 그는 신이 아니다”라고 한 말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만나 마음과 영혼과 육신이 하나 되어 서로를 깊이 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떤 인간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행복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의 ‘안다’는 말은 
➋ 좀 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요즘 저는 새로운 운동을 두 가지 배우고 있습니다.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마다 깨닫는 것이지만, 그 운동을 전혀 모르고 배울 때와 조금이라도 할 줄 알고서 배우는 것은 정말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서울에서 부교역자 시절 수영을 하겠다고 실내수영장에를 갔습니다. 코치가 ‘수영을 어느 정도나 할 줄 아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한글보다 수영을 먼저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보는 앞에서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해 보라’고 했습니다. 자신 있게 25 미터를 왕복하고 왔더니 하는 말이, “선생님 같이 자기 마음대로 수영하는 분은 초보자보다 더 가르치기 힘듭니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불쾌하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제가 기본기가 안 되어 있고 자세가 엉망이다 보니 수영을 기초부터 배워온 분들보다 빠르지도 못하고 또 오래 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분들과 함께 수영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수영을 제대로 배우는 데 자그마치 2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그 2년 동안 제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물’을 모릅니까? ‘네 가지 영법의 수영’을 모릅니까? 다 알겠고, 코치의 설명도 다 알아듣겠고, 저의 자세에 대한 지적도 다 이해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수영 자세까지도 뭐가 잘 되었고 잘못되었는지를 알겠는데, 정작 그 안다고 하는 것이 제 몸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그것을 제 몸으로 나타내는 데 그 만큼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었지요. 요즘 제가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두 가지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치의 가르침을 다 이해합니다. 저의 자세가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바른 자세가 되는지도 다 압니다. ‘몸에 힘을 빼라’, ‘부드럽게 스윙을 하라.’ 다 이해하는 말입니다. ‘오른쪽 팔을 겨드랑이에 붙이고 자세를 최대한으로 낮추고 라켓을 든 팔은 왼 눈썹까지 확실히 팔로우를 하라.’ 이미 한 달 전에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직도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운동을 못하는 것일까? 누가 이런 골치 아픈 운동을 만들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한다고 이러고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제가 어느 운동의 기본기에 대해서 머리로 이해했다고 아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머리로 이해해서 아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운동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아십니까? 머리로 말고, 여러분의 삶으로, 체험으로,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아시는지요?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외쳤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라”고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향해 외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외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고, 날마다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제사를 드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웰스’라는 사람이 쓴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경건함과 훌륭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들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잘 섬겨 왔고, 그의 경건 생활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경건 생활을 대표하는 것은 기도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오랜 시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생활은 모든 신앙인들의 모범이라고 칭송을 들을 만 했습니다. 

여러분, 일반적으로 기도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등등 …. 이 대주교 역시 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평생을 아침저녁으로 기도해 오던 중, 어느 날 저녁에도 예외 없이 “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내가 듣고 있노라.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보아라.” 그 순간, 대주교는 너무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볼 일이지 않습니까? 대주교는 평생을 “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면서 기도에 전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과 함께 하시고 실제로 기도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의 기도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이죠. 여러분, 그의 지식은 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평생을 경건하게 살면서 기도했을지라도 그의 하나님 지식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었지 산 지식, 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주교가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아마 그가 기도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기도하는 동안 그러한 간절함과 사모함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기계처럼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죠. 여러분, 기도만 그렇습니까? 찬송도, 봉사도, 헌금도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계속하다 보면 알맹이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들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하나님 지식,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그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본질이 사라진 채 형식만 남아있지는 않는지요? 왜 이스라엘이 불행해 졌습니까? 왜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을 알라고 호소합니까? 중심에 하나님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 참 지식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3. 바로 알아야 바른 신앙, 바른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넓게, 그리고 더 깊이 알아 가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저절로, 어쩌다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때로는 여러분이 즐거워하는 것을 버려야 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희생도 치러야 하고, 특별훈련도 받고 특별과외도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힘써야 합니까?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바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참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즉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갈 때, 그때 여러분은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복 속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큰 능력과 부요한 삶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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