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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 (마 1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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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 (마 14:13-21)


남자의 위상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살이 아닙니다. 또 새로운 일도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남자 위주의 사회였다가 이제 여자의 지위가 조금 높아지려고 하니까 남자가 엄살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십일 세기 변화의 대부분이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십일 세기 남자 위상의 변화도 장차 영구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고 남자 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사회적인, 또 심리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오늘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남편들이 나이가 들수록 초라해지고 아내들은 나이가 들수록 드세지는 현상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사내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여자 선생님 밑에서 배움으로 남성다움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학교의 수행평가 제도가 여자아이들에게 유리하게 돼 있어서 남성적인 성격, 남성적인 개성보다는 여성스러움을 더 칭찬하고 인정해 주는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TV같은 매체에서 여성스러운 꽃미남들이 새로운 남성미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남자들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원초적인 남성적인 속성을 버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남자가 여성스러워져야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찬양을 부를 때 여자아이들처럼 제스처라든가 느낌이라든가 이런 것이 여성적이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눈물을 많이 흘려야 되고 감정을 표현해야 되고 여자들이 더 접근하기 쉽고 적응하기 쉬운 그러한 기독교 문화와 기독교의 영성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차별이라는 비난을 받을까봐 무엇이 정말 남성적인 것이고 무엇이 정말로 여성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 아이덴티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남성상이 있는 것이고 여성에게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여성상이 있는 것이고 아무리 세월이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고로 기독교인 중에는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에 믿지 않는 아내에 대한 언급보다 믿지 않는 남편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초대교회 시대부터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경험을 봐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교회를 다니는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남자 한 명에 여자 두 명이에요. 이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통계만을 봐서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숫자뿐만이 아니고 신앙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 교회에 얼마나 참여하느냐, 신앙생활에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느냐,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여성의 참여도가 남성의 참여도보다 더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가 여자에게도 신부 서품을 주어야 되지 않느냐를 고려하는 것도 전혀 우연한 현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러하냐. 모든 종교가 여자들에게 더 유리한 면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대표적인 남성위주의 종교입니다. 이슬람에 여성의 참여는 우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외부에 보이는 이슬람 종교는 남자 위주요 남자 중심이요 남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 전혀 어려움을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우리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는 전형적인 남자의 속성을 가지고는 입문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형적인 남자의 속성. 제가 말씀드리는 전형적인 남자의 속성이란 폭력성 ․ 야성 ․ 욕망 ․ 야망 이런 것들입니다. 주로 남성 호르몬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남성호르몬을 테스토스테론이라고 하는데 이 호르몬의 영향으로 갖게 되는 속성들이 바로 폭력성 ․ 야성 ․ 욕망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남성호르몬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남자가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가지면 벌써 간음을 행했느니라’라는 말씀, 이건 충격적인 것입니다. 이 말씀 하나만 가지고 세상의 모든 평범한 남자는 이미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또한 남자 세계의 오랜 전통에 반하는 것입니다. 

남자 세계의 전통은 무사도 ․ 기사도 ․ 카우보이 정신, 누가 싸움을 걸어올 때 물러서지 않는 것, 힘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 힘으로 힘에 맞서는 것, 이것이 씩씩한 남자요 용감한 남자요 멋있는 남자요 강한 남자라는 전통이에요. 남자들은 강한 남자가 되기를 원하고 멋있는 남자가 되기를 원하고 보스가 되기를 원하고 리더가 되기를 원하는 정신이 있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비폭력과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것과 악을 악으로 이기지 않는 것, 이러한 정신을 실천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두 마디 말씀으로 남자들을 무장해제 시킨 것입니다. 이제 남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남성적인 것이냐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건 이십일 세기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이천년 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남성적인 것이고 멋있는 것이냐. 이걸 찾아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 문제를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적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자연의 섭리에서 어느 정도 힌트는 얻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나이와 경우에 따라서 변합니다. 그래서 사춘기가 되기 이전의 남자아이는 목소리도 여자아이 같고 몸매도 여자아이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변성기가 시작되고 몸에 근육이 생기기 시작하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사내아이가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호르몬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남자의 호르몬 수치도 늘 한결같은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결혼을 하고나면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현저하게 내려가고 남자가 자식을 얻으면 더 내려가고 나이가 들수록 남성 호르몬의 수치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남자의 속성도 늘 한결같은 것이 아니에요. 남자가 미혼일 때는 그야말로 야생마와 같지요. 그를 붙잡아 두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자식을 얻으면 가정적으로 변신합니다. 자식이 생기면 남자의 속성이 변합니다. 가정을 위하게 되고 자식과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덜 남성적인 사람이 된다는 얘기냐. 그건 아니지요. 그러니까 남성적인 속성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고 나이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됨은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 필요에 따라서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변화해야 된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마는 그러나 생물학자들이나 인류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본능적으로 행세하는 것만이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열아홉 살 소년이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칼라 깃을 세우고 스키니 진을 입으면 멋있어요. 그러나 오십세 중년 남자가 머리에 무스를 바르려고 하면 바를 머리도 별로 남아있지 않고 스키니 진을 입으면 맞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입으면 주책이라고 합니다. 중년 남자에게는 중년 남자다운 멋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모습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나이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경험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컨대 로마제국을 쳐들어온 야만족이 있었지요. 고스족 ․ 서고스족 ․ 훈족, 이런 야만족들이 로마제국에 쳐들어왔어요. 그들은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는 것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어요. 문자 그대로 야만족들이었어요. 훈족은 음식을 조리해 먹는 개념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날고기를 먹었고 유일하게 고기를 데워먹는 경우가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말 타는 남자가 추운 겨울에 날고기를 자기의 넓적다리와 안장 사이에 끼워서 데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유일하게 음식을 데워먹는 경우였습니다. 얼마나 야만적입니까. 

그런데 이들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후에 고향으로 돌아갈 때 무엇을 가지고 돌아갔는지 아십니까.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야만족들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면 야만족들의 그 야만스러운 모습들이 정말로 남성적인 것이냐. 그때가 좋았다는 얘기냐, 그때로 돌아가야 된다는 얘기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생존이 위험한 야만 시대였을 뿐입니다. 그때처럼 인생이 위험하고 짧고 비위생적이고 괴로운 시대는 없습니다. 어느 누가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그때가 인류 역사의 절정기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됨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변화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건 남자 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된다는 것, 멋있고 용감한 남자다운 남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이것은 사람이 배워야 되는 것이지 본능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무뚝뚝하고 자식들과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고 자식들과 별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감정 표현이 서툴렀어요. 수십 년 전 얘기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가 그랬다가는 밥도 못 얻어먹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식과 대화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거기에서 더 만족을 얻고 거기에 보람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 것입니다. 그걸 과거에는 몰랐기 때문에 안 한 것이지요. 남자가 변한 게 아니에요. 그걸 몰랐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거에는 먹고살기에 바빠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 보니까 그냥 먹고사는 것만으로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람이 더 잘살기 위해서는 가족 간에 대화가 필요하고 이해가 필요하고 또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것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변화하기를 원하지만 사람이 변화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변화함으로 가정과 국가와 세상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인간의 변화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하여 참된 인간됨, 참된 남성상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돼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인간상뿐만이 아니고 거기서 어떻게 참된 여성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남자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여성상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남성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첫째는 친구에 대한 의리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 당신의 양들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불의와 악의 권세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담대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불의 앞에서, 악 앞에서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고 악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마귀의 권세에 눌려 있는 자들을 예수님은 지나치지 않고 그들을 건져주시고 악의 권세를 내쫓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원수를 당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감화력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에도 백부장의 입에서 저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로다 라는 고백이 나오고 우편 강도가 예수님이 운명하기 전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자기의 영혼을 예수님께 의탁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을 핍박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자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를 당신의 편으로 이끄는 감화력, 능력, 예수님은 이것을 소유하셨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랑이요 사심이 없는 사랑이요 힘이 있는 사랑이요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데 그 사랑 속에 두려움이 섞여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거부하면 어떡할까,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면 어떡할까,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사심이 섞여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심이 없는 순수한 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변화를 받고 회개하고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고 인생이 변하는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폭력 앞에서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비폭력으로 십자가를 지셨어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참된 남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호르몬에 이끌려서 사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짐승도 호르몬에 이끌립니다. 남자가 호르몬대로 이끌려서 사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고 인격이 필요하지 않고 지혜가 필요하지 않고 상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다스릴 수 있고 감정을 다스리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힘과 인내와 인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잠언 16장 32절 말씀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장사가 되기를 원하는데 진짜 장사는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대장부라는 얘기에요. 예수님은 그러한 대장부의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호르몬에 이끌리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별 노력이 필요 없어요. 그것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고 그걸 남자의 참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원시시대는 그랬을 수 있었을지 몰라요. 그러나 원시인이 그렇다고 더 행복하고 더 발전하고 더 유복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예수님을 따르기가 어렵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그건 마귀의 거짓입니다. 남자라고 예수님을 따르기가 더 어려운 게 아니고 여자라고 예수님을 따르기가 더 쉬운 것도 아닙니다. 어렵다면 남자, 여자 둘 다 어려운 것이고 쉽다면 남자, 여자 둘 다 쉬운 것이지 여자라서 쉽고 남자라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마귀의 거짓이에요.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그들은 믿음을 좇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어요. 남자이기 때문에 어려워하지 않았어요. 여자이기 때문에 쉬워하지도 않았어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인데 여기 보면 여자와 아이 외에, 다시 말하면 남자만 오천 명이 먹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을 볼 때 이때는 남성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남자 숫자만 세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늘날 여자와 아이에 치여 사는 남자들에게 이 구절은 신선한 충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데 있어서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들에게 하나님이 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남자들을 기억하시고 남자들을 사랑하시고 남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그래서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만 오천 명이 기적을 경험한 사실이었습니다. 남자들에게 주시는 권세, 남자들에게 주시는 특권, 그리고 사명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남자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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