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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직하라 (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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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라 (마 1:1-16)


나가다 막히고 걸리면 힘들고 속상합니다. 답답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성경 구약을 읽다보면 항상 걸리는 곳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성막이 나오고 제사가 나오는데, 거기서 걸려 중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약에도 그런 부분이 있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 있는 족보 이야기입니다. 장황하게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쓸모없이 그냥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인생 모든 일들이 다 그렇습니다. 더구나 성경인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교인들과 같이 씁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하면 신약이라고 한계지어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정도인 신약 첫머리에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장황하도록 족보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몇 십 년 정도가 아니라 몇 천 년 동안인데 그런 유대인들에게는 큰 갈망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다른 민족들도 그러했지만 유대인들도 너무너무 가난하여 열심히 일해도 한 가족이 한 끼를 먹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질병도 많았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수많은 질병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치료약도 없었고, 치료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귀신 들린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병을 치료해주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희망은 단 하나,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가난에서 구제해주신다고 생각하고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메시야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 군사적인 지도자, 그런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런 메시야가 오셔서 자신들을 구제해주시기를 갈망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신약 성경 첫머리에 여러분들의 조상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 지금 여러분들도 그렇게 고대하고 있는 메시야는 바로 나사렛에서 나신 예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본문 16절에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이 소망하고 갈망하는 메시야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 중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 갈망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동화 중에 ‘큰 바위 얼굴’ 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저는 틈틈이 그 책을 읽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큰 바위 얼굴’ 앞에서 “저렇게 생긴 어른이 나타나시면 참된 평화가 올 것이다. 언젠가 그 분이 오실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아이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므로 유일한 스승은 큰 바위 얼굴입니다. 그는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년이 되어서도, 청년이 되어서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바위를 쳐다보면서 그 분이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은 언제 메시야가 오시나 그 메시야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런 갈망을 주는 성경구절은 여러 군데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중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말씀인데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49장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다에 대해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창49:8)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 여기서 규란 통치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유다의 자손 중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민수기 24장에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24: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 자손, 야곱의 자손 중에 그런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그런 분이 태어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여호와께서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네 집과 네 왕위가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견고하게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7:8~16).. 하나님 말씀이십니다.

이사야 9장 6절과 7절에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야가 나올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11장도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11:1~2)..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므로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야가 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족보를 나열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곳에서 예언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족보를 그렇게 나열하신 것입니다. 그 족보를 유심히 보면 40여 명의 조상의 이름들이 모두 누가 누구를 낳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다보면 여자 이름이 다섯 명 나옵니다. 그것은 모두 누구에게서 라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아내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40여명의 조상들은 전부다 아내가 있을 텐데 왜 그 중에 다섯 명의 이름만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우리는 아주 대단한 인물이었든지 아주 위대한 어머니였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과 전혀 반대입니다. 그 여인들의 면면을 보면 부끄러운 일들이 있었고, 수치스러운 일들이 있었고, 충분히 오해받기 십상인 인물들입니다. 이들만 골라서 이름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 면면들을 보겠습니다. 3절에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어떤 사람입니까? 유다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유다의 아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즉 유다의 손자를 낳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남아있는 며느리리가 다말인데, 다말이 나중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자식이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을 해서 낳은 아기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흠모하는 예수, 우리 구세주 예수는 이런 사람의 자손입니다. 

다음에는 5절에 라합이 나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라고 말씀하시는데 라합은 예수님의 조상 중 할머니 한 분입니다. 성경은 라합의 직업이 기생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성경은 수십억의 인구들이 보는 책입니다. 그 사람들이 볼 것을 뻔히 아시면서 왜 이런 일까지 구태여 썼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름만 보고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조상 중에 기생이 있었다고 내놓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의 조상 중에 이런 기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생은 매춘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수님의 조상 중에 이런 분이 계셨다고 성경은 들추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절에는 ‘보아스는 룻에게서’ 라고 룻의 이름이 나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잘 섬겼던 효부였는데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남편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재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어떻게 재혼했는가가 문제입니다. 보아스가 들판에서 벼 베기를 하다가 누워 자는데 그 남자가 자고 있는 동안 발밑으로 기어들어가서 그 이불 속에서 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룻은 그 남자와 결혼하고 거기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님의 조상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번째 6절 더한 내용입니다. 6절에는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아의 아내에게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바세바입니다. 이처럼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주 의도적으로 우리아의 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우리아는 다윗의 부하입니다.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전쟁하고 있을 때 우리아의 아내인 바세바는 아직 해도 지지 않아 다윗이 볼 수 있는 그런 시간에 왕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왕궁 바로 옆에서 옷을 벗고 온몸이 다 보이도록 목욕을 했습니다. 물론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든 간에 결과적으로 다윗이 그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유혹을 하였고, 그 여인과 동침해서 아이를 낳게 됩니다. 다윗은 그런 못된 짓을 하고도 그 사실을 숨기려고 바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에 우리아의 아내 바세바가 낳은 아이가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도 숨김없이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을 하지 않고, 제가 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조상이라는 것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16절에는 마리아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모마리아입니다. 특별히 캐돌릭에서는 대단한 중보자로 알고 추앙하는 분이 바로 성모인데 그 성모가 우리가 구세주로 모시는 예수를 어떤 경유를 통해서 낳았는가를 18절에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잘못 되어서 태어난 자식이 예수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심지어 그 당시 약혼자였던 요셉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절).. 잘못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파혼하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오해할만한 이야기까지도 왜 기록했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굳이 밝히지 않으면 얼마든지 가릴 수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는 정직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정직을 기반으로 해서 태어난 종교이고, 정직해야할 종교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늘 우리들에게 여러분들도 정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것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누리고 받을 것을 생각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강하게 말씀하시고 소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둔할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프라그마티즘’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실용주의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을 의도하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주 정직합니다.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옛날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기독교를 보십시오. 기독교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힘 있게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기독교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무언가 문제가 많은 기독교를 왜 자기의 종교로 가지는 것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신학을 한 저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논리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마치 픽션이지 않을 까 소설처럼 생각되는 부분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천년 동안 성경은 베스트셀러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서 그렇습니까? 읽을 책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보통 사람들을 비롯해서 또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세계의 석학이라는 사람까지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부끄러운 부분을 그대로 써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픽션이라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부끄러운 부분을 일부러 들춰서 이야기하고 있겠습니까? 여러분, 기독교는 본래 정직한 종교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네덜란드를 배낭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을 지날 때였습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그때는 제가 좀 짜서 돈을 잘 쓰지 못했습니다. 사실 별 세 개면 제일 싼 호텔인데 더 싼 호텔을 구하려니 하나도 없었습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면서 모자 하나와 배낭을 덮어쓰고 대여섯 시간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그 시골 길가에 늘어선 1층 주택가의 창에 커튼으로 가린 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창 너머로 보이는 정경은 차도 마시고 TV를 보면서 장난치는 한가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30분만 누워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것을 보지 않았으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입니다. 한참을 걷다 노숙자들이 사는 집을 찾아가 재워달라고 했더니 폐쇄해서 재워줄 수 없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암스테르담행 밤기차를 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암스테르담에서 겨우겨우 잘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때 보았던 그 시골집들이 커튼으로 가리지 않아 그 속을 속속들이 다 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본거지 중의 하나인데 제가 간 그 마을은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아주 잘 전해졌던 곳이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기독교 정신 그대로 하나도 감추지 않고 다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감추지 않고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포템키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상 이용적 기술 기만술’입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아주 빚 많은 사람이 사업을 하려고 할 때, 돈이 없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거래를 해주지 않으니 호화스럽게 집을 짓는 경우와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또 빚이 많고 돈이 없는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자기를 각인시켜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려고 하는 정직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무언가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자주 씁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사람들에게 나를 내세우고 잘 보이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 없이, 쓸데없이 큰 집을 가지려고 하고, 큰 차를 타려고 합니다. 

필요하다면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이 많습니다. 또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주어가 다 ‘내가’ 입니다. 정직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면 많이 힘듭니다. 성경 말씀그대로 정직하게 살면 좋은데 자꾸 가리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몇 겹으로 가리다 보면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파퓰리즘도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인기 영합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정말로 잘 보아야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더 경계해야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합리와 이성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표피적인 감성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흐름, 세상 사람들의 유행에 아주 민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더 합니다. 

타이타닉 조크에 영국 사람들은 당신이 신사라고 하면 바닷물에 뛰어 들어가고, 독일 사람들은 법이라고 하면 뛰어 들어가고,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한다고 하면 뛰어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점이 좀 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다고 하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고 그냥 따라가는 일들이 많은데 이런 파퓰리즘에 교회가 미혹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교회가 아닌 모습이 됩니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보아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발전을 했습니까?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해왔습니다. 예배당도 좋고 돈도 많고 위대한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한국 교회, 한국의 목사님들이 존경받지 못할까요? 그것은 교회가 교회 아닌 모습을 보이고 정직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유명하고 멋지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성숙한 교회 그리고 성숙한 신자들은 세상의 유행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고, 세상의 흐름에 따르는 것들은 성경의 말씀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된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이 살다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면서 살면 보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들은 파퓰리즘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렇고 나라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퍼준다고 무조건 좋아할 수 있습니까? 결국 누구 돈입니까? 다 우리 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서 나를 좀 더 준다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상적이고 제대로 하는 것이고 정말로 나라를 생각하고 국민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이 하면 나라는 주저앉게 됩니다.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라는 주저앉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했다고 나라가 부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교회들이 바른 모습으로 부흥하지 못하면 나라들이 다 망했습니다. 교회들이 부흥하지 못하고 돈도 없을 때 나라는 흥합니다. 며칠 전 일간지에 크게 나온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그런 연구결과를 보여주었는데 참으로 좋았습니다. 교회는 가난할 때가 존경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가난할 때 존경받습니다. 

여러분, 정직하십시다. 우리 모두 정직하십시다.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명령이시고 소원이십니다. 하나님 좋은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 고백하는 심정으로 515장을 찬송하겠습니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뚯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그렇습니다. 여러분, 정직해야합니다. 정직하다 보면 손해 보는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고 어려운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직하십시다. 교회가 무엇보다도 정직하십시다. 아닌 것을 맞는 것처럼 하지 마십시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보이지 마십시다. 사람 눈에 잘 보이려고 이런 저런 연출하지 마십시다. 오해 받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예수님도 오해받았습니다. 필요하면 오해도 받으십시다. 정직하게 사십시다. 손해 보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보여 정직하게 믿으십시다. 잘난 척하면서 성경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냥 믿으십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소원하시고 명령하시는 정직함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챙겨주시고 얼마나 놀라운 복을 주시는지 틀림없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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