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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죄 선언 (롬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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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언 (롬 8:1-11)


I. 지킬박사와 하이드

영국의 단편작가 스티븐슨의 작품 가운데에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킬이라는 의학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며 자비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이상의 그 어떤 존재로 여기며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밤만 되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나타나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흉악범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능욕하고 약탈을 일삼는 등 온 동네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던 끝에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 동네의 화근을 없애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보안관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하이드가 잡혔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졌습니다.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드디어 하이드의 가면이 벗겨졌습니다. 그 순간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아연 실색하고 말았습니다. 하이드! 그가 바로 그들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았던 지킬박사였던 것입니다.

이 단편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선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강포와 자기만을 높이는 이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존경 뒤에는 갈등이 그를 비웃고 있습니다. 착함 뒤에는 음흉함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겸손 뒤에는 가식이 노려보고 있으며 사랑과 자비 뒤에는 교만과 건방짐이 숨어 있습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갈등! 이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 인간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II. 예수 믿고도 정죄의식이?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육의 갈등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면 이런 것들이 다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면 죄도 안 짓고 욕심도 없어지고 갈등도 사라져야 하는데 그냥 남아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도 신앙생활이 흔들립니다. 성령의 큰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들도 낙심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도 별로 변화되는 게 없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하늘의 불을 불러 이방선지자 850명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세벨이란 여자 한 사람이 두려워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합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넋두리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중세의 타락한 천주교회와의 싸움을 선언한 마틴 루터 그가 어느날 절망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내는 상복을 입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니?”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면 그렇게 목숨 걸고 종교개혁을 선포했던 당신이 그렇게 무력하게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단 말이오.” 
이게 바로 나의 모습이요. 너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쯤 되면 갈등이 없을 것 같은데 오늘 본문 앞부분 로마서 7장에서 처절한 내면적 갈등을 쏟아 놓습니다. “내 속에는 두 개의 내가 싸우고 있다. 하나는 죄를 지으려는 육의 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령의 생각이다. 그런데 악이 이기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여기 사망의 몸은 시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경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 가운데 하나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사형수에게 꽁꽁 묶어 두는 것입니다. 시체가 썩어 가면서 벌레가 나와 산 사람을 갉아먹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떨쳐 버리고 싶은데 꽁꽁 묶여있기 때문에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악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은데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받고 싶은데 벌레가 나를 갉아 먹듯이 나를 삼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갈등은 갈등의 차원을 넘어 마침내 정죄의식과 패배의식으로 곧장 달려갑니다. “나는 아무래도 희망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악을 이길 수 없어. 나는 버림 받은 사람이야” 영적인 자포자기, 절망감과 패배감이 찾아옵니다.
왜 이런 갈등과 싸움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는 좋은 균들과 나쁜 균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좋은 균들이 나쁜 균을 이기면 건강한 사람이요 나쁜 균이 이기면 각종 질병이 발생하는 겁니다. 암세포를 만드는 균들이 있고 그 암세포를 죽이는 균들이 있습니다. 건강한 균들이 암세포를 이기면 건강하게 살 수 있지만 암세포가 승리하면 암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싸웁니까? 생명이 붙어있는 한 싸우는 것입니다.

가슴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았을 때 무겁다고 느끼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송장 위에는 아무리 큰 바위를 올려놓아도 무겁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송곳으로 찔렀을 때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자는 기도하지 않아도 갈등이 없습니다. 불신자는 선을 행하지 않아도 고민이 없습니다. 불신자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아픔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랑만 늘어 놓습니다. 죄지은 것을 자랑합니다. 사기꾼 사회에서는 멋지게 사기 친 것이 자랑이요, 도둑놈 세계에서는 자물쇠 잘 따고 금고 잘 여는 것이 자랑이요, 음란 집단에서는 많은 이성을 건드린 것이 자랑입니다. 악을 조장하고 선을 핍박합니다. 그들에겐 생명의 법 대신 죽음의 법, 죄의 법, 사탄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II. 죄성을 인정하라

1. 때문에 구원받은 내 안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육의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병들 수 있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절망감에 탄식할 수 있습니다. 넘어지고 깨어져 낙망할 때도 있습니다. 내 속에서 선과 악이 싸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 사실을 진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탄식은 차라리 축복일 수 있습니다. 

2. 영적인 싸움터에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싸움과 갈등은 내 노력, 내 의지, 내 방법으로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 문제인데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할수록 비참해 집니다. 연구해도 안 됩니다. 금식을 해도 안 됩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집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IV.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면 갈등은 당연한 것이기에 탄식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 로마서 8장입니다. 성경 어디가 귀하지 않겠습니다만은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 8장을 참 좋아합니다.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필립 스페너 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을 한 개의 지환으로 본다면 로마서는 보석이요 8장은 그 보석 중에도 반짝이는 초점과 같다”고 했습니다.

로이드 죤스는 8장을 강해하면서 “몸의 지체 중 더 위대하고 중요한 지체가 있듯이 성경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보석이요 보석덩어리로 가득한 성경이 로마서 8장이다”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기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로마서 1장부터 7장까지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예수를 믿고도 죄에 대한 갈등이 존재한다. 이 문제는 내 방법, 내 노력이나 내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제 이 정죄의식, 패배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게
  피난처 있으니 갈등하는 자 이리 오게
  피난처 있으니 탄식하는 자 이리 오게”

어린 시절 제 할머니께 들은 얘기입니다. 

내 아버지는 인천 상륙작전 소대장으로 참전을 하셨습니다. 적군을 따라가는데 너무 급하게 진격해 들어가는 바람에 도망가던 적군보다도 너무 앞장서 달려가서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부하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지막 한 명 남은 부하가 적탄에 맞았습니다. 소대장님 제게 총 한번만 쏘아주고 가십시오. 그러나 부하를 죽일 수가 없어서 그 부하를 등에 걸머 매고 도망가다 골짜기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마침 옆에 있던 아군 부대가 그 곳을 향하여 진격해 올라가다가 아버지 그리고 부하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달려오는 적군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일행이 바로 아군 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하고 적군은 쏜살같이 도망을 갔고 두 사람은 목숨을 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사정없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빗발치는 총을 쏘아 댑니다. 유혹의 화살을 당깁니다. 그때 내가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몸을 피하게 될 때에 사탄은 도망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단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아무리 추한 죄를 지어도 괜찮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선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일흔번 씩 일곱 번 똑같은 죄를 짓고 달려와 용서를 구하면 “나는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 너를 죽이지 않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인생길에서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때로 범죄 할 수 있습니다. 쓰러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예수 안으로 오십시오. 예수 보혈의 피를 의지하십시오. 그분 안엔 정죄함이 없습니다.

마귀란 놈은 참 어이가 없는 존재입니다. 죄를 짓기까지는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합니다. “세상엔 달콤한 일이 많이 있다. 세상에 죄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타협하며 그렇게 사는 게 인생이야. 너무 혼자 순결한척 한다고 누가 알아 주냐. 이 정도는 죄가 아니야.” 유혹합니다. 

그러다가 막상 범죄하고 나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패배의식, 정죄의식을 심습니다. “큰일 났다. 하나님은 너를 떠났어. 그런 죄를 짓다니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너는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도 받아 주시지 않을 거야. 네가 무슨 염치로 또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니.”라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수작입니다. 작전입니다. 죄의 두려움에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분의 놀라운 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는 철저히 망가졌습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면 망하게는 거지요. 그래도 그는 넘어진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돌아가면 아버지는 나를 받아 주실 거야. 아버지 집에는 용서가 풍성할 거야.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움켜 먹으면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의 길에 시달려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V. 무죄 선언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기만 하면 정죄함이 없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8장 2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1절과 2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죄 선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죄 없다고 선언했는데 누가 나를 죄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죄의식, 패배의식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셨는데 누가 나를 정죄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의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주께 돌아와 회개하고 이것을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로 이 의식은 여러분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해방이 선포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가 선언되었습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찾아오시면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주님께서 선포하는 놀라운 복음이 날 찾아오면 실패의식, 정죄의식은 사라지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을 우리는 의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작가 이어령씨의 수필 가운데에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 앞부분에 보면 이 분이 어릴 때 한 마을에서 경험했던 조그만한 경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분을 뵈면 턱 밑에 하얀 꽃바구니를 달고 다닌다 할만큼 복스러운 수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그 수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한 아이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얼른 달려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게 수염을 기르고 계신 분들은 위엄있어 보여 가까이 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 그늘 밑에서 할아버지가 박장대소하며 웃으신단 말이에요. 이 아이가 용기를 내어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 볼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에 끄집어 내 놓고 주무세요.” 아, 30년 동안 달고 다녔지만 수염을 이불 속에다 넣고 자는지 밖에 끄집어 내 놓고 자는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얘야 미안하다 나도 잘 모르겠다. 하룻밤 잠을 자보고 대답해 주마” “그렇게 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일찌감치 저녁을 잡수시고 이부자리 펴고 잠을 청합니다. 그 큰 수염 바구니를 붙들고 이불 속에 푹 넣고 잠을 청하는데 답답한 게 잠이 안 옵니다. 아 이게 아닌가 보다 수염을 붙들고 이불 바깥에다가 걸쳐놓고 잠을 청하는데 쓸쓸해서 잠이 안 옵니다.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고 걸쳐놓으면 쓸쓸하고 꼬박 철야를 했지만 해답을 얻지 못합니다.

이 작가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십년 이십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예수 바깥에 있는지, 내 삶의 모습이 말씀 안에 있는지 말씀 바깥에 있는지, 내 영혼이 천국의 영생의 그늘 아래 있는지 저주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영혼의 현주소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앙들을 질타하고 있는 내용 아니겠습니까?

1절과 2절을 잘 살펴보면 공통된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당신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에게 해방을 선포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예수 안에서 승리는 우리의 것일세. 자유는 나의 것일세. 예수 안에는 언제나 용서의 풍성함이 널려져 있습니다. 실패의식, 갈등, 정죄의식, 이런 것들은 예수 안에서 이미 나와 상관이 없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VI. 하나님은 하신다.

내 노력으로, 내 의지로 불가능하던 그 일들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일어난 것입니까?  3절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하나님은 하시나니!

주일학교에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이 아이가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아빠 아빠 오늘 주일학교에 갔는데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가 토해냈대. 아빠는 그 사실을 믿으세요? 그런 기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빠가 대답했습니다. “얘야 하나님이 하신 일이거든.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가 토해낸 것이 아니고 요나가 고래를 삼켰다가 토했다고 하더라도 아빠는 그대로 믿는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거든.” 

로마서 8장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성령이란 말이 20번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사실을 성령이 얼마나 놀랍게 우리에게 역사를 일으키시는가?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성령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성령 안에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할렐루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근심하며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능하겠습니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제자들에게 대답을 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이 하면 불가능한 일들이 하나님이 하시면 쉽게 가능해 집니다. 내 노력으로 불가능하던 그 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단숨에 이루어집니다. 내 의지로 내 방법으로 불가능했던 그 일, 성령이 하시면 당장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힘 있는 사람들, 권세 있는 사람들, 능력 있는 사람들, 지식인 철학인들이 모두 매달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우리 하나님께서 1초만 도와주시면 이 자리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은 한순간에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고 예수님의 보혈 한 방울이면 모든 인류의 죄를 녹일 수 있습니다. 

VII. 말씀을 맺으며

영국 교회가 낳은 위대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소년이 새장의 새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소년에게 “얘야 너 그 새를 어찌하려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좀 더 괴롭히다가 싫증나면 죽여 버리지요.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 새 내게 파지 않으련?” “백달러를 주면 팔지요.” 소년은 농담으로 말합니다. 새 한 마리를 백달러에 살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은 백달러를 주고 그 새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 설교시간에 그 새장을 들고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새 한 마리에 거금 백달러를 주고 산 새장을 교인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망과 저주의 새장에 가두고 괴롭히는 마귀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셈이냐?“ 마귀가 대답합니다.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 맘대로 갖고 놀다가 죽여 버리지요. 뭐“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사고 싶은데 얼마면 되겠느냐?“ 마귀가 웃으면서 ”이것들을 사서 뭘 하시려고요?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배반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래도 사시겠다면 당신의 외아들 예수의 목숨을 내어놓으세요.“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목숨을 내어주고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천국을 훨훨 날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해방은 선포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승리는 확정되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한번 주신 구원 절대로 주님은 실패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자리까지 주께서 반드시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천국 법정에서 영원한 재판장 되신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한소망교회 모든 성도, 예수 안에서 무죄임을 선언하노라!” 
“한소망교회 모든 성도, 예수 안에서 자유를 선언하노라!”
“한소망교회 모든 성도, 예수 안에서 해방을 선언하노라!”
“한소망교회 모든 성도, 예수 안에서 천국을 선물로 주노라!”
기도하십시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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