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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부가 된 이삭 (창 2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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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가 된 이삭 (창 26:12-14)


온유한 사람 이삭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처럼 축복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삭이 농사를 지어 그 결실이 100배에 달했습니다. 농사는 이삭의 전공이 아닙니다. 이삭은 유목민입니다. 유목민으로서 그랄 땅에 가뭄을 피해 잠시 이주해왔습니다. 그런 풋내기가 농사에서 백 배의 수확을 거둔 것입니다. 벼 한가마를 심어 쌀 100가마를 얻은 것과 같습니다. 농사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중동지방의 농사에서 10배 정도의 수확이 나면 풍작이라고 합니다. 초보 농사꾼이 이런 결실을 얻은 것은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13절에서는 이삭이 얼마나 부요하게 되었는지 반복해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창대 왕성 거부라고 번역되었지만 이 히브리어 단어는 모두 ‘가달’입니다. NIV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The man became rich, and his wealth continued to grow until he became very wealthy.” ‘그는 부자가 되었고 그의 부가 계속 늘어나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돈이 돈을 굴리듯 계속 부가 쌓여 엄청난 부자가 된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룰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관리해야 될 종들도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블레셋 지역이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뜨내기 하나가 갑자기 유력한 부자가 되자 이삭을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부유하게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습니다. 올 때는 빈손으로 왔는데 갈 때는 은금으로 풍성케 하십니다. 이삭은 기근을 피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곳에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 중에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정이나 사업장 벽에 축복의 말씀으로 많이 걸어놓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을 책망하는 맥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나중에 빌닷은 하나님으로부터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이 그렇다 할지라도 미약하게 시작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기근을 맞아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가나한 나그네로 갔지만 올라올 때는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13:2)고 말씀합니다. 요셉도 내려갈 때는 애굽의 노예로 갔지만 그는 그곳에서 애굽 총리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삭은 흉년에 때에 내려갔지만 이곳에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흉년으로 시작했는데 심히 부요함과 번성함과 우물을 얻는 것으로 26장의 이야기는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나중을 풍성케 하시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작고 미약하지만 결국은 크고 강대하고 창성한 존재로 만드십니다. 인생이란 것은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날로 발전하고 커져 가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날로 왜소해지고 위축되어 가는 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나중이 더 좋기를 바랍니다. 나중이 더 창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삭이 이렇게 거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의 위인됨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고 야곱의 열두 지파상의 아버지입니다. 반면에 이삭을 우리는 흔히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좋은 의미로는 착한 사람이요, 부정적인 의미로는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이삭의 일생이 그렇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늘 아래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습니까? 젊은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서 모리아 제단에 바쳐졌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야 자기 믿음을 보였다 하지만 이삭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너무 강하거나 위대하면 아들이 힘이 듭니다. 늘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여 위축된 인생을 보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5절에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24절에서도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고 하여 아브라함의 그림자가 얼마나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받게도 되었지만, 하나님의 시선이 이삭을 볼 때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고 있으니, 역으로 이삭으로서는 부족한 자신의 모습 때문에 얼마나 위축되었겠습니까?

이삭은 결혼도 자신의 힘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짝 리브가를 먼 곳에서 구해서 맺어주었습니다. 리브가 또한 강한 여자입니다. 이삭의 뜻과는 반대로 독단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삭의 아들들 또한 드세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웠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서에게 축복을 주지 못하고 야곱의 속임수에 속아 야곱에게 축복을 하고 맙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삭이 네 번에 걸쳐서 우물을 파는 장면이 있습니다. 번번이 자신이 우물을 파 놓으면 이웃 부족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세 번을 이렇게 빼앗기고 네 번째 우물을 겨우 자기 소유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 것을 지키지도 못하는 온유한 사람, 곧 바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이삭이 거부가 되고 큰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 비결은 12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땅의 왕이었던 아비멜렉도 이를 인정합니다. 2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이 잘나서 거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농사에서 100배의 결실을 맺도록 만들어주셨고, 돈이 계속 쌓여 거부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부유함은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적절한 환경과 기회를 주시고 사람을 만나게 해주셔야 그가 큰 부자가 됩니다. 교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80년대 90년대까지는 교회가 개척하고 조금만 고생하면 대부분 성공을 했습니다. 그때는 교회도 희소했고 성도들이 어려운 곳에서도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IMF를 지나고 2000년대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교회수가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성도들도 이제는 예전처럼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목회자도 2000년대에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능력 탓이 아니라 환경 탓입니다. IMF 이전 세대는 대학 학점에 F가 있어도 좋은 기업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학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플이나 성적이 뛰어나도 변변한 기업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능력만 가지고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와 환경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것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운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또 우연하게 선택한 직업이 그야말로 큰 복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지난 번에 제가 백이 숙제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선비정신의 위대함을 잘 드러낸 사람들입니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고사리만 먹다가 나중에는 그 고사리마저 고사하고 굶어죽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백이 숙제 고사를 발굴해 낸 사람이 바로 사마천입니다. 사마천은 자신의 책 <사기열전>에 제일 첫 번째 장에 백이 숙제 고사를 인용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백이와 숙제의 절개를 칭찬하기 위해서 그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의도는 딴 데 있었습니다.

백이와 숙제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실 공자였습니다. 공자는 목숨을 내어 놓고 ‘인(仁)’을 구한 대명사로 그들을 예로 들었고 그래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이를 빗대어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갈 수 있는 것처럼 백이와 숙제는 공자의 칭찬을 받아 그 명성이 더욱 더 드러나게 되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인류사에는 백이와 숙제처럼 의로운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백이와 숙제는 유명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이름조차 기억을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백이와 숙제가 공자라는 위대한 인물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인물을 만나게 해줍니까? 바로 하늘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을 만났고, 또 안희정, 이광재 같은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기에 젊은 나이에 도지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운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렇다면 무명한 사람들은 버림을 받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1장 2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유명한 자로 부르시거나 무명한 자로 부르시거나, 남들이 보기에 큰 일을 하거나 아주 작은 일을 하며 살게 하시거나, 영웅의 시대를 살게 하시거나 아니면 평범한 시대를 살게 하시거나 다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다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감사하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행복하며 각자의 삶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요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자가 된 것은 여러분의 노력 때문에, 또는 여러분의 능력이 탁월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주변에 부자가 되려고 안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또 주변에 머리 좋은 사람 또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요하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라의 부요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나라인들 강성해지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느 나라인들 자기 백성들을 굶주리게 놓아두고 싶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잘사는 나라도 있고 못사는 나라도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65주년 되는 광복절입니다. 광복 65주년을 맞는 우리 민족은 이제 매우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와 분단과 가난을 넘어 이렇게 부요한 나라를 이루게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대한민국이 미국과 한 배를 탄 것이 은혜입니다. 6,70년대까지는 북한이 오히려 잘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에 붙었던 결과 그들은 이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수출중심의 성장 전략이 성공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남미 국가 등 다른 국가들도 노력을 하였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국민의 근면성과 창의성이 그런 결과를 이루기도 하였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않은 나라나 인생은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짐 콜린스라는 사람이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란 책을 썼습니다. 이 분이 한 때 위대한 기업이었다가 사라진 기업들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만심과 욕심’ 때문에 망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위대한 기업을 끝까지 유지하는 리더들의 자세를 그는 창문과 거울의 비유를 들어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 적합한 사람은 창문을 가리키고 자신이 아닌 다른 요소에 공을 돌린다. 성공에 기여한 동료를 칭찬하며 스스로 우쭐대지 않는다. 그러나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거울을 가리키며 말한다. ‘제 책임입니다.’” 

성공한 CEO들은 자신의 성공의 이유를 물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고 또 많은 경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라 말한다고 합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라는 말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정상에 잠깐 올랐다가 실패했던 사람들은 그 반대로 적용을 했다고 합니다. 잘 되었을 때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노력과 실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패했을 때는 창문을 통해 환경이나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겸손함으로 끝까지 창성한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겸손해야 합니다. 동남아나 중동이나 제3세계 민족들에게 겸손해야 합니다. 이 지역의 패권자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조선족과 저 북한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요즘 대한민국 정치나 외교를 보면 미국이라는 호랑이를 뒤에 두고 그 앞에서 위세를 떨고 있는 여우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것을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합니다. 그러다 뒤에 있던 호랑이가 갑자기 사라지면 여우는 큰 낭패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입니다. 지난 IMF 때도 그러했듯이 수출이 이상이 생기고 행여 전쟁이라도 나면 끝장이 나는 것이 우리의 경제입니다. 항상 삼가고 겸손해야 복을 받습니다.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동독에 대해서 겸손했고, 프랑스 등 주변 나라들에게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하고 그것이 더 큰 복을 가져다줍니다.

진정한 온유함이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여 인간이 전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좇아서 행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삭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바보 같고 숙맥 같은 사람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온유를 이렇게 설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온유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거인의 모습과 같습니다. 힘이 있지만 힘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에게 힘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기 위해서 힘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이삭이 복을 받은 까닭은 그가 하나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거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지켰습니다(창26:2-3). 그 결과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괜히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유혹의 순간에도 그 유혹을 단호히 뿌리쳤기 때문입니다. 세상 물질과 권력을 추구하는 데는 어리석은 자가 될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데는 어리석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19-20) 예쁜 짓을 하는 자녀에게는 하나님은 그들이 기도하지 않을지라도 큰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미운 짓만 골라하는 자식에게는 떼를 써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묵상하다는 것은 침묵하며 사색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읊조린다는 뜻이 더 정확합니다. 말씀을 되새기면서 그것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시1:3)한 축복을 받습니다.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던 분으로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 등장하는 치셤 신부를 들 수 있습니다. 프랜치스 치셤은 순수하면서도 고지식하며 늘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구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영민하고 사람들에게 호감이 있으며 권력의 길을 갔던 밀리라는 친구 사제가 있습니다. 치셤 신부는 그 고지식함 때문에 중국의 오지로 발령이 납니다. 치셤 신부는 그곳에서도 페스트 균이 우글거리는 현장에서 핏덩어리를 토해내는 아이들을 껴안고 사랑과 우정으로 그들을 돌보는 진실한 사랑과 희생적인 삶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전쟁 중 끌려가 다리를 다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36년 동안 사역을 하였지만 그가 이루어놓은 결과라는 것은 가톨릭 권력층에서 보기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얻은 교인 수나 성당의 규모가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셤 신부의 진가는 그의 마지막 부분에서 더욱 빛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치셤 신부를 진정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송을 합니다. 그동안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떠나기 전 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입니다. 이 사람은 대부호였지만 치셤 신부의 도움으로 아들이 병에서 살아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랜 동안 치셤 신부를 지켜보다 그가 떠나려는 시점에서 세례를 받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신부님, 언젠가 말씀드렸죠.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이제야 당신의 종교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이상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벌써 옛날 일입니다만 당신이 제 자식을 고쳐주셨을 무렵에는 저는 당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진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당신의 그 인내와 용기가 제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겁니다. 종교의 좋고 나쁨은 거기 몸 담은 자의 생활 태도를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지요. 신부님, 당신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저를 정복하셨습니다.”

이런 진실된 칭찬을 받고 이런 진실된 교인 하나를 얻는 것, 그것은 목회자에게 최상의 영광일 것입니다. 제목이 천국의 열쇠인데 치셤 신부는 순수하게 주님을 따르려는 모습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천국의 열쇠의 마지막 장면은 늙은 치셤 신부가 고향으로 돌아가 고아가 된 한 곱추 아이를 자기 손자로 삼고 그와 함께 연어 낚시를 하러 가는 장면입니다. 평화로운 마지막입니다. 

치셤 신부가 사제의 책임에 충실했다면 그의 친구 밀리 신부는 사제의 권력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가면 밀리 신부는 대사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창성한 사람이요 치셤 신부는 평범한 사제에 불과해 보입니다. 여전히 권력자 밀리에게 아쉬운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도 그럴까요? 누가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될까요? 치셤 신부의 다음과 같은 말들은 그의 깨달음의 수준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의 뼈는 썩어서 들판의 흙으로 변하겠지만 우리 영혼은 빠져나가 영광과 광명의 천상에 살리로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다” 그는 결코 자신의 삶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다. 연어를 잡으러 가며 하는 마지막 말은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해줍니다. “트위드사이드에서 제일가는 어부와 연어를 낚으러 가다니 넌 참 행복한 녀석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쁜 물고기를 만드시고 안드레아 우리에게 그걸 낚으라고 보내주셨단다.”

사람들 보기에는 온유하지만 온유한 사람들은 실은 강직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에 강직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복은 물질적으로 주어지는 복도 있겠지만, 평생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산다는 것,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진실된 인정을 받는다는 것,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후회하지 않고 만족한다는 것, 이것이 복이고 형통함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남긴 유산

이삭이 복을 받은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아버지 아브라함의 덕입니다. 26장 24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26:24)

복이란 것은 쌓여서 되는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그 아들과 나눈 편지를 모은 <유배지에서 온 편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정약용 선생은 3대째 의원집안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의원이라는 곳도 문화가 있고 나름대로 비방도 있습니다. 이것이 쌓여서 명문 의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교회 개척을 해서 빠른 시간에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부흥하셨네요?” 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정색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짧은 게 아닙니다. 저는 3대째 목회자 집안입니다. 저희 아버님은 개척 교회하시며 고생하셨고 금식기도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양육을 받았습니다. 교회 개척을 위해 오랜 세월 기도했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결코 빠른 게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다져지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5-26) 이삭이 받은 복은 아브라함이 쌓은 덕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고 덕을 쌓으십시오. 우리가 터를 잘 다져놓으면 우리 자녀나 우리 자녀의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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