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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물을 양보한 이삭 (창 26: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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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을 양보한 이삭 (창 26:15-33)


창세기 26:15-33
15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18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26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오늘 말씀은 이삭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줍니다. 이삭이 지난 번 묵상했던 대로 그해 소출이 백배가 되고 양과 소가 떼를 이루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거부가 되니까 이삭을 시기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이방인이 성공하는 것을 본토인들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이삭을 쫒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그들이 선택했던 것은 이삭의 우물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대에 파서 이용하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이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그 지역을 다스리던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곳을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랄 골짜기로 옮겨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랄 목자들이 그 우물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우물 때문에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강탈함)이라 부릅니다. 이번에도 이삭이 양보합니다. 두 번째 양보입니다. 다시 옮겨서 우물을 팠습니다. 다시 샘물을 얻었는데 이번에도 다툼이 났습니다. 이삭이 세 번째 양보를 하고 그 이름을 ‘싯나(적대감)’라 부릅니다. 다시 옮겨 우물을 팠더니 이번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네 번째 우물이며, 그 이름을 넓다는 의미의 르호봇이라고 짓습니다. 이후 32절에 다시 브엘세바란 곳에서 다섯 번째 우물을 팝니다. 

우물은 물이 부족한 중동지방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삭은 다섯 번에 걸쳐 우물을 파고 옮기는 경험을 합니다. 그 중 세 번은 양보라고도 할 수 있고 쫓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힘이 있었지만 양보하고 싸움을 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삭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이삭을 온유한 사람이라 부르는데 아마 오늘처럼 우물을 양보하는 사건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분명 우물들에 대한 권리가 이삭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항의 한 번 하지 않고 번번이 물러납니다.

우리 시대에 이삭 같은 사람을 보면 어떤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삭처럼 양보하며 살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절대 양보 못할 것입니다. 요즘처럼 똑똑한 사람들의 시대에 이삭 같은 어리석은 행동은 오히려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세 번은커녕 단 한 번도 양보를 못합니다. 어떻게 판 우물이고 얼마나 소중한 우물인데 그것을 양보합니까? 이처럼 양보를 하지 않으니까 다툼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자기가 좀 손해를 보고 평화를 얻겠다는 마음이 없으니 형제 간에 불화하고,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정치에선 극한 대립이 계속되고 국제정치에서는 평화가 없습니다.

오늘 이삭처럼 양보하며 살라고 외쳐도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말씀은 그렇게 외치라고 합니다. 그것이 설교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목회자들마저 양보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니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요 근래 교회마다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원로 목사와 새로 부임한 목사가 싸우고, 장로와 목사가 싸웁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조금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법정 소송으로 가는 것은 예사이고 심할 경우에는 폭력배까지 동원하기도 합니다. 물질과 권력을 섬기는 것인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최근 감리교단은 분열될 정도로 내홍이 깊습니다. 감독회장 선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감독 회장에 출마하였는데 이분이 사회법에서 유죄 판결 받은 전력이 있어 출마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투표는 이루어졌고 이분이 1등이 되었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1등이니 감독회장이라고 하고 반대쪽은 자격미달이라고 하며 갈라졌습니다. 

결국 세상 법정에 여러 건의 소송이 걸렸고 최근에 다시 총회 측과 본부 측이 따로 선거를 해서 두 명의 감독회장에 선출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러다 감리교도 분열되는 것 아닌가 하고 감리교 소속 어느 장로님에게 물어보니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 연금이 걸려 있어 만약 분열되면 한 쪽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랍니다. 어쨌든 감리교가 2년 넘게 이런 분란을 겪는 이유는 결국 대형교회 목회자 한 분이 감독회장이 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교단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또 자기 자신은 이미 큰 교회도 이루어 성공했으니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감독회장이라는 명예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주님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한국사회에서나 한국정치에서 익히 보아오던 모습들입니다. 자기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양보하려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양보의 신앙입니다. 정당한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에게 죄를 물을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의하게 정죄를 당했지만 담담하게 그것을 참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힘이 있으셨지만 묵묵히 십자가 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양보하고 져준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의 구원이 아니었습니까? 지고 양보하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보라는 것은 눈 앞의 작은 이익을 포기하고 그것보다 더 큰 평화를 얻겠다는 결단입니다. 물질이나 권리를 좀 포기하더라도 화목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예수님은 마치 물 같은 분입니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웅덩이가 있으면 다 채울 때까지 기다립니다. 바위가 있으면 피해가고, 산이 있으면 멀리 돌아갑니다. 물은 그렇게 양보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릅니다. 그런데 세상에 바다처럼 넓고 힘이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평생 양보 한 번 안해 보고 평생 자기 권리를 부인해 본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의 제자의 삶이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애통해 하고, 온유해지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결국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부인이나 양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이삭은 양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정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결코 손해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22절입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양보하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것으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좁은 그랄 땅이 아닌 더 넓은 땅으로 보내셔서 이삭을 번성케 했다는 말씀입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습니다. 이삭은 대신 소실대탐을 이루었습니다. 작은 것을 버리고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작은 것을 양보하면 큰 것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삭의 영향력은 더 커졌습니다. 16절에 아비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26절 이하에는 아비멜렉이 이삭과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아비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29절입니다.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양보하고 쫓겨나는 것 같은데 계속 형통한 이삭의 모습을 아비멜렉은 보았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이삭과 계약을 맺으려 하는 이유는 이삭이 강성한 민족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29절에서 아비멜렉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아비멜렉은 이삭과 미리 계약을 맺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자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강성해졌습니다. 세상의 권리를 양보한 대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양에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신 하늘이 도와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맹자 양혜왕 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양혜왕이 사방의 적들에게 지고난 후 이 치욕을 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묻자 맹자는 “토지가 사방 백리라도 왕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고는 인자한 정치를 해서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이며,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게 하고, 장정들에게는 효성과 우애와 충성과 신용을 가르쳐 부형과 윗사람을 섬기게 한다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의 견고한 군대를 이길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인정을 베풀지 않는 나라를 징벌한다면 그 백성들이 환영할 것이라고 하며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을 포기하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보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강성해지고 풍요로운 축복을 주시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의 양보와 겸손이 빛나는 것이지 아무것도 갖춘 것 없이 양보만 한다고 해서 잘된다고 하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박정관 목사님을 모시고 성품과 재능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품은 인간관계나 인격과 관련되지만, 재능은 성공이나 부와 관련됩니다. 서로 다른 길입니다. 

좋은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성품을 개발해야 하지만, 물질적 성공을 위해서는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이삭이 양보하기 전에 그는 이미 거부였음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력도 없이 착하면 정말 희박한 확률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실력 있고 착한 사람은 저는 대개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축복이 있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양보하면서 물질적인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이삭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우물을 옮기거나 우물을 팠지만 그때마다 샘이 솟아났습니다. 아무데나 판다고 물이 솟습니까? 하나님이 은혜 베푸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다섯 번의 경험을 통하여 이삭은 축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우리의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이삭처럼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이삭이 얻었던 가장 큰 수확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넓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나니까 마음이 더 관대해지고 여유로워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물질을 양보한 대신 이삭은 하나님을 얻습니다. 24절에서 이삭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랄 땅에 있었다면 이런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쫓겨나고 빼앗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더 좋은 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양보하면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복도 누리고 영적인 복도 다 누리려는 우리의 얄팍한 계산 때문입니다. 무언가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결단을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서는 빼앗겼지만 영적으로는 더 풍성해집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우물을 빼앗기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잃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물을 빼앗기면 아프거든요.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하며 참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을 때 우리는 갑자기 더 악한 사람이 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다 소용 없어 내 힘으로 지켜야 돼!’ 이렇게 됩니다. 이 사람은 조금의 양보는 행했지만 여전히 그 관심이 물질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 것 자체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탐욕과 다툼에서 벗어나고, 화목과 평화를 좇은 것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야지 이만큼 양보했으니 더 주세요 하는 자세는 우리 마음을 더 옹졸하게 하게 만듭니다. 결국 손해만 난다 싶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더 악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크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요즘 사회가 지나치게 물질 중심적이 되다 보니까 영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신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쓴 책 <뜻밖의 초대>에 어떤 댓글이 참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떤 분이 제 책의 일부 중 “부자에게는 물건을 사는 기쁨이 없다. 돈이 많으니까 집도, 고급 물건도 별 고민 없이 산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새 것을 장만하는 기쁨이 있다. 전세방에서 출발하여 작지만 자기 집을 살 때의 기쁨, 또 그 작은 집에서 더 넓은 평수로 늘려갈 때의 뿌듯함이 있다.” 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이런 댓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는 기쁨...없어도 괜찮으니까...부자로 살고 싶어요~ ㅋ” 여러분도 동의하시는 표정 같습니다(^^.....)

물질에 대한 관심, 염려, 욕구 등이 한국사회에 너무 강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한국사회가 이처럼 각박하고 메마르고, 긴장이 되고, 자살율도 높고,  또 비도덕적인 사회가 된 것은 이처럼 물질 중심의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정말 정신이 빠진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인디언들 말 들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걷지 마시오. 당신의 영혼이 좇아올 수 있도록”

이번 총리와 장관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도층으로 추천된 사람들이 하나같이 흠이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위장전입은 기본입니다. 집을 3채나 가지고 있으면서 노후 대비를 위해서 쪽방촌 투기를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상습적인 거짓말이나 논문 표절은 별로 큰 죄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병역기피를 하고 그릇된 막말을 공개석상에서 해도 ‘죄송합니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납니다. 병역기피 의혹으로 MC 몽이란 가수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가증스러울 정도입니다. ‘공정한 사회’와 ‘정의’를 정책적 의제로 제시하면서도 이런 사람들은 추천한 이명박 대통령도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처리하는가에 따라 공정한 사회란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단지 쇼에 불과했는지 판가름 날 것입니다.

왜 한국사회에서는 이처럼 청백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까? 모두가 자기만 잘 되고 자기만 출세하면 된다고 하며 살아온 결과입니다. 한국사회는 자존심, 자부심이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공직자로서 국민들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자부심, 언론인으로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자부심,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산다는 자부심 등은 모두 밥그릇에 팔아버린 지 오래입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났던 것은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였습니다. 이 책은 이제 동양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국부로 존경받는 호치민이 자기 평생 곁에 두고 읽었다고 해서 유명해진 책이기도 합니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 선생은 함부로 목민관이 되지 말 것을 충고합니다. 목민관은 백성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지방의 제후이기 때문입니다. <목민심서>에 나온 몇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청렴이란 관리의 본무요,갖가지 선행의 원천이요,모든 덕행의 근본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목민관이 될 수 없다”(율기욕조) 선생은 자신이 쓰는 돈이 백성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이란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된다.청렴한 선비의 행장은 겨우 이부자리에 속옷 그리고 고작해야 책 한 수레쯤 싣고 가면 될 것이다”(부임욕조)
“아랫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바르게 행동하면 명령 없이도 잘 되고,자신이 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명령을 해도 잘 듣지 않는다”(이전욕조)

권력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목민관의 대인관계에 대해서도 그 범위와 방법을 소상히 제시해 놓았습니다.공금으로 선심을 쓰거나,권문세도가를 지나치게 후히 대접해서는 안 되며,가족이나 형제와의 관계는 항상 사적이어야 하고,심지어 친구와는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까지도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봉공육조(奉公六條)’에서는 상사의 명령이 공법에 어긋나고,민생들에게 해독을 끼칠 때는 의연한 태도로 맞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씀에 있어서도 “아첨을 잘 하는 자는 충성되지 않고,바른 말을 잘 하는 자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충신을 으뜸으로 삼고,재주는 그 다음으로 보아 강직하고 진실됨을 인사(人事)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목민심서>의 마지막 부분은 ‘해관육조(解官六條)’입니다. 이는 목민관이 관직을 벗게 될 때의 자세와 백성들의 반응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벼슬이란 반드시 바뀌는 법이다.바뀌더라도 놀라지 않고,잃더라도 안타까워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를 존경할 것이다.떠나는 길에 백성들이 석별의 정을 말씨에 나타낸다면 역시 이 세상의 지극한 영광일 것이다.”(이찬규 중앙대 교수의 글에서 발췌)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정약용 선생의 글을 인용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물질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목민관의 보람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권력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백성을 위해서 봉사했다는 자부심 하나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이 정신적인 풍요함이고 이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정신적 가치와 그 소중함이 사라진 정말 얼빠진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땅의 바알 물질 문화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물질적 축복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체가 우리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우리 영혼이 더 풍요로워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한두 번의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단지 한두 번이 아니라 우물을 계속적으로 양보하는 사건을 통하여 그의 사람됨이 어떠함이 드러났습니다. 아비멜렉이 28절에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고백하는 것은 한두 가지 사건을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닙니다. 옆에서 오랜 동안 지켜보니 정말 이 사람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진가는 한두 가지 사건을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랜 동안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중심이고 성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삼상6:7). 우리의 중심이 어떠하면 반드시 그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뜻이나 의지가 열매로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성실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 두 번의 실수 때문에 염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 중심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 방향을 향하여 꾸준히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 진심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 그 사랑은 한 두 번의 사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오랜 세월 우리 인생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랑입니다. 잠깐은 외면한 것 같고 잠깐은 혼자인 것 같았지만 우리 인생을 뒤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돕고 인도하셨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이번 휴가에 지리산 종주를 하였습니다. 등산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참 인간의 한걸음 한 걸음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높아 보이고 멀어 보이지만, 또 한 걸음을 떼기도 힘들지만 한 발작 한 발작 그렇게 걸음을 떼다 보면 어느새 목표하던 곳에 올라와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뒤돌아보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하면서 스스로 대견해 합니다. 개미 같은 그 한 걸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을 떼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관절이 좋지 않습니다. 이번 지리산 종주를 결정하면서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 거리를 종주할 수 있을까? 다리에 이상이 생기면 어떡하나?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등산 스틱도 구입하고 무릎 보호대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종주가 시작되어 한 3시간도 못 되어 오른쪽 관절에 이상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오르막길도 힘들 뿐만 아니라 내리막길에서는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2시간 거리가 3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마음은 다급해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아픈 다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했겠습니까? “주여 천왕봉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기도응답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다리 하나 없는 샘 치자, 다리 하나 없는 장애인이 지리산 종주 도전에 나섰다고 생각하자. 그러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고, 뒤처지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얻었던 교훈은 그렇게 한쪽 다리를 끌고 가다시피해도 시간이 좀 늦을 뿐이지 결국 목적지에는 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앞서 가던 일행이 쉬고 있을 때는 서로 만나거나 제가 추월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천왕봉까지 갔고, 일출도 보았습니다. 그 내려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지만 계단 하나, 바위 하나하나를 두 발로 점찍듯이 정성껏 밟으며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시간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근 두 배가 들었지만 결국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두 번의 실패와 성공이 아닙니다. 능력도 아닙니다. 아무리 능력이 없는 사람도, 심지어 장애인일지라도 그 중심이 바르고 성실함으로 노력한다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인생이 평가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두 번의 성공과 실패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중심이 어떠하고 그가 꾸준히 어떤 길을 걸어왔느냐로 우리 인생을 평가할 것입니다. 이삭이 다섯 번 우물을 옮긴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이삭의 온유함이 단번에 드러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오랜 세월과 반복된 그의 행동 속에서 그 온유함의 진가를 드러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의 뜻을 행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오늘 한 걸음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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