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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세에서 내세로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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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에서 내세로 (눅 16:19-31)


어느 목사님이 바둑을 참 좋아하셨답니다. 장로님께서 주일 대표기도를 하셨는데 길게 하셨답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께서 눈을 감고 바둑을 두신 것입니다. 회중석에 앉아 계시는 성도님의 머리에 한 돌 한 돌 두신 것입니다. 상대의 수를 헤아리며 한 참 두고 있는데 장로님께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큰 소리로 “아멘” 대신에 “아다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바둑 잘 두는 사람은 미리 상대방의 수를 읽고 바둑을 둡니다. 고수일수록 “세 수 네 수 다섯 수” 상대방의 수를 많이 읽고 두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사는 지혜로운 사람도 미리 인생의 앞날을 읽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혜로운 임산부는 아이와 함께 살 것을 미리 내다보고 모든 준비를 합니다. 지혜로운 신부는 결혼 후의 삶을 미리 내다보고 준비합니다. 지혜로운 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살아갈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합니다. 지혜로운 신앙인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음의 관문을 통과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웰빙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웰빙(Well-Being)의 마무리는 웰다잉(Well-Dying)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합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의식 속에서 제외하려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일생 동안 생존을 위해 싸우지만 우리 모두는 항상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겪는 필연적 과정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릴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멸절되거나 소멸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내세가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신론 자들은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의 관념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라고 합니다. 유신론적 입장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드느냐고 말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영혼 멸절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직전의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사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철학에 나오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지옥과 천당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있다 없다 시비에 앞서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없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오늘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유에는 이야기체, 예화체, 실화체의 비유가 있는데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실화체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예수님이 천상에서 일어난 실화를 소개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할 때는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소개하는데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할 때는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 비유는 ‘나사로라’는 실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천국과 지옥은 동화의 세계, 종교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하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지옥이라는 말이 22번 나오는데 예수님이 14번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확실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지옥과 천국은 분명한 실존 세계입니다.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관문을 통과한 후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해 주신 말씀의 주제가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은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는 장소이지만 지옥, 음부, 하데스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지옥은 단 한 방울의 물의 자비도 끊어진 장소입니다. 지옥은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장소입니다. 희망이 없는 장소입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대문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여, 모든 소망을 버릴지어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토마스 부룩스는 “만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과 슬픔, 비참함과 불행을 한꺼번에 당한다 해도 그것은 지옥의 가장 가벼운 고통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옥은 끔찍한 곳입니다. 영원한 불 못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옥은 끔찍한 곳이니 현세에서 어떤 대가를 치루어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내세가 확실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아 있는 시간을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현세에서 구원 얻을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19-23)

이 땅을 살면서 가장 잃지 말아야 할 기회는 구원 얻을 기회입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지옥에 가면 안 됩니다. 이 부자처럼 불꽃가운데 고민하는 지옥에 가서는 아니 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즐긴다하여도 구원의 기회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부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이 부자는 이 땅에서는 얻을 것을 다 얻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건강합니다. 호화로운 집이 있습니다. 좋은 옷이 있습니다. 날마다 같이 잔치하며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내세에서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미 끝이 난 것입니다. 오늘 이 부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자격만으로도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천국 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아니냐가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무엇이라고 울부짖고 있습니까? 

24절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얘’라고 합니다. 얘는 "테크논"으로 “아들아”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진정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말씀의 들어보십시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9)"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줍니까? 

요1:9절 이하를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나사로는 어떻습니까? 나사로의 어떤 공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나라로의 이름이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그 뜻으로 나사로가 어떻게 천국 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순전히 은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은혜의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은혜의 단비를 맞지 않습니다. 권력의 우산을 씁니다. 물질의 우산을 씁니다. 쾌락의 우산을 씁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건강이, 명예가, 부가, 인기가 주님 만나는 거침돌이 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가난, 질병, 고통이 주님 만날 기회가 된다면 오히려 그것이 복입니다. 은혜받을 때 은혜를 받고 진정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님 자녀라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자녀라고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교회에 발만 들여 놓았다고 천국 가는 것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이 전도하니까 "목사님! 저는 교회에 나기지 않아도 장인어른 빽으로 천국에 갈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의 말이 하도 엉뚱해서 물었답니다. "아니, 장인어른이 누구시길래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는 내 아내가 매일 집에서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라고 기도를 하니 저는 장인어른 빽으로 천국에 갈 수가 있지요......"

예수님을 구조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벼슬로도, 지위로도 선행으로도 못가는 나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양팔을 벌리고 품으로 부르실 때에 그 품안으로 달려 들어 가야 합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생명수 강이 곁으로 흐를 때에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기회가 끝날 때가 옵니다. 그 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주님께 나와 참 쉼과 안식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문밖에 두드리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어떻게 구원받았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근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가고 부자기 때문에 지옥 간 것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인데 예수 믿고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국회의원 이상인데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부자였습니다. 

나사로는 그의 이름에서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처럼 건강도, 부도, 명예도 없다하여도 이것만큼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현세에서 가장 큰 낭패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현세에서 상급 받을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24-26)

이 땅에 주어진 모든 것은 천국에서 상급 받을 기회입니다. 이것 놓치면 안 됩니다. 말썽 부리는 자녀가 상급 받을 기회일 수 있습니다. 병든 부모, 부담스러운 가족, 내가 맡은 구역식구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근무하는 직장이, 내가 섬기는 교회가, 목회자가, 헐벗고 굶주린 우리 이웃이 우리가 천국 가서 상급받을 기회입니다. 부자는 이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좋은 기회를 무관심으로 잃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외식하였습니다. 진실성이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도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형식주의 자들입니다. 부자는 나사로를 어떻게 대합니까? 쫓아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치료해주고 보살펴 주지도 않습니다. 

20절 보십시오. 대문 앞에 있게 합니다. 부르러기라도 먹게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새 옷을 입혀 줄 수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 무관심했습니다. 이 무관심은 상대를 소극적으로 멸시하는 일입니다. 

약4:17의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니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자기 과시용으로 이용했습니다. 쫓아 내지 않고 대문에 놓아두고 부스러기를 주는 위선적 구제로 자신의 선행을 선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14절 보십시오. 돈만 좋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진리를 비웃는 사람입니다. 진지한 삶을 비웃은 사람입니다. 내세를 비웃는 사람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다는 것입니다.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칭찬듣기를 좋아합니다. 명예를 좋아합니다. 지옥에 가서도 착각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권력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줄 아는 것입니다. 물 한 방울 찍어 자신의 타는 목마름을 축여 달라고 합니다. 살았을 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사람이 죽어 나사로를 통한 자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끝났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불꽃 가운데 괴로워 할 뿐입니다. 지옥과 천국의 실제성을 믿지 안하는 것입니다. 진실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의 마음속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잔치에 참여할 만한 자격 있는 친구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저 쌓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자기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병들고 굶주린 나사로는 그에게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순간적이 현세적 쾌락에 사로잡혔습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못된 짓을 다 하고 다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님이 두 분 다 장로님이신 부부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사장이고 아내도 작은 기업을 하였답니다. 집안 식구들이 기독교인이까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고 적당히 신앙 생활하였답니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죽고 다음에 남편에 죽었답니다. 신앙적 삶의 볼 품 없었지만 예수는 믿어 천국에 갔답니다. 천국에 도착하자 베드로가 물었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왔답니다. 

"자네는 외도를 하고 마누라를 속인 적 있는가 ? " 
"저는 단 한 번도 마누라에게 부끄러운 짓 안했답니다." 
"아주 모범생이였군..." 

베드로가 최 고급 승용차를 내 주었답니다. 두 번째 사람에게 물어 보니까 
“전 딱 한번 뿐입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중형차를 내어 주었답니다. 자신에게 물었답니다. 
"자네는 외도를 하고 마누라를 속인 적 있는가 ? " 거짓말 할 수 없어 
"일생동안 딱 두 번 밖에 없었습니다요 ." 
"그런 대로 괜찮군..." 천국에서 타고 다닐 소형차 한 대를 주었답니다. 천국의 교차로에서 빨간 불이 들어와 차들이 섰는데 마침 소형차, 고급차, 중형차가 나란히 멈췄는데 소형차 타고 있는 사람이 엉엉 울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선생은 왜 울십니까 ? "라고 물으니 
"억울해서 그래요, 방금 지나 오다가 마누라를 만났는데 자전거를 타고 있지 뭡니까....? " 

천국과 지옥은 실존적 세계입니다. 순간적인 쾌락을 주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장기적으로 해가 되는 것입니다. 마약 순간적이 쾌락 줄 수 있습니다. 담배 순간적인 쾌락을 줄 수 있습니다. 탈선이 순간적 쾌락을 줄 수 있습니다. 불륜이 순간적 쾌락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간 지나면 자신의 몸을 해치고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영원한 것에 인생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 좋은 조건이 주어졌는데 그것으로 자신만 위해 살다가 결국 지옥의 형벌을 받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자에게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그것을 상급받을 기회로 활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나사로는 누구일까요? 예수님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러나 영영한 불에 들어간 사람들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처럼 주변의 나사로를 보살펴야 합니다. 내 주변에 있는 나사로가 누구입니까? 내 주변에 있는 소자가 누구입니까? 

옛날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이랍니다.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던 한 처녀가 농약 먹고 자살 했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는 미쳐서 희죽거리며 다니고. 본 교회에서는 자살한 것은 죄요, 지옥 간 것이니 장례지내 줄 수 없다고 해서 시체는 버려진 채 썩어갔답니다. 이웃 교회 목사님이 청년들 데리고 가서 시신을 묶어 관도 없이 산에 올려다 묻어주었답니다. 몇 번 땅에 뒹굴리다 묶은 끈이 느슨하게 풀려지면서 처녀의 품에서 성경 한권과 예수님 사진이 나왔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나가게 된 그 처녀의 교회당 안에서 특별찬양 연습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답니다. 

이 땅에서 건강 주어졌을 때, 물질 주어졌을 때, 명예 주어졌을 때, 조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상급받을 기회롤 사용해야 합니다. 때가 항상 있는 것 아닙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가슴치고 후회해도 쓸 데 없습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죽을 때까지 가슴 쳐 울어 봐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가 있고 사업할 때가 있고 기도할 때가 있고 봉사할 때가 있고 건강을 보전할 때가 있고 예배드릴 때가 있습니다. 

공부하고 싶어도 공부할 수 없는 때가 오고, 예배드리고 싶으나 예배드릴 수 없을 때가 오고, 사업하고 싶으나 사업하지 못하는 때가 옵니다. 직장 다니고 싶으나 직장 다닐 수 없는 때도 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너무 늦은 때가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싶어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처럼 돈돈돈 하지 마십시오. 그 돈도 아무 쓸데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억만금이 있다 해도 한갓 돌에 불과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학식, 나에게 주어진 건강, 나에게 주어진 부, 나에게 주어진 명예, 나에게 주어진 입술 들고 갈려고 하지 말고 나사로를 위해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상급이 하늘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갈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나사로를 위해 사용하면 천국 온라인으로 입금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현세에서 전도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27-31) 

부자는 지옥에 가보니 기가 막힙니다. 아직 죽지 않은 다섯 형제들을 생각하니 딱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부탁일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준 기회는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29, 31절을 보십시오. 죽은 사람이 살아 나 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표적이 없어서 천국과 지옥의 실제성을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으려고 마음먹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애굽의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만나의 기적, 반석에서 물이 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믿는 않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표적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많은 표적을 행했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믿었습니까? 심지어 이적기사를 가장 많이 행한 가버나움이나 고라신 같은 동네의 사람들이 제일 믿지 않았습니다. 후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가버나움 사람들아 너희들에게 행한 이적기사를 차라리 소돔 고모라에서 내가 행했더라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곳에는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되지만 너의 임무는 아무리 안타까워도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말씀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놓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부모 자식 일간 친척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여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곳에서 성공하여 참 살기 좋으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가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습니까? 

천국이 미국 정도이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때가 오기 전에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기회 주어졌을 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전도해 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 전도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2:32에서 모세는 범죄한 동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든지 아니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든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동족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바울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했습니다.

알튼 링크 레터는 미국의 천재입니다. 박사 학위 하나를 받는 것도 어려운데 그는 박사 학위가 열 개나 되었습니다. 박사 학위 열 개를 취득한 그는 미국 정부의 고문으로 세계 관광 명소인 디즈니랜드의 모든 설계를 계획한 분입니다. 성공자, 실력자가 된 그는 어릴 때부터 믿던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우쭐해 했습니다. 대통령도 그를 귀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성공한 사람으로 대해 주니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가 생명처럼 사랑하는 14세 된 딸이 가출하더니,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살게요.' 그런데 며칠 후에 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딸의 시체를 안고 그는 후회했습니다. '내가 교회만 나갔어도, 내 딸을 데리고 교회만 나갔어도 내 딸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더니, 내 생명 같은 내 딸이 이렇게 자살했구나. 내 인생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그는 충격을 받고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겸손해지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딸이 없어도 전보다 더 기쁘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 아들,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 주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무덤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단지 정거장입니다. 무덤 저편은 무덤 이편에서 결정됩니다. 무덤 저편에서는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땅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뱃속의 아기는 그것밖에 모릅니다. 세상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보면 새로운 세계가 있은 것을 깨닫습니다. 뱃속에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자전거도 타고 배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사과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는 새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똑같은 달걀이지만 무정란은 닭이 품으면 썩지만 유정란은 병아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현세에서 세 가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 얻을 기회, 상급 받을 기회, 생명을 구원할 전도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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