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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눈에 기뻐하는 것 (겔 24: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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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에 기뻐하는 것 (겔 24:15-23)

 
에스겔서는 4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 24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고, 24 - 48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의 내용입니다. 에스겔 24장은 전반부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제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과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루살렘에 멸망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24장 1절입니다. “제 구 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제 구 년은 에스겔이 포로가 된 지 구 년째라는 말입니다. B. C. 598년에 포로가 되었으니까 구 년이라는 때는 B. C. 589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와 18개월 동안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B. C. 587년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에스겔 선지자는 24장에 두 가지 표징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녹슨 놋가마 속에 좋은 양고기를 뼈째로 넣어 다 태우라는 표징인데 물이 다 마를 때까지, 고기가 다 타버릴 때까지, 뼈도 녹아서 사라질 때까지 태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놋가마의 녹을 벗기기 위해서입니다. 놋가마는 예루살렘이고, 좋은 고기는 예루살렘의 거민들(지도자들)입니다. 녹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들의 죄를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바벨론이 공격해 오는 것을 녹슨 놋가마를 불로 때는 표징으로 말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에스겔의 사랑하는 아내를 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보통 장례식 때처럼 통곡할 수 없고, 사람들이 차려주는 장례 음식도 먹을 수도 없습니다. 다만, 슬픈 얼굴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에스겔 24장에 이르기까지 에스겔 선지자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부시라는 것과 25살 때 포로가 되어 30살 때에 그발 강가에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아 22년 동안 충성스럽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에스겔 24장에 와서 비로소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결혼했는지, 얼마 동안 결혼 생활을 했는지, 자녀가 있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스겔이 자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에스겔의 아내를 가리켜서 '네 눈에 기뻐하는 것(The delight of your eyes)'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은 자기 아내를 볼 때마다 방긋방긋 웃고, 기뻐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나의 아내를 볼 때에 기뻐하는 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은 아내를 볼 때마다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에스겔에게 갑자기 단장(斷腸)의 슬픔이 임했습니다. 눈에 기뻐하는 아내를 갑자기 잃게 된 것입니다. 단장의 슬픔이라는 것은 어미 원숭이가 새끼 원숭이를 잃었는데, 어미 원숭이가 슬퍼 울다가 죽었습니다. 그 원숭이를 해부해보니 너무 슬퍼 창자가 끊어졌습니다. 이 정도로 슬픈 것을 단장의 슬픔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이 단장의 슬픔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선지자에게 슬픔의 고통을 주시고, 에스겔은 이런 슬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선지자들이 겪는 가정적인 고통 

인간에게 가정만큼 안식과 평안을 주는 기관은 없습니다. 영어 속담에 ‘East, west, home's best!’(사방을 둘러봐도 집이 최고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정이 없다면 인간의 영혼은 방황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아갈 가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것입니까? 

가정은 사랑의 장소요, 평안과 휴식과 만족의 처소입니다. 자녀가 집을 뛰쳐나가는 것은 집에 가봐야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부부싸움만 하고, 평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서로서로 볼 때에 네 눈에 기뻐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가정의 행복조차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에스겔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장가도 가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평생 눈물만 흘리며 혼자 살았습니다.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독신으로 살며 눈물을 흘렸습니까? 유다 백성에게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와 환란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기쁨을 정지시킬 것이라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총각이 장가가는데 행실이 부도덕한 여인과 결혼하고 싶겠습니까? 
 
에스겔 보다 160년 전에 예언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행실이 부도덕한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신 것입니다. 호세아 1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고멜이 자식을 낳았는데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습니다. 호세아는 고멜과 못 살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고멜을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또 빠진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을 표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눈에 기뻐하는 아내를 잃으리라고 아침에 백성에게 예언하고, 저녁이 되니 아내가 죽었습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울지도 못합니다. 그러자 백성이 묻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므로” 에스겔이 답합니다. “내 아내는 네 눈에 보기에 기쁨이 되는 존재인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이 너희 눈에 보기에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아내를 하루아침에 빼앗아 갔듯이 네 눈에 기뻐하는 성전도 빼앗아 갈 것이다. 그래도 너희는 슬퍼할 수도 없고, 울 수도 없고, 음식도 못 먹을 것이고, 바라보며 탄식만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말하라고 하나님이 내 아내를 취하여 가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시고, 선지자의 가정을 희생시키셨습니까? 


Ⅱ. 선지자들의 가정적 행복을 박탈하신 이유 

첫째, 성도들의 행복과 죄는 관계가 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가 외쳐도, 에스겔이 상징적 행동을 보여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백성의 죄가 있어도 내 가정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음을 교정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와 내 가정의 행복과 평화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바른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시려고 이런 표징을 주신 것입니다. 국가적인 재앙이나, 사회적인 재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면 성도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라가 잘되기를 원하면 불신자들에게 잘하라고 하지 말고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해 수십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른 관계를 맺으면 행복이 오고, 번영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불행이 오고, 멸망이 오고, 포로 됨이 온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대표적인 장이 28장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잘 돼도 망하는 것이고, 안 돼도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사회든, 가정이든, 국가든 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성도들이 순종하면 행복이고, 불순종하면 불행입니다. 순종하는 만큼 행복하고, 불순종하는 만큼 불행하게 됩니다. 

말씀으로도 모자라서 하나님은 역사적인 실물교육으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에스겔 23장에서 남왕국을 여동생 오홀리바라고 했고, 북왕국을 언니 오홀라라고 했습니다. 오홀라가 오홀리바 보다 죄로 치면 덜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로 치면 덜한 북왕국에 대해서도 B. C. 721년에 앗수르를 동원하여 망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으면 멸망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가정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기업의 번영은 어떻게 기대합니까? 

남왕국 유다에 대해서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B. C. 605년, B. C. 698년에 걸쳐 두 번 침공했습니다. 이제 3차 침공이 오면 성전이 망하고, 예루살렘이 망한다고 해도 나와 내 가정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선지자의 가정을 치심으로 백성의 어리석음을 고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가정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놋가마를 못쓰게 하는 녹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 성도들에게는 현세적인, 육신적인 행복보다는 더 중요한 내세의 행복, 영적인 행복이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물론 현세와 내세가 행복하면 금상첨화입니다. 육신적인 행복과 영적인 행복이 충돌된다면 어떤 것을 희생해야 합니까? 

보통 사람들은 내세의 행복을 희생하고 현세의 복을 취합니다. 둘 다 행복하면 좋겠지만, 부딪힐 때에는 현세를 희생시키고, 내세의 행복을 취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현세는 짧고, 내세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현세가 실체요, 내세는 꿈이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현세가 꿈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하룻밤의 꿈입니다. 내세는 실체인 것입니다. 장가 못 간 예레미야는 천국 가면 영광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원치 않는 여인과 결혼했던 호세아는 천국 가면 하나님의 큰 상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갑자기 잃어버린 에스겔은 천국 가면 참 놀라운 상급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현세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를 희생하면, 하나님께서 내세에서 만 배로, 억 배로 갚아 주십니다. 현세에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은 내세에 가서도 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십니까? 희생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내세에서도 상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질문을 베드로가 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질문은 마태복음에서 했는데 답변은 마가복음에서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로 30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육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가정을 치심으로 하나님은 현세의 축복도 중요하지만, 내세의 축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충돌되면 현세의 축복을 희생시키고, 내세의 축복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작은 것 하나라도 희생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성도들은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수난 예언을 하시니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못 지게 말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변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성전이 파괴되고,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상 숭배를 제거하고, 성도를 정화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기뻐하고, 가정생활을 기뻐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일 보다는 하나님의 일이 훨씬 중요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다 좋으면 좋지만, 두 가지 충돌될 때에는 하나님의 일을 더 중요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내 일이 부딪히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Ⅲ. 우리 눈이 기뻐해야 할 궁극적인 존재 

하나님이 에스겔의 눈에 기뻐하는 아내를 취하는 것은 표징에 불과합니다. 그 실체는 유다 백성의 눈에 기뻐하는 성전을 하나님이 쳐서 망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눈에 기뻐하는 것을 헐어버리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솔로몬 성진이 파괴되었지만, 스룹바벨 성전을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 성전을 헤롯 대왕이 다시 개축했습니다. 

그런데 헤롯 대왕이 46년 동안 개축할 때에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어버리면 삼 일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21절은 에스겔 24장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참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시적이며, 물리적인 성전은 하나님이 죄가 있으면 헐어버리십니다. 참된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씀하는 것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그 눈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궁극적으로 기뻐할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입니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돈 많다고 자랑합니까? 공부 많이 했다고 자랑합니까? 이런 것 자랑해봐야 일시적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눈이 기뻐해야 할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기뻐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죄 사함을 얻었도다. 십자가로 영생을 얻었도다. 십자가를 통해 내 삶의 의미가 있게 되었고, 성령을 받게 되었도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도다.’ 33살의 청년의 나이에 최고의 수난과 최고의 희생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눈에 최고의 기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성도들의 행복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서 옵니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행복은 내세에 실현됩니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뻐하는 눈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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