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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길을 행하더니 (민 10: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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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길을 행하더니 (민 10:11-11:3)
  

속담이나 금언 중에는 일견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도 유명한 금언이지만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실상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해당되는 상황이 각각 다를 뿐이며, 그런 까닭에 둘 다 옳은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과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는 말도 둘 다 진리입니다.
즉 무슨 일이든지 시작이 중요하지만, 또한 일단 시작했으면 도중하차하지 말고 반드시 끝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행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신자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면 부단히 성화의 길을 걸어가서 구원의 완성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도중에 낙심하고 배교한다면 아예 평생토록 교회 문턱에도 들어오지 않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 못한 형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라는 것이 매사에 만사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도착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했던 광야의 여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길을 행하여" 갔던 광야 행진을 상고해 봄으로써 우리 각자의 신앙행진을 완주해 낼 수 있는 요령을 함께 배우고 익히고자 합니다.

1. 신자의 길은 '천당이라는 목적지를 확실히 바라보는 자'만이 통과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 10장 11절과 12절에 "11제 이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매 12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행하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고 기록했으며, 이하 13절로부터 28절까지의 내용은 이들이 앞의 2장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셨던 그대로 각 지파별로 행진 대오를 맞추어서 진행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출발하는 곳은 "시내 광야"라고 했으며, 거기서 이제 가나안 땅을 향하여 본격적인 출발을 시작한 것이 "제 이년 이월 이십일"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 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이 시내 광야에서 11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을 받고 또 성막을 세우며 지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모든 영적 기본준비가 다 갖추어지게 되자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을 향하여 본격적인 진군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날들이 지난 후, 아마도 한 주일 남짓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데, 그 구름이 "바란 광야"에 머물게 되었고 그들의 행진 역시 거기서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3절 이하의 말씀이 그들이 바란 광야에 머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중에 12장 16절에 가보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사건이 있는 후에 당시의 여정을 정확하게 기록하면서 "그 후에 백성이 하세롯에서 진행하여 바란 광야에 진을 치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러므로 이 11절과 12절의 말씀은 10장 13절로부터 11장과 12장에 기록된 전체 여정을 한 번에 모아서 개괄적으로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 바란 광야는 바로 시내 광야와 가나안 사이에 있는 가장 큰 광야였습니다.
시내 광야에서는 그래도 십계명도 받고 성막도 짓고 하는 등 특별한 은혜와 보람이 있었으며, 또한 가나안 땅에 가까워졌을 즈음에는 비록 전쟁이 연이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 진짜로 축복의 땅을 한발 두발 밟고 들어가는 때였으니 다들 신이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내 광야와 가나안 복지 사이에는 통과하기에 가장 오래 걸리고 또한 가장 메마른 지역이었던 바란 광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길이라 해서 평탄대로는 결코 아니었으며 온갖 시험과 위험의 요소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11개월 동안 평안하게 잘 살던 시내산을 떠나 그런 광야로 일부러 발길을 내디뎠습니까?
그것은 그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오직 '가나안 복지'라는 그 한 목표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험한 광야행군을 아무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자들이 일단 예수를 믿고 나면 그 자리에서 즉시 천당으로 직행하도록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죄와 사망에서 '출애굽'하는 구원을 받고 성경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시내산'의 체험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천당에 이르기까지에는 성화의 중간 과정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평탄하게 보장되어 있는 길은 아닙니다.
예수 믿었다고 해서 당장 내 인생이 육신적으로 확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는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한 고생이 있고, 여전히 부모 노릇, 남편과 아내 노릇을 해야 하는 고충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병마가 찾아오기도 하고 구직은 어렵고 사업이 잘 풀리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신자가 된 후에도 일견 예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인생길을 가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세와 분위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기독신자는 이제 자기 인생길 건너편에 있는 목표를 분명히 붙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광야생활 그 자체가 목표요 거기에서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가 모든 관건이었습니다.
그러니 정말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원래가 죄와 저주로만 가득 찬 인생이요 사망 길로 가는 삭막하고 살벌한 광야인데, 그 광야 안에서 먹을 음식을 찾고, 사는 재미를 찾으려 하고, 영원히 안주할 좋은 동네까지 찾으려 하니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목표를 향해서 계속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신자들은 광야 안에 그 목적지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인생길 건너편에 예비되어 있는 진짜 복지, 더 이상 광야생활에서 겪는 부족이나 결핍, 고생이나 아픔이 있을 수 없는 영원한 안식처를 최종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 광야를 통과하는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이런 천당 소망이 없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겠습니까?
  
그저 신유의 기적이나 물질 축복이나 자식 성공 따위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광야'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실로 어리석고도 피곤한 헛수고일 뿐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가나안'을 목표로 삼는 자만이 그 중간의 광야 길도 끝까지 힘찬 발걸음으로 통과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신앙생활에 때로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일수록 주님께서 날 위하여 예비해 주신 영원한 안식의 복지인 천당을 더욱 굳게 소망함으로써 항상 칠전팔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여로는 '교회중심으로 성도와 동행하는 자'만이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9절 이하 32절에 기록하기를 "29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진행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30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31모세가 가로되 청컨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32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호밥"은 "르우엘" 즉 '모세의 장인'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모세에게는 처남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으로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했는데, 호밥은 처음에는 거절하면서 자기 고향 친족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왜 그의 도움이 꼭 필요한지를 말하면서 재차 간청했습니다.
"우리의 눈"이 되어 주어야겠다고 한 것은 호밥과 같은 미디안 족속은 원래 가나안 주변의 광야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모세 역시 한때 그들과 함께 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미디안 족속들이 그 점에 있어서는 더 전문가였을 것이고 그래서 "어떻게 진칠 것" 즉 어떤 지형을 따라 행진하고 또 유숙해야 할지를 안내해 주는 "눈"이 되어 달라고 솔직히 부탁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호밥에게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호밥 역시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는 대가로 장차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같은 축복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불신자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아니었겠습니까?
당장 현금을 건네주는 것도 아니었고 무슨 계약서를 써 주는 것도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이 가는 길을 꼭 축복하실 터인데 그때가 되면 우리가 받게 되는 그대로 당신도 누리게 될 것이오."라는 말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호밥의 입장에서 그런 약속이란 자기 생활환경이 확실히 보장된 고향과 친족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희생에 비하면 사실 황당무계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호밥은 바로 그 모세의 권유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행군에 합류했습니다.
호밥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나중에 사사기 1장 16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의 자손'이 나중에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 유다 지파와 함께 살았다고 했으니 여기서 호밥이 모세의 요청을 수락하고 그의 가이드가 되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호밥은 원래 이방인이었지만 그처럼 이스라엘의 광야행군에 동참하기로 작정하고 그 신앙공동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인생을 살게 됨으로써 그야말로 자자손손에 이르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광야 길을 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해서 가려 한다면 정말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외롭기 짝이 없고 길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며 특히 위험한 지경을 당해도 아무 도와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신앙이 좋다 해도 아직도 앞에 남아 있는 멀고도 험한 길을 자기 혼자서 걸어가려 한다는 것은 도중에 쓰러져 죽기 십상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을 택자들은 교회에 모여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일단 예수 믿게 된 신자는 그 남은 인생의 여로를 반드시 교회중심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교제하고 교회의 선한 일들을 위해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는 가운데 함께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원수를 물리치면서 전진하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등산을 해도 청승맞게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이 가면 오가는 내내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며, 특히 암벽 등반은 혼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자일파트너가 있어서 서로 도와주면 훨씬 쉽고도 안전해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도 그 넓은 광야를 혼자 행진하고 야영을 하려 하면 정말 외롭고 두렵겠지만, 이처럼 많은 하나님의 권속들이 지파와 종족을 따라 함께 대오를 맞추고 진을 치면서 가게 되니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밖을 겉도는 사람은 결국 마귀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지만 철두철미하게 교회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혼자서는 결코 당해낼 수 없는 온갖 시험과 위기를 넉넉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처럼 교회생활을 즐기고 교회봉사에 열심을 내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복을 고스란히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보십시오.
이 경향교회를 중심으로 늘 기뻐하며 감사하는 성도, 특히 이 '세계를 받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 생애 최고와 전부를 바쳐 충성하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다들 그 생활에서도 축복이 쏟아지고 자녀들이 잘되지 않습니까?
교회의 중심으로 들어와서 핵심 멤버로 섬기기를 꺼려하는 교인은 그렇게 하면 '내 시간과 물질에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인 것입니다.
광야 길은 혼자서 가면 지루하면서도 죽을 위험만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공동체와 함께 동행할 때에는 모든 신앙생활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음을 깨닫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의 행진은 '원망의 함정을 순종으로써 피할 줄 아는 자'만이 완주할 수 있는 길입니다.

10장 33절로부터 11장 3절에 기록하기를 "33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34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1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2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시작되었습니다.
13절 이하 28절에 기록된 대로 각 지파별로 질서정연하게 행군을 했고 언약궤가 제일 앞장을 섰으며 또한 구름 기둥이 인도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언약궤가 출발할 때나 서게 될 때마다 축도를 하는 등 그야말로 은혜 충만한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광야 행군 내내 그렇게 언약궤의 인도를 받고 구름기둥 신호에 순종만 하면서 갔더라면 아무 문제없이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며칠도 넘기지 못했습니다.
떠난 지 겨우 삼일 만에 벌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여호와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그냥 '불평'이라고 번역해도 되는 단어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불평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서 그것은 아마도 기록할 필요조차 없이 사소한 불평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일년 가까이 시내산에서 잘 쉬다가 이제 광야 여행을 시작했으니 발도 아팠을 것이고 잠자리도 더 불편했을 것이며 물을 구하기도 더 어려워졌을 것입니다.
또 한 삼일 행군하고 나니 더 삭막한 광야가 눈앞에 펼쳐진 것을 보고 가슴이 답답하고 갈 길이 막막해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그런 상황에서라면 누구나 당연히 내뱉을 만한 불평들이라고 무심코 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은 언약궤와 구름 기둥으로 그 여정을 친히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실로 크나큰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셨습니다.
'진 끝'만 불사르신 것은 요다음에는 아예 '진 가운데' 불이 떨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암시의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넘겨버렸습니다.
그들은 원망의 버릇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를 끝내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도 무슨 일만 터지면 원망을 일삼다가 끝내는 진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대로, 어처구니없게도 그 사소한 일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버릇 때문에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비록 어려운 일들을 당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의 언약궤로, 성령의 구름기둥으로 섭리하시며 이끌고 계시는 가운데서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불평이나 원망은 결코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반복하고 있습니까?
조금만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금세 불평하고 약간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거의 반사적으로 불평하다가 결국 그것이 '원망의 버릇'이 되고 맙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까지 그런 불평과 원망을 하는 것을 아주 당연한 말로 생각하는 악습이 되는 것이며,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생활에 실로 무서운 함정을 스스로 파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교회에 등록했다가도 새소식반을 위해서 같이 봉사하자는 권유가 귀찮다고,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금세 불평에 빠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해서 얼마 안 되었는데 갑자기 집안에 사고가 터졌다.'라고 아예 대놓고 원망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3일도 채 못 가서 여호와 들으시기에 악한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내 생각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기까지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실로 악하기 짝이 없는 말과 생각이 혹시 나 자신에게도 고질적인 버릇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악습을 반드시 깨닫고 고쳐야 합니다.
  
내 입에 달린 작은 불평이 결국 천당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엄청난 비극의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평 대신에 회개를 하게 되고 원망이 나올 만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끝까지 순종할 줄 알게 될 때에 우리의 신앙여로는 훨씬 더 만족스럽고 감사만 넘치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입술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과 원망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의지하고 순종하는 지름길'만을 따라서 저 가나안을 향하여 더 빨리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의 신앙 행로 앞에는 아직 얼마나 걸어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광야 건너편에 있는 천당을 바라보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통과할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의 남은 길은 아직도 곳곳에 위험이 산재해 있는 미지의 여로입니다.
하지만 교회중심으로 서로를 도우며 함께 충성하면서 가면 매일 매순간마다 그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즐겁고 복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길은 겨우 한 삼일 걸었다고 불평과 원망부터 하는 자는 반드시 낙심하고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는 모든 시험을 넉넉히 이기고 각종 함정을 뛰어 넘으며 최단코스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면 이제 우리 앞에는 바로 '가나안 복지', 꿈에도 그리던 천국문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중지하지 않고 끝까지 도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끝내 정상에 자기 발로 서게 된 등산가와 목표를 겨우 100미터 남겨 두고 되돌아서게 되는 등산가의 차이란 '100미터'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아니겠습니까?
북한을 탈출한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의 오지를 방황하는 사람과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된 사람은 둘 다 '탈북자'이지만 그 기분은 그야말로 천양지차가 아니겠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은 그 동안의 모든 수고와 땀과 눈물이 환희와 보람과 감격으로 바뀌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 모든 고생이 더 큰 아픔으로 남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세상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명에 충성하면서 신앙의 행진을 끝까지 달려가서 끝내 천당에 도착하게 된 성도의 기분은 어떠하겠습니까?
반면에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인 생활까지 꽤 했으면서도 그만 도중하차했던 사람들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던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원통하게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며 실로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각자가 이미 진행하기 시작한 이 '자기 길'을 오직 '천당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교회중심으로 사는 발'로 행하며 매사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지키고 걸어감으로써, 저 건너편 가나안 복지까지 같이 달려가며 꼭 함께 도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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