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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입으로 (롬 1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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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롬 10:9-15)


I. 시인하는 신앙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왼편에 한 강도와 오른편에 한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 가운데 왼편에 있는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와 너도 살고 나도 좀 살려 다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강도는 달랐습니다. “너는 강도 죄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도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죽지만 이 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 당신이 낙원에 이를 때에 나도 함께 기억해 주십시오.” 평생 죄 속에서 살던 사람이지만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는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며 증거하여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이 뜻은 개인적인 동의의 차원을 넘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을 말합니다. 내가 믿는 복음을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두려움 없이 시인할 때에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신앙을 입으로 말하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지 아니하고 시인하지 않는 믿음은 불안전한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백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사가랴 제사장이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1년 후에 네 아내가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가랴로서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인하고 말았는데 그 순간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1년이 지나 아들 요한이 태어난 후에야 말씀을 시인했고 서판에 “요한”이라고 아들 이름을 썼을 때에 사가랴의 입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저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우리 주변에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죽으면 오늘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오늘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요, 모든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임종시 사람들은 대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복잡한 대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어떻게 구원받는지 아시겠습니까?” 지금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에게 복잡하게 대화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예” 이렇게 한마디로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또 가끔은 쓸데없는 말로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엄마 정신 차려.” 아니 정신 차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있겠습니까? 
“고모님 내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그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워있는 분이 대답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고개라도 끄덕일 수 있도록 간단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고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으며 달리는 말에 사지가 찢겨 죽어 갔습니다다. 예수님을 마음껏 고백하고 찬송하기 위해서 카타콤에 숨어서 햇빛을 보지 아니하고 살았습니다. 육신은 병이 들고 수명은 절반으로 줄어들어도 예수 믿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입으로 시인한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1999년 봄, 미국 덴버에 있는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학생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학생 2명이 학교에서 자기들을 왕따시킨 친구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한 사건이었는데 그 사건으로 학생 12명과 선생님 그리고 총을 쏜 학생 2명이 함께 죽었습니다. 그때 한 범인이 캐시라는 여학생에게 총을 겨누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냐?” 그 순간에 “믿지 않아.”라고 말하면 살 수 있었지만 “그래 믿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범인은 총부리를 더 가까이 겨누면서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은 없어!” “아냐 있어! 너도 믿어야 돼!” 곧 이어 캐시는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의 크리스챤 십대들이 캐시 버넬 T셔츠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 T셔츠에는 “그래. 믿어! (Yes, I believe in God)”라는 캐시의 고백이 쓰였습니다. 그 T셔츠를 입고 소년소녀들이 전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미국의 한 신문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캐시가 미국 교회에 불을 질렀다.”

II. 본문의 논리 

이어지는 본문 14절과 15절의 논리가 퍽 재미있습니다. 두절 속에 네 가지 질문이 등장합니다. 이 질문이 펼쳐질 때마다 시인하는 신앙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한 단계씩 높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의역해 보면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분명히 구원을 얻기 위해서이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처럼 귀중한 일인데 문제는 믿지 아니하고서 어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겠느냐. 그래서 믿음이 더 귀중한 것 아니겠느냐. 믿는 다는 것 좋다. 그러나 듣지 못하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 믿음은 들음에서 나느니라. 믿는다는게 행복이다. 듣는다는 것이 그토록 소중할 찐데 전파하는 자가 없다면 어찌 들을 수 있겠느냐. 보라 구원의 역사에서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우선되는 일이니라.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이렇게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소중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는 최고의 길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D. L. 무디 선생은 “전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한 사람은 단순히 혼자 예수 믿는 사람에 비해 100사람, 200사람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참된 신자라면 전도에 대한 환상과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은 거져 받았습니다. 은혜로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보상 심판은 내가 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가, 내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어떻게 헌신했느냐 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복음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까? 당신이 섬기는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되겠다는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교회의 환상을 말할 때 흔히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생각합니다. 역사상 성령님께서 그처럼 강하게 역사했던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루살렘만큼 축복과 성장을 누렸던 교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들이 한번 설교할 때에 삼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또 다른 집회에서는 오천명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돌아왔습니다. 수많은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무릎을 꿇고 돌아왔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에 돌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일 때마다 사람들은 함께 떡을 떼며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내 물건, 네 물건 구별하지 않는 유무상통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모일 때마다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저들이 기도할 때에 잠가 두었던 옥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신명나는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III.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본진적으로 잘못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중대한 약점이요, 허물이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바로 이 복음 전파의 사명, 지상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너희는 천하 만국을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 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들은 증인되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인 유언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많은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으나 소중한 명령, 교회에 위임하신 가장 본질적인 명령을 지키지 못한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교회가 불순종한다고 일하시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른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의 손발을 묶어서라도 일하십니다. 믿는 자들을 사방에 흩어서라도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교회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교회가 일하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얼마든지 한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다른 교회를 통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교회를 사랑하시므로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주님께서는 성령님의 역사가 나누어 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 우리의 손을 묶어서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사역으로 이끌어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셨습니다. 오늘도 일하십니다. 전하러 가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엄청난 핍박이 임했고 이 핍박으로 교회는 할수없이 흩어졌습니다. 동과 서와 남과 북으로 흩어져 사람들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노예로 끌려가서 저들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름 붙은 불을 몽둥이로 내리치면 불똥이 사방에 튀게 되고 그 불똥이 떨어진 자리마다 새로운 불길이 솟아 오르듯이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하여 예루살렘교회를 흩으시고 흩어진 자리마다 복음의 불길이 솟아 오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27년동안 한강 둑을 따라 가며 살았습니다. 83년도에는 대전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암사동이라고 하는 곳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거기서 몇 년간 있다가 이촌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촌동에서 오랜시간을 살지 못하고 망원동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망원동에 살다가 지금은 일산에 와 살고 있습니다. 다시 파주로 이사를 오겠지요. 

여러분 서울 지리를 아시는 분은 암사동, 이촌동, 망원동, 일산, 파주가 한강 둑을 따라 위치한 동네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홍수로 강이 범람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한강 둑이 터지는 것을 여러번 보았는데 둑이 터질 때에 어떤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강이 아슬아슬하게 범람하려고 할때 한쪽에서 터지면 다른 데는 터지지 않습니다. 또 다른 원칙은 한번 터지면 왕창 터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은혜의 물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면 왕창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가정을 향하여 축복의 둑이 터지기를 기원합니다. 한국교회를 향하여 성령의 둑이 터지고, 은혜의 불길이 터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복음으로 이 땅을 정복하는 날이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한국교회의 솟아 오르는 불길은 언젠가 휴전선을 녹이게 될 것입니다. 이 지역사회를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단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역사를 우리를 통하여 일으키기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침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교회를 쓰기를 원하십니다. 

구세군 창설자 윌리암 부스대장은 복음 전도에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가 어느 날 영국 왕후를 만나는 방문록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일평생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련다. 윌리암 부스.” 왕후가 그 방문록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일이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예, 저는 물구나무를 서서 걸으며 발바닥으로 탬버린을 치면서라도 한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해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주목을 해 준다고 하면 한 영혼이라도 내게 돌아와 준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조롱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남이야 나를 보고 미쳤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살겠습니다.”

그는 전도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순위입니다. 복음전파는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IV. 전도는 성도의 의무요, 특권

교하지구 새아파트로 이사를 간 집사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작은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늘 새집만 찾아다녔는데 이촌동에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를 했고 또 화정으로 이사를 했는가 하면 탄현 새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가 다섯 번째로 교하 새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심방오신 목사님께서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 새집이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이 집사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합니다. “목사님, 집이야 이동네 사나 저동네 사나 마찬가지지요. 새집에 들어가서 살아보면 불편한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전학을 할 때마다 적응 하는게 보통 고통이 아닙니다. 남편의 직장이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습니다. 새아파트로 이사한 사람들은 마음에 변화가 옵니다. 이제 종교를 가져볼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엉터리로 신앙생활하던 사람들은 이제 제대로 믿어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종교를 바꿔 볼까? 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나면 이사람 저사람 만날 수 있고, 전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전도할 수 있는 기쁨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나는 전도하기 위해서 이사를 합니다.”

집사님의 말을 들은 목사님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감동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가 연약한 줄 알고 불같은 여종을 보내주시는 군요. 이 목자의 가슴이 냉냉하게 식어진 줄 알고 하늘의 불덩어리를 내게 보내주셨군요. 이 여종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이, 이 종의 가슴에 옮겨 붙고 우리 성도들의 심령을 태우기를 원합니다. 이제 이 여종을 통하여 우리교회를 주님께서 쓰실 줄로 믿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이 세상일로 가득차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만 가득차 있나요?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식어 있지는 않습니까? 건져 내기를 원하는 영혼의 이름들이 가슴속에 남아 있지 못합니까? 당신은 썩은 새끼줄 같은 세상만 붙들고 있습니까? 복음 전도의 열망이 있습니까? 구원받은 감격이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망이 가슴속에 있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하고자 했을 때에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짧은 기간에도 수십명을 전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천국에서 영광된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부자로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부러워하고 격려하고 기도해 드려야 할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전도의 은사는 없을지 모르지만 전도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내가 영원한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분명하다고 하면 함께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전도의 은사 이전에 누구나 가져야 할 의무입니다. 

장애인들만 보면 가슴이 설레고,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한 사람들만 보면 그들을 돕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오르는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단히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설혹 그런 긍휼의 은사는 없다고 할지라도 장애인을 우리와 동일한 시민으로, 동일한 천국의 백성으로 도와주며 함께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질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제나 넉넉한 물질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물질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십의 일조, 십의 이조, 많은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물질의 은사가 없다고 할지라도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이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V. 가장 큰 상급은 전도의 면류관

성경에 보면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나옵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은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달란트가 남보다 많은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라도 그것을 활용하여 달란트를 남겨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전도의 은사가 없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해도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을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책망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주님 앞에서 책망받았던 한 종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당신의 가슴속에 복음 전도의 열정이 있습니까? 정말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까?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정말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의 아파트가 나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했는데 영어 성경에는 ‘거할 곳’을 맨션, Apartment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황금 집들이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에 보면 양떼를 잘 돌본 사람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과 마태복음 5장 11절 이하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할 때에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석으로 만든 면류관이 아닙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 바로 그들이 사도 바울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하며 복음을 많이 전했던 최권능 목사님을 아실 것입니다. 

한번은 술먹은 청년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최목사님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예수 천당! 예수 믿고 천당!”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술취한 청년은 웬 영감이 가로막고 있느냐면서 목사님을 두들겨 팼습니다. 면서기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젊은이를 혼찌검을 내서 쫓아 버렸습니다. 최 권능 목사님은 못마땅한 듯 일어나 면서기를 꽉 붙들더니, “당신이 내 면류관 하나 쫓아 보냈소.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 그를 교회로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할 수 없소. 당신이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하며 서기를 붙들고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발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을까요? 전도지를 들고 오늘은 이마을 내일은 저마을로 전도를 해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며 뛰어다닌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발이 퉁퉁 붙습니다. 발이 아파서 절뚝거리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사람, 복음을 위해서 아파해 본 사람이 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증거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고생을 해 본 사람, 고통을 나눠본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지를 들고 이 골목 저 골목 뛰어다닌 그 손이 복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은 폭염기간 중에서도 유난히 더웠습니다. 목요전도팀을 쉬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럴때 전도해야 상급이 크다. 이럴때 전도해야 진짜 전도인이다.” 싶어 전도대를 모았는데 80명이 나와 땀으로 목욕을 하며 전도했습니다. 참 근사한 일 아닙니까? 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할렐루야!

VI.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

18세기에 혜성같이 나타나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선구자가 된 전도자 죠지 휫필드를 아십니까? 휫필드는 예수에 미치고 복음에 미쳐서 30년동안 자기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초인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평균 50시간을 설교했다고 하니 설교를 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자살행위와도 같은 일입니다. 좀 쉬면서 사역할 것을 충고하는 사람들에게 습관처럼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녹슬어서 없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닳아서 없어질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 원했습니다. 

그분이 1770년 9월 29일 전도집회를 마치고 보스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엑스트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전도자 휫 필드가 그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웃 마을에서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촌장이 그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으로 가는 것보다 당신의 몸을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병원 침실로 가는 것이 더 급한 것 같소.” 그만큼 그는 지쳐있었고 환자나 다름 없는 병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휫 필드는 임시로 마련된 강단 밑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날 위해 죽으신 주님, 저도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비록 저는 몹시 지쳐있지만 이 사역이 너무나 좋습니다. 오늘 몰려온 저들에게 어떤 말씀을 증거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내 혀 끝에 마지막 힘이 남아 있는 한, 내 다리에, 내 손끝에 마지막 힘이 남아 있는 한, 저는 복음을 증거하겠습니다. 내 영혼이 다 닳아서 더 이상 쓸모없을 때에 주님이 저를 불러 가시옵소서.” 

기도를 마친 휫 필드 목사님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날 밤 설교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그날모인 성도들은 가슴이 뜨거워서 모래 바닥을 뒹굴었다고 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시도록 목사님을 깨웠을 때 이미 주님의 부름을 받아 천국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주의 모습입니까?

저는 신학교 시절 그분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마다 휫 필드의 말을 반복했습니다. “녹슬어서 없어지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게으름 피우다가 녹슬어서 없어지는 종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주의 사랑을 위하여 뛰고 또 뛰어서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 미쳐서 복음을 전하다가 내 힘이 다하는 날 마지막 복음의 불길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강단에서 쓰러져 주님품에 안기게 하옵소서. 성도들이 저의 설교를 듣고 복음의 불, 성령의 불, 은혜의 불을 가슴에 간직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열심히 나누어 주게 하옵소서. 저로 하여금 이 일을 위하여 닳아 없어지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저는 이 한 가지 소원 외에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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