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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여, 복음으로 도시를 점령하라 (수 6: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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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복음으로 도시를 점령하라 (수 6:8-16)


I. 교회는 패배자인가?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개구쟁이 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교복을 단정히 입고 다니는데 이 친구는 교복을 싫어합니다.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면, “선생님 교복은 일제의 잔재입니다”라고 대꾸합니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서 뛰어 다니다 꾸중을 들으면 자신은 신라 화랑도의 패기를 닮아서 그렇답니다. 그러다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잡니다. “넌 맨날 잠만 자냐”고 물으면 “꿈을 갖기 위해서”랍니다. 

일전 공항에 갔다가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더니 요즘도 편안한 옷 입고 동리휘젓고 다니다 밥먹고 낮잠자고 그렇게 산답니다. 
인생도 교회공동체도 이처럼 꿈도 도전도 없이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고 잠만자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배고픈 호랑이 한 마리가 먹이감을 찾아 사냥을 나섰습니다.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 가길래 앞발을 번쩍 들어서 낚아채려는데 토끼가 날카로운 눈으로 호랑이를 째려보면서 앞발을 탁 쳤습니다. “이거 놔 짜식아!” 깜짝 놀라서 토끼가 뭐길래 이렇게 배짱이 좋은가? 놀란 호랑이가 도망을 갔습니다. 그 다음날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아 나섰는데 토끼가 깡충깡충 그 앞을 지나갑니다. 다시 앞발을 들어 탁 치려는데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면서 “짜식아 내가 어제 그 토끼야!” 이 토끼는 도무지 안되겠다. 다른 토끼를 찾아서 나섰습니다. 토끼들이 있는 곳에서 한번에 낚아채기 위해서 앞발을 번쩍 들었더니 토끼들이 씩 웃으면서 “짜식아 소문 다 났어!”

오늘 교회나 성도들이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호랑이처럼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정복하도록 많은 권세와 능력을 주셨는데 문제에 갇혀서 신음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패배주의에 빠져 세상을 비관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21세기를 두려움의 땅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계의 종말, 예수그리스도의 재림만이 21세기 유일한 교회의 희망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저출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불교권 회교권 국가들은 산아제한을 전혀하고 있지 않습니다. 때문에 불신자 인구가 폭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의 악이 너무 편만하여 교회가 세상을 감당키에는 너무나 벅차졌다고 합니다. 기술의 발전, 유전자 공학 등 미래의 과학이 우리의 신앙을 무력화시킬 것이라고도 합니다. 세계도처에서 기독교 신앙과 선교사를 무섭게 핍박하고 있습니다. 가히 공포의 현실들입니다. 그 모든 것을 대항하기엔 교회에 약점이 너무나 많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비관적 시각들이 사실일까요? 아닙니다. 이것들은 메뚜기 콤플렉스에 불과합니다. 가나안 땅의 거인들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던 10명의 점탐꾼들의 불신앙의 말입니다. “우리는 저들 앞에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시각 하나로 그들은 멸망했습니다. 메뚜기 콤플렉스는 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전쟁의 승리를 행운에 맡기시지 않습니다. 멋진 승리의 전략을 세우는 명장처럼 하나님은 승리를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결코 실패하지 않는 계획 말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작전이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폭발하는 인구, 현대과학의 도전, 커져가는 도시를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누구나 다 고개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1세기를 점령하던 그 초대교회가 오늘 이 땅이 다시 생겨난다면 어떨까요? 도시를 점령할 수 있다고 믿어지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승리의 전략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어서 좋은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신령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괜찮은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복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다 옳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종교는 결코 아닙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신비의 체험을 했던 베드로는 (마17:1-13)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또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진동했고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산아래 도시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비경험을 위한 수도원으로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도시를 점령하여 아버지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아래 내려왔을 때 사탄에게 시달리는 병든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끌어안고 안타까워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바로 그 문제를 직면하여 해결하셨습니다. 

보십시오!

1) 예수님은 모세의 초막을 거부하였습니다.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세상이 변하고 감동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은 엘리야의 초막을 거부하셨습니다. 만약 예언이 산꼭대기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 예언은 언제나 사람을 치료하고 공동체의 치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능력으로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 받는 이웃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당신을 위한 초막도 거부하셨습니다. 오늘 교회가 무력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을 교회안에 가두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 삼으신 이유는 나만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천수백년동안 교회는 초막 짓는 일에만 매달려왔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교회안에만 가두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도시를 점령하는 일에는 메뚜기처럼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Identity는 도시를 점령하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건물을 갖는 것은 우리의 편안과 안일을 위해서가아닙니다. 도시를 정복하는 전초기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II. 도시는 하나님의 영토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여호수아 5장 1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요단을 건넜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아모리 왕이, 가나안 모든 왕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왜 주저하십니까?
왜 사탄의 공격을 보고만 있습니까?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성령이 당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적들은 간장이 녹았습니다. 사탄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지금 당장 공격하십시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정복하는데는 태산같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면 족합니다. 당신에게 이미 권세가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무기들이 주어졌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돈 다발 크다고 염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 도시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거룩한 땅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어라.”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직업을 가지고 사는 것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목회자에게만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직장을 정복하고 학교를 정복하고 사업터를 정복하기 위해서도 기름부으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파송된 하나님 나라 사자요 왕입니다. 성도는 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제사장 사역이 있지만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왕의 사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 여기 있습니다. “도시를 정복하라!”

성경을 읽던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성경에 군사적 용어들이 많이 나온다구요. 너무 전투적이라구요. 옳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군사들입니다. 

III. 어떻게? - 거룩이 능력이다 (할례)

어떻게 이 땅에 교회들이 도시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처럼 건너온 여호수아는 한편 급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자. 아니다. 요단강을 건넌 여세를 몰아 가나안 족속중 한 두 족속이라고 먹어치우자. 낭비할 시간이 없다. 일제 전투태세. 나무를 꺾어 활을 만들어라. 녹슨 칼을 갈아라. 바위에 돌창을 문질러라. 일부 장정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지키라. 지금이야말로 가나안을 공격할 최고의 기회다. 돌격!” 이러고 싶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교두보를 구축하는 일도, 선제공격을 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장정들을 사막에 눕혀놓고 할례를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는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황당한 명령입니까?

제가 여호수아였다면 하나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전쟁터에서 할례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십니까? 하나님, 창세기 34장에 세겜족속들이 할례를 행하고 꼼짝도 못하여 야곱의 아들들에게 몰살당했던 그 일을 잊으셨습니까? 하나님, 그것은 전투가 아닙니다. 자살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도시를 정복하는 하나님의 군대의 능력은 인간적 자원이나 작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성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무기는 거룩함에 있느니라. 거룩이 파워이니라.」

1)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할례를 행하시므로 가나안 땅의 싸움이 광야 교회의 행진 보다 거룩한 일임을 보여 주십니다. 왕의 사역은 제사장 사역 못지 않게 거룩한 일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샘이 터졌습니다. 거기는 술도, 퇴폐문화도 없는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유혹도 타협도 있었습니다. 음란한 문화가 있었는가 하면 생존경쟁도 있었습니다. 광야의 양식이었던 만나가 그쳤습니다. 가정과 직장, 학원과 사업터 그 곳이 주안에서 거룩한 땅입니다. 그곳을 점령해 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사역입니다. 그게 왕의 사역입니다.

2) 할례가 마쳐지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5장 9절 “이제 애굽의 수치가 떠나갔다.”

왜 광야의 수치가 떠나갔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무할례의 수치가 떠나갔다고 말씀하지 않고 애굽의 수치가 떠나갔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무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게 아닙니다. 애굽의 옛 본성을 짤라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새로운 땅의 왕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 애굽의 노예근성을 짤라 내라. 잘못된 인생의 목표를 버려라. 세상 가치관과 세상 우선주의에 매여 살던 껍질을 짤라 내라. 그래야 하나님 백성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느니라. 세상가치관을 짤라야 하나님 나라 가치관이라는 새싹이 돋아납니다. 그렇습니다. 할례를 향할 때 애굽의 수치가 떠나갔습니다.

3) 우리가 회개할 때 이미 사탄은 물러갔습니다. 전쟁에서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영토를 얻는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신령한 전쟁입니다. 얻는 싸움이 아니라 짤라내는 싸움입니다. 모든 야망들을 짤라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잘못된 우선순위와 이기적 야망을 짤라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의 신비가 여기 있습니다. 얻는 싸움이전에 짜르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구하는 싸움이전에 포기하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사는 싸움이전에 죽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IV. 유월절 잔치 : 부전승 축제

할례를 행한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행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싸움은 싸우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싸워 이긴 싸움에 그들은 그냥 동참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잔치이지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 도시를 점령하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겨놓고 싸운다.” 싸워서 쟁취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부전승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께서 이긴 승리, 주께서 이루신 구원, 이것을 함께 기뻐하는 축제가 유월절 축제였습니다. 

누가 도시를 정복할 수 있습니까? 누가 세상을 구원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구원의 감격이 살아있는 사람, 예수님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 오르는 사람, 십자가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글썽해 질 수 있는 사람, 내가 구원받았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세상의 악을 정복하고 사탄을 정복해 갈 수 있는 사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감격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구원의 감격없이 정복의 능력도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6:16) 파주 땅을, 고양 땅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삼천리 금수강산 한반도를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너희들이 복음으로 정복하게 될 것이니라. 세계 열방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이 주셨다” 감격의 함성을 질러댔을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소리가 커서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고 계신 것이구나. 하나님이 정복해 가시는 것이구나. 하나님이 무너뜨리고 계시는구나. 기뻐 소리지를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함성은 불신앙의 신음이 아닙니다. 낙심한 심령들의 한숨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소리를 지를 때에 구원의 감격과 함께 교회가 소리를 지를 때에 고양 땅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서울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38선이 녹아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세상에 묶어 두려고 하는 악한 영이 파멸될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크고 너무 중하게만 보여 무력한 성도로 살아가게 유혹하는 영이 사라질 것입니다. 질병의 영들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이 파해지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들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실패의 성들이 무너져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 성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V. 영적 추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 가까이 왔을 때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나게 됩니다. 칼을 높이 빼어든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보게 된 것입니다. 깜짝 놀란 여호수아 “당신은 우리 편이요, 아니면 적들의 편이요. 당신 도대체 누구요?” 그때 그가 대답합니다. “너의 질문이 틀렸다. 내가 너의 편이냐 적들의 편이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싸움이 진정 하나님의 싸움이더냐. 너의 인생발걸음이 진정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발걸음이더냐. 네가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더냐. 너의 모든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 그분에게 맞춰져 있느냐. 이것이 너의 질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야!”

남북전쟁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에게 한 장군이 찾아왔습니다. 북군은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여 있었습니다. “폐하, 이때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브라함 링컨이 이 장수에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닐세. 참된 문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인가? 우리 북군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군대인가?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이것이 문제일세.󰡓내가 하나님 편에 서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네. 할렐루야!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네. 

하나님이 우리 편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네가 지금 하나님 편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얘기했습니다. “내가 이제 왔느니라.” 왜 이 사람이 요단을 건넌지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아니하고 이제 왔는지 성경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기 전에 전쟁을 감행했더라면 저들은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추수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세상정복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큰 근심에 쌓여 있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넜지만 가나안 땅에서 2백만 대군이 몰살하는 것은 아닌지, 저 강력한 여리고 성을 과연 우리는 정복할 수 있는 것인지, 정복하고 여기서 뿌리 내리고 살 수 있을 것인지,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모든 근심이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구나. 내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구나. 주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나.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호수아는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자유인들은 신을 신었습니다. 종들은 신을 벗었습니다. 내가 사령관이 아니구나. 진정한 사령관은 하나님이시구나. 내 인생의 모든 목표를,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방법을, 모든 작전을 하나님 그분의 손에 맡기라는 뜻이구나. 그분의 뜻 앞에 순종해야 되겠구나. 나는 졸병이다. 졸병에겐 절대 복종, 순종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VI. 거룩한 추수

도시를 정복하는 사람들은 발에 신을 벗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시간, 돈, 명예, 환경, 자존심... 자신의 모든 신발을 벗어 던질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은 쓰십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바로 권리포기자들입니다.

6장에서 여리고 도시를 점령하는 방법은 더욱 황당합니다. 온 백성이 총동원하여 여리고 성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소풍 나온 것도 아닌데 하루 한 바퀴씩 성을 돌라니 좀 우습지 않습니까? 여리고 도시 견학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또 한편 지겨운 일이기도 했을 겝니다. 법궤를 매고 도는 것도 나팔을 부는 것도 소리를 지르는 것도 여리고 도시를 함락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다가 적군이 성문을 열고 공격이라도 해 온다면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전법을 군사전략가들이 이름 붙인다면 황당 전법 입니다. 

이 황당 전법은 인류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전법입니다. 이 전법이 효과적인 전법이었다면 그 이후 이 전법이 계속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을 도는 전법은 이곳에서 꼭 한번 사용된 전법이었습니다.

이 황당 전법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

① 그래서 법궤를 앞 세우고 길을 걸어 갔습니다. 법궤를 가운데 모시고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우리 한가운데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 우리의 뒤에서 도와주고 계신다.

② 여리고 성을 도는 백성들에겐 침묵이 선포되어 졌습니다. 인간의 입을 닫아라. 행여 부정적인 말을 할까 두렵다. 불평하는 백성들은 망한다. 입을 닫아라!

③ 제사장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오직 제사장의 나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 가는 것입니다.

VII. 도시를 복음으로 정복하라!

이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교회는 세상을 추수 밭으로 봅니다. 소풍갈 꽃동산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즐길 레스토랑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5천년동안 우리는 짓밟히며 걸어왔습니다. 여기서 매를 맞고 저기서 찢기며 허덕이며 달려왔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쓰시는 것은 아닐까? 이 민족을 살려내어 세계를 복음화하는 제사장 국가로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은 아닐까? 기대 하나로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성령의 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을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를 주님 손에 맡겨드립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몸부림하며 우리는 달려가야 합니다. 21세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이 땅을 통하여 이루어 지도록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한국은 예수안에서만 오직 위대한 나라,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21세기 이 땅에 사는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소망교회의 비전과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꿈을 꾸십시다. 버렸던 복음의 바톤을 다시 손에 드십시요. 때묻은 사명을 다시 닦으십시다. 주저 앉았던 사람들 일어나십시다. 꺼졌던 가슴의 불들을 새롭게 하십시다. 타성적인 셀들은 눈물로 기도하십시요. 아버지 마음 성령의 임재를 달라고.

북해도에는 해마다 겨울이 되면, 수 천 마리의 큰 오리 떼가 날아와서 월동을 하고 봄이 오면 도래지로 다시 날아갑니다. 작년 겨울에는 이상기온으로 호수가 꽁꽁 얼어 붙었고,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 된 오리를 가엾이 여긴 주민들이 콩 같은 먹이를 열심히 주기 시작했답니다. 어느덧 오리들은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데 재미를 붙여, 봄이 왔는데도 도래지로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이제는 변화한 시가지를 뒤뚱거리며 찾아들다가 개나 고양이에게 물려죽기도 하고 자동차에 치어죽기도 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동물학자들의 충고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야성을 잃어버린 큰 오리들은 봄이 왔건만 아직도 북해도 호수를 떠나지 않고 있답니다.

야성을 잃는다는 것, 꿈을 상실한 삶을 비극입니다. 회복하십시요. 다시 시작하십시요.

교회는 도시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목장은 마을을 정복하는 특공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갑니다.
당신 안에 이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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