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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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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마 5:8)


중국 대학이라고 하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만물에는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이 있나니 곧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이라 사람이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바로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
우리나라 말에 으뜸과 딸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자체에 중국 대학에서 말하는 근본과 지엽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근본이 되는 일을 으뜸으로 즉 먼저 하면 지엽은 자동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도 그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더하여 주시겠다는 모든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먼저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으뜸으로 구하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같은 세상적인 것들은 자동적으로 그에 더하여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근본에 관심이 없고 언제나 지엽에 관심이 많아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고 밤낮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만 욕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제 결혼 기념일입니다. 며칠 전 아내에게 결혼기념 선물을 하나 사줄까하고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 나갔습니다. 이것 저것을 둘러 보다가 소위 명품 가방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엄청나게 비쌀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비쌀 줄은 몰랐습니다. 아내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냥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명품 가방을 파는 매장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이도 젊어 보이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 백화점의 명품가방 판매점은 매장에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몇 사람씩만 입장하여 물건을 고르고 사게 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저는 그곳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백화점에 갈 때에는 내 기준과 상식보다 좀 비싸도 특별한 날이니까 왠만하면 한번 사보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나갔었는데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사려고 하는 그 가방의 가격이 제 기준과 상식을 훨씬 뛰어넘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가방 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가방 살 돈은 제게 충분했습니다. 그 돈으로 사고 싶은 것보다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방을 사는 것보다 보다 근본적이고 가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도저히 사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가 시작 되면서 바른교회 아카데미라는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주 큰 뜻을 가지고 나름 잘 준비하여 시작하였는데 고전을 금치 못했습니다. 교회와 교역자들의 관심을 끌지를 못했습니다. 동의를 얻지 못한 것은 아닌데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청중을 매혹시키는 설교’ ‘개척 교회 300명 돌파 세미나’ ‘교회 성장 세미나’와 같은 타이틀 걸면 목회자들이 수도 없이 모이는데 ‘바른 교회’라는 타이틀을 내거니 목회자들이 선뜻 모여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현상도 근본과 지엽을 구분하지 못하고 먼저 지엽적인 일부터 욕심내어 근본적인 것을 찾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바른 교회’에 관심을 갖고 욕심을 갖는다면 욕심내는 좋은 설교도 할 수 있게 되고, 욕심내는 교회의 부흥과 성장도 자연 따라 올 텐데 ‘바른 교회’에 동의를 하면서도 욕심을 내어 먼저 그일 부터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설교에 발전이 없고 교회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인데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바른교회 아카데미에는 바른교회 아카데미 연구원이 있는데 여러 신학대학 교수님들을 중심으로 연구도 하고 발표도 하는 모임입니다. 해마다 두 차례 정도 세미나를 갖는데 얼마 전 모였던 올해 세미나에도 40명 넘는 교수님들이 모여서 2박 3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신학대학 교수님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활발하게 연구하고 그것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고 노력하면 교회와 목회자들의 관심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제법 오랫동안 목회를 해 오면서, 평생 예수를 믿으며 살아오면서, 생각해보면 제법 만만치 않았던 가난에서 벗어나 제법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리면서, 열등의식이 많고 별로 탁월하고 뛰어나지 못해서 세상에 대하여 큰 기대와 욕심을 하지 않았는데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세상적인 성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것을 아직도 얻지 못했다면 아직도 그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욕심을 더 부릴는지 모르겠으나 감사하게도 본시부터 그에 대한 큰 욕심과 미련도 많지 않았던 터에 그것을 얻고 누리는 삶을 살다보니 그것이 주는 만족과 행복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욕심을 내는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실제로 느낄 수 있게 되어 저는 점점 다른 곳에 가서 줄을 서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조금씩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욕심이 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좀 더 지혜로웠으면 좋겠다. 좀 더 착해졌으면 좋겠다. 좀 더 정직해지고 반듯해졌으면 좋겠다. 좀 더 세상과 사람들을 잘 섬겼으면 좋겠다. 섬김의 능력이 커졌으면 좋겠다.’와 같은 것들입니다.

모든 실패의 뿌리는 어리석음입니다. 모든 성공의 뿌리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공의 뿌리가 되는 지혜에는 욕심이 없고 그냥 성공에만 욕심을 갖다보니 자연 어리석어지고 그 어리석음 때문에 밤낮 쓸데없는 일을 하고 헛 다리를 짚기 때문에 실패를 연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면 살아 볼 수록 지혜의 부족을 실감합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마치 제가 시각장애자가 된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실명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절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찬송 중에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송을 작사한 사람이 부럽습니다. 저도 하늘로 가는 제 삶의 길이 늘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늘 지혜로웠으면 좋겠습니다.

착하고 정직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감사하게도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있으면 있을 수록 제가 생각처럼 착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을 느낄때마다 속상하고 안타깝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제가 착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저는 따르고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저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저를 잘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 부분이 저에게서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제 요즘 주된 관심은 열매나눔재단의 사역입니다. 재단을 통하여 새터민들과 사회적 취약계층의 성공적인 자활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공장이 벌써 다섯 개가 되었습니다. 블리스 앤 블래스 커피숍까지 하면 사업장이 벌써 여섯 개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높은 뜻 푸른 교회 장로님 한분이 회갑 잔치를 재단에 속한 공장의 식구들을 초청하여 하셨습니다. 120명 정도의 식구들이 모였습니다.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세운 재단 그리고 그 재단이 세운 공장을 통하여 월급을 받고 생활을 한다는 것이 너무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딴 욕심은 없는데 좀 더 많은 공장과 일자리를 만들어 좀 더 많은 새터민들과 사회적 취약계층의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자립을 하고 자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저는 재벌기업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킨 창업자들과 총수들이 부럽습니다. 다른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고 저들이 수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성공적으로 창출해 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저들의 능력이 저는 참 많이 부럽습니다.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아면 저들보다 훨씬 더 정직하게 그리고 훨씬 더 착한 사람이 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 모든 소원과 욕심을 이룰 수 있는 그것도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길을 압니다. 그것은 코람데오 즉 언제나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만 있다면 내가 욕심내고 바라는 모든 것들을 정말 단번에 다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시 111: 10, 잠 1: 7) 내 눈이 늘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의식 중이든 무의식 중이든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면 내가 어떻게 어리석어 질 수 있겠습니까? 모든 어리석음을 하나님을 놓침에서부터 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코람데오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삶을 살수만 있다면 저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정확히 알아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캄캄한 이 세상 속에서 저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다고 간증하고 찬송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악은 어두움이고 의는 빛입니다. 방범(防犯)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불을 켜두는 것입니다. 범죄는 밝은 낯보다 어두운 밤에 많이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훤히 보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은 좀처럼 악한 일을 행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보는 앞에서도 사람들은 죄를 짓기 어려워지고 불편해지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악해지고 부정직해 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착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죄를 짓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눈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함으로 마치 하나님도 나를 보시지 못하시는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이 밝아져 내 눈에 늘 하나님이 보인다면 나는 정말 정직한 사람도 될 수 있고 착한 사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빌 4:13) 시편 기자도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19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비록 약하지만, 무능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전능자의 날개 아래 있으면 바울의 고백과 같이 못할 일이 없는 능력자가 됨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놓치면 우리는 순식간에 힘을 잃습니다. 능력을 잃습니다. 그러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눈을 하나님을 늘 바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힘과 능력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일들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능력을 갖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입니다. 모든 말씀이 다 정말 복이지만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특히 좋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보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 하나님이 보이는 것 그거 정말 복입니다. 저는 그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 복을 받으려면 마음이 쳥결해야만 한다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사심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심(私心)이 우리를 깨끗지 못하게 

합니다. 부족하지만 그 사심을 버리려고 나름 노력하였습니다. 사심을 버리는 제 구체적인 노력은 자리와 지갑입니다. 자리의 주인도 하나님이시고 지갑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다는 것이 제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목사가 금전출납부까지 써가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백화점에 갔다가 그냥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제게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척하여 인간적으로 성공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높은 뜻 숭의교회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까닭도 자리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심을 버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 목회와 삶과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받은 복도 많습니다. 그것에 대한 제 간증이 제 설교의 중심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부산 어느 교회의 전교인 수련회의 강사로 가서 그와 같은 내용을 열심히 설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자리와 지갑에 대한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하였는지를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 때문에 받은 하나님의 축복을 말씀하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무언가 마음이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나를 부인했다는 설교를 통하여 부각된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또 나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심을 버리려는 그 발버둥질 속에 또 사심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심이 있는 한 아무리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선포하여도,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여 지갑과 자리를 걸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큰 소리를 쳐도 내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은 아니 계시고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부정직하고 무능력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사심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이 눈과 마음에 보이는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정말 욕심내며 살고 싶은 삶의 근본인 지혜와 착함과 정직 그리고 온 세상을 축복하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복으로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이와 같은 복과 삶을 욕심내며 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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