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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많은 정금보다 사모할 것,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단 것 (시 19: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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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금보다 사모할 것,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단 것 (시 19:7-11)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啓示)하시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계시(啓示)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과의 교제와 구원을 가능케 했습니다. 따라서 계시(啓示)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언어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현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입니다. 
시편 19편 1절에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초자연계시인데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이 직접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② 이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③ 사람을 통한 예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 『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자연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알려주는 것이고 특별계시의 목적은 인간의 구원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요 14:8-9).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요 5:39).
시편 기자는 이른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각각 다른 이름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의 말씀의 다양한 표현입니다. 

1) 여호와의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7절에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바뀌었습니다. 
엘( )은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고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여기 율법은 넓은 의미로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율법이 완전하다는 말은 무엇이 부족하거나 흠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전성은 성경의 충족성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영혼을 소성(蘇醒)시킨다고 했습니다. 소성이라는 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2) 여호와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7절에 『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라고 했습니다. 
『 여호와의 증거 』(에두트, )는 율법과 같은 말입니다. 법궤를 증거궤라고 했습니다(민 17:4)
고린도전서 2장 1절에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3절에 『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우둔한 자 』(페티, )는 무엇이든지 믿고 따르는 사람인데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나쁘게 말하면 주대(낚시줄과 낚시대)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가 율법의 지혜를 배우지 아니하면 시험과 죄에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면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거는 범죄한 자에게는 형벌의 증거로, 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상급의 증거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7-8절에 『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고 했습니다.
우둔한 자가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고 익히므로 형벌을 피하고 상급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여호와의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8절에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율법이 교훈으로 표현되었습니다. 『 교훈 』(피쿠림, )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 정직 』(야솨르, )은 옳고 바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라고 했습니다. 또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했습니다(신 6:6-9).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는 율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4) 여호와의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8절에 『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계명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 『 계명 』(미츠와, )은 명령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 순결 』(바라, )은 '깨끗하다', '빛나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빛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 눈을 밝게 한다 』는 말은 선과 악을 분별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인간을 깨끗하게 할 수 없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언 6장 23절에 『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 얻는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5)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道)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9절에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원문에는 도(道)라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전후 문맥상 운을 맞추기 위해서 도라는 말을 첨가했습니다. 
여기 '여호와를 경외함'이란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율법이 한결같이 선포하는 대주제이기 때문입니다(신 17:19; 잠 1:7; 잠 15:33). 
『 정결하여 』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호르'는 순금과 같이 아무것도 섞이지 아니한 순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특히 이 용어는 세속적인 것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냅니다(레 13:17). 

따라서 '정결하여'라는 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자체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순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 『 영원까지 이르고 』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가장 순수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썩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즉, 세속적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사라져 버리지만 순전한 경외는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보존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 『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고 했습니다.

6) 여호와의 규례라고 했습니다. 
본문 19장 9절에 『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로 표현되었습니다. 
『 확실하여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는 '진리'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율법은 이방 종교의 법 조항들과는 달리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유일한 진리의 표준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은 인간이 믿고 따르는 완전한 것입니다. 
여기 『 다 의로우니 』는 율법에 대한 결론적인 정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은 질적인 면과 양적인 면에서 모두 의롭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원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Ⅱ.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입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입니다.
본문 19장 10절에 『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라고 했습니다. 
금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재화의 기준이 되는 것이 금입니다. 많은 정금이라고 했습니다. 정금(正金)은 순금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순도 99.99%는 있어도 100%는 없다고 합니다. 금은 순도가 높을수록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24Karat가 순금이라고 할 때 18Karat는 75%, 14Karat는 58.5%입니다. 여기 정금이라고 할 때는 가장 최상의 순도를 지닌 금을 말합니다.
많은 정금보다 더하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정금은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되거나 견줄만한 가치 있는 것이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2) 사모(思慕)하는 것입니다.
본문 19장 10절에 『 …더 사모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 사모한다 』는 말은 정을 들여서 마음으로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마음이라는 말인데 이 말의 히브리적 사유(思惟-논리적 사실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생각함)는 대상에 있어서 오직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사모의 대상은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 있는 것보다 더 인간들의 사모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3) 인생의 행복입니다.
본문 19장 10절에 『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라고 했습니다. 
『 송이꿀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노페트 추핌'입니다. 여기서 '추핌'이란 '흘러넘치다', 또는 '벌집에서 흘러넘친'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송이꿀'이란 벌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친 덩어리 꿀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꿀은 팔레스틴 산지에 흔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꿀은 최고의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금이나 꿀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 그에게 그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적으로는 그의 모든 재산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면적으로는 달콤한 행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꿀과 송이꿀은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먹고 사는 양식 이상의 것입니다.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했으니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은 양식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결코 먹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먹고 사는 것 이상에서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동물은 새끼치고 살아가면 만족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더 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생존의 가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4) 지키는 자에게 상이 큰 것입니다.
본문 19장 11절에 『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 경계를 받고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즈하르'는 '권고하다', '가르치다'는 뜻입니다. 이는 율법의 교훈적 기능을 보여줍니다. 
『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라고 한 것은 시편 전체의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입니다. 율법을 지킨 자, 곧 의를 행한 자는 행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고전 3:10-15).

5)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7장 9절에 『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람군대에 포위가 되었습니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다가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람 군대 진영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대로 주께서 아람 군대를 다 도망가도록 조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문둥이들은 아람 군대의 진에 들어가 장막을 돌아다니며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은과 금과 의복을 취했습니다. 이 때 문둥이들이 한 말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 『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29절에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많은 정금으로 만족하는 세상입니다. 모든 가치기준을 금에다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들은 정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주택, 최고의 보석, 최고의 옷, 최고의 자동차, 최고의 학문, 최고의 육체, 최고의 부모, 최고의 가족, 최고의 자식 등 이 모두는 이 세상의 정금의 가치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마 4:4). 
예레미야 15장 16절에 『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라고 했습니다.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벧전 2:2; 히 5:12-14).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1절에 『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달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즐거운 느낌'입니다. 최고의 맛(손 맛, 입 맛, 돈 맛, 명예의 맛, 쾌락의 맛 등)은 내적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것보다 더한 행복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보다 더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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