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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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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롬 8:31-39)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베나레스의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니들에게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태어남은 고통이다.  늙음은 고통이다.  병듦은 고통이다.  죽음은 고통이다.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근심, 걱정, 슬픔, 괴로움인 것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고통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은 고해라는 겁니다.  좀 더 말하자면 인생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요, 문제라는 겁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습니다.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문제가 풀리는가 싶더니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인생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내가 되라고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나, 그것을 불교적인 용어에서는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이후로 지금까지 열반에 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반에 들어가고자 극기의 수행생활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열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석가모니 이래로 최고의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성철 스님을 보십시오.  그는 성불하고자 한때 8년간 드러눕지 않고 정자세로 앉아서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했습니다.  10년간 사람의 근접을 막기 위해 암자 주위에 철망을 쳐놓고 홀로 용맹정진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불자들은 그를 가리켜서 '우리 곁에 왔던 부처'라고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된다."

이것이 불교가 우리 인생들에게 던져주는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말하는 소위 열반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도의 경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은 그 자체가 고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도 인생은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고난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주를 믿을 때에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행복해 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의미가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힘들고 어렵게 보이지만 그 중에도 보람이 있고 소망이 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초인간적인 극기수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나와 내 가정이 구원을 받습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영원한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지의 창조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가 당하는 그 모든 일들에 나를 향한 당신의 선하신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실패와 이 고난과 이 어려움을 통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의 인생 마지막 날에 우리를 하나님의 품에 안아주시고 참된 평안과 쉼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처럼 극단적인 수행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이후로 열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이후로 천국에 간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후에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반드시 저 영원한 천국에 갈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화려하고 무궁한 곳 저 좋은 천당
천하 사람 다 못 가도 우리는 가서
우리 주님 천만성도 같이 앉아서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나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나이가 얼마이든,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이든, 우리가 가진 지식이 무엇이든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이 괴로움이 있을 때 부모님을 찾아가면 다 편안해집니다.  오늘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다 내려놓으십시오.  내 안에서 편히 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세상이 주지 않는 하나님의 평강과 평화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음성은 이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고 하면 누가 나를 대적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나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내가 겁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 이 땅에는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족 중에 누군가가 무서운 질병에 걸렸다거나, 친구 중에 누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다거나, 아니면 재수 없게 자신이 그런 질병에 걸렸다고 했을 때에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삶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유로움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 재물이 많아질수록,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수록, 내 삶의 경륜이 커질수록 더 큰 자유, 더 높은 자유가 없습니다.  커지면 커질수록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순한 마음의 선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느끼게 되는 행복도 불행도 사실은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보따리는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힘들고 어려운 현실 앞에서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다 정신적인 것입니다.  마음적인 것입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온 믿음의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 현실에 대한 속상한 일들, 사람에 대한 섭섭함들, 병마에 대한 두려움들을 다 접으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에 평안이 충만하기를 기도하십시오.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을 보면 결국에는 마음의 태도가 차이점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삶을 사는 저의 관찰, 저의 깨달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인생에서 그토록 적은 것에 안주하는 것은 그저 마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단순한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의 생각만 바꾸면 천국입니다.  지옥과 천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 형편없는 내 현실을 다시 볼 수 있는 내 마음의 능력만 회복하면 변화는 즉각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변화는 천천히 오지만 내 마음의 변화는 즉각 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그 심령에 변화가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불행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만 자신의 마음의 생각을 바꿀 용기를 상실한 사람, 이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 그 주머니에 지금 단돈 2천원이 없는 사람, 밖에 나가서 아이들과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바라보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로 불행하고 힘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용기까지 상실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제일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성령의 능력을 붙들고 마음을 변화시키십시오.  살며 사랑하며 인생에 삶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왜 마음을 그렇게 어둡게 사십니까?  왜 마음을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십니까?

가만히 보면,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세상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서 조종하려고 하는 어리석음과 욕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잣대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하는 어리석은 반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심각한 일이 생겼을 때에 자신의 접근방법이나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을 보면 내가 어떤 일에 대응하는 대응방식이 건강한 대응이나 건강한 반응을 생각하지 않고 늘 병든 반응, 비판적인 반응, 언제나 복잡한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똥고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다 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동차가 일년에 한 번씩 국가에서 검진을 받으라고 하면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병원에서 건강의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을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영혼의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정신의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지성인들의 불행은 자신은 정신의 검진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기갈로 가득 차 있습니다.  편협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최고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방식과 반응만이 지고의 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오만함과 교만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이런 불행으로부터 자유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내 마음의 선택에 대한 눈을 뜨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만 들어가면, 성령의 은혜만 역사하면 우리의 마음밭은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지어다!  그 믿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을지어다!

오늘 읽은 본문의 조금 앞 절인 2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통 중에도 하나님 안에서 내 인생에 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선이 무엇입니까?  물론 고난이 떠나고 내 환경이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믿는 것도 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물질적인 욕구와 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도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절에 이어지는 29절에 보면 그 선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는 것"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평안이든 고통이든 내가 만난 모든 일들을 통하여 내 인격이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비전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입니다.  내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내 인격이, 내 언어가, 내 삶이, 내 태도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죄인된 나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선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전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조차 전혀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예수님의 형상을 본 받아 내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비전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현실은 때로 위기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믿음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도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로마서 8장이 말씀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 운명이겠거니 하고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이 절망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맡기고 살면 안됩니다.  고난의 현실에 빠져서 하나님의 승리를 보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의,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면, 아니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시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 본문은 그 대답을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우리에게는 대적자가 없습니다.

본문 31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어느 꼬마 아이가 주일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엄마가 오늘은 뭘 배웠는지를 물었습니다.  "오늘은 모세가 적들을 어떻게 이겼는지 배웠어요.  홍해에 도착하자 모세는 다리를 건설해서 사람들을 모두 건너게 했대요.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건너자 그는 무전기로 본부에 연락을 해서 폭격기 지원 요청을 했지요.  폭격기는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리를 부쉈고, 애굽 군인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대요."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가,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얘기하셨니?"
"사실은 아니에요.  하지만 선생님이 얘기하신 대로 말하면 엄마는 못 믿을 걸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 뒤에 떡 버티고 계시는데 감히 어느 누가 우리와 싸우려고 할 것입니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당하는 이 세상의 문제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다 지나갑니다.  한 순간의 실패 때문에 영원히 실패한 사람처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가슴 아픈 일들 때문에 낙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낙망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일어날 힘조차 없는 그 마지막 순간에라도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절대적으로 붙드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본문 3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놓였습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하여 소망 없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모른다고 그냥 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서 수많은 멸시와 고난을 받으시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영생의 자녀로 삼으시고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렇습니다.  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맞바꿀 만큼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게 만들고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애절하게 부르짖는 외아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시고 그분은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는데 무엇이 인색하겠습니까?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에 대해서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모든 것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보호하십니다.  당신을 위로하십니다.  당신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당신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본문 3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소중한 내 아들이라고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나를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고발을 당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고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고발할 것입니다.  그 죄로 인해 죄의 통제를 받게 되고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죄의 법칙 아래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고발을 당해서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이제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셔서 피 흘려 죽게 하시고, 보혈의 능력으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제 죄는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히 죄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망의 능력이 있습니다.  나를 고발할 능력이 있습니다.  나를 죽이고 괴롭힐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밤잠을 자지 못하게 합니다.  우울증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남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도록 만듭니다.  용서하지 못하도록 내 가슴속에 한을 품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져야될 인생의 짊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될 모든 고통과 죄악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직도 죄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나를 고발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죄는 여러분에게 이미 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여러분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주의 능력만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만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만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후원자가 되신다면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본문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습니다.  핍박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과 기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위험한 일을 당해도 끊을 수 없습니다.  칼과 총과 원자폭탄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본문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고, 39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에서 아무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그 어느 누구도 끊을 자가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갖은 중상모략으로 고발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수많은 유혹들과 장애물을 만들어놓고 방해를 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습니다.  그가 태어날 모든 여관을 채워버리고 말았습니다.  헤롯을 동원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동원해서 십자가를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가롯 유다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영원한 승리는 자기 것이라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권세를 부셔뜨렸습니다.  그분은 무덤에 갇혀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승천하셨습니다.  무덤이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승리한 분이십니다.  영원히 승리하신 그분이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내 인생의 후원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후원자라고 할 때 그것은 그냥 이름만 후원자가 아닙니다.  후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언제나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본문 37절에서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 3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서는 이기고, 저기서는 패배하고가 아닙니다.  어떨 때는 패배하고, 어떨 때는 승리한다가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느니라.  때로는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찢겨진 상처를 끌어안고 몸부림 칠 때가 있습니다.  병고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으로 처절한 상황 속에 짓밟힐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우리를 지옥으로 몰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 몰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 앞에 그렇게 무너지지 마십시오.  시험 앞에 그렇게 타협하려고 하지 말고, 시험 앞에 겁내지 마십시오.  그 시험을 통과할 때에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의 후원자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강하게 붙들고 가십시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한 남편과 한 아내에게 바로 하려고 해도 정절을 지키고, 지조를 지키고,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사람, 하나님을 내 인생의 후원자로 얻으려는 사람은 믿음의 정절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절개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믿고 구경 삼아 왔다갔다해서야 하나님을 나의 후원자로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신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에게는 고민과 분별력이 많습니다.  오늘날 과연 누가 하나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요셉이니 아브라함이니 모세니 다니엘이니 하는 수많은 사람들,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엄청난 삶의 자취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 안에는 누가 하나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오늘 이 시대에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이 민족의 지도자들은 지금 누가 하나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후원하시는 사람은 결코 쉽게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원하시는 일은 결코 쉽게 실패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후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불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급한 판단을 뒤로 하고 다시 하나님을 신뢰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헌신의 대열에 한 번 강하게 앞장을 서 보십시오.  지식적인 욕망, 육신적인 욕망, 권력적인 욕망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욕망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대열에 한번 앞장서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영원히 기억될 전설들을 이 제단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만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목사인 저는 이 집에 모인 여러분들이 내 인생의 후원자는 하나님이었다, 내 가족의 후원자도 하나님이었다,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도 오늘 하나님을 붙들었기에 나는 비굴하지 않고 이 후원의 힘을 붙들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그런 많은 간증들이 계속해서 나오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헌신할 수 있기에 위대합니다.  인생은 헌신을 위한 눈을 뜰 때에 위대해집니다.  위대하게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위대한 헌신의 대열에 서면 그때부터 그 생명과 그 사람은 위대해 집니다.  우리 모두는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온 몸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뜨겁게 헌신해 보십시오.  이 헌신의 감격, 이 헌신의 기쁨, 이 헌신의 능력 앞에 세상은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어떤 난관과 역경 앞에서도 하나님의 후원을 믿고 세상과 맞서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내 인생의 후원자로 삼는 사람, 하나님을 내 가정의 후원자로 삼는 가정, 그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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