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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 밖의 만남 (요 5:2-9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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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밖의 만남 (요 5:2-9상)


김혜자 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아프리카의 가나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면서 경험한 내용을 적은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저도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는 곳에서 눈길을 고정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왜 이들은 이렇게 두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 라는 질문에 더 이상 책을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 있는 아이들의 아픔이 가슴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통해서 이들의 절망과 슬픔이 전달되어 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이어졌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세 가지 만남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는 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언제 태어났는가입니다. 두 번째는 어디에 태어났는가입니다. 세 번째는 어떤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이 세 가지는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사람은 이 세 가지 조건으로 살펴 보면 한 가지도 마땅치 않습니다. 첫째, 그가 태어난 시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입니다. 지금 이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인권이 많이 성장한 시대임에도 장애를 가진 분들이 여러 가지 불편을 겪고 계십니다. 하물면 현재도 그런데 그 시대에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두 번째, 그가 태어난 곳입니다. 본문의 사람은 유대땅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적인 개념으로 장애와 질병은 죄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부모의 잘못 또는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질병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대적 정서와 인식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태어날 때 겪었던 고통보다 더 크고 아프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세 번째, 어떤 부모를 통해서 태어났는가입니다. 본문을 보면 어떤 부모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이 사람은 혼자 있습니다. 자식을 챙길 수도 없고, 돌볼 수도 없는 상태입니다. 넉넉한 형편을 가졌다면 자식이 어느 정도 누릴 수가 있었겠지만, 이분은 오로지 베데스다 못이 동할 때만을 기다리는 형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상황속에서 있는 지체 장애자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자신이 전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그냥 겪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들을 몸으로 마음으로 견디어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 분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왜 내게 이런 상황을 주셨습니까? 왜 이런 아픔을 남겨 두셨습니까?”

이런 아픔 속에서 묻는 하나님의 뜻은 애절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간절함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은 바램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그리고 뜻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 베데스다의 풍경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전설과 같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못이 간혹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병을 고침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아픈 분들이 거기에 모여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병자들이 있고, 시각 장애인, 보행 장애인, 중풍병으로 불편해 하시는 분들이 베데스다 연못 곁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소망은 저 베데스다 연못이 동할 때 누구보다 먼저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병에서 고침받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깊이 생각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들어갔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선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을 사람이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누가 자리를 잘 잡을 수 있을까요? 경쟁률이 치열한데 순수하게 사람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래도 힘이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었을 겁니다. 아픈 사람들 중에서도 편차가 나뉘는 겁니다. 병으로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보행 장애자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빨리 들어가려면 우선 다리가 성해야 합니다. 팔이 다치고 피부가 다친 분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혼자 있는 사람보다는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친척들이 많거나 돈이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준다면 더 수월할 겁니다. 문제는 간혹 물이 움직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경우까지 대비할 정도의 여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도 또 다른 아픔이 생겨납니다. 설교 처음에 말씀 드린 아픔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것이라 볼공평한 것입니다. 현재 상황은 불공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아픔 위에 더한 아픔을 주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불공평한 것도 아프지만 불공정한 것은 더 아프다는 겁니다.

우여 곡절 끝에 회사에 취직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어느 날 제게 다가와서 이런 하소연을 합니다. “끈이나 줄이다 하면서 승진하는 분들을 볼 때 마다 속이 뒤집어집니다. 저는 이런 끈 하나 없어서 줄줄이 미끄러지는 것을 경험할 때 마다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분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픔위에 아픔이 더해지면 사람들은 그 부분에 집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혹 끈도 줄도 없이 승진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그러자 “있기는 하지만....” 아마도 소수라고 말씀하시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범주에 속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기는 더 힘드셨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단지 실력으로 극복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픔이 너무 크면 아픔밖에 보이지 않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아픔위의 아픔은 본질을 외곡 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본질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누워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이 본질에 대한 표현입니다. 병을 고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병자는 오랜 시간 베데스다 연못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픔이 지속되면서 본질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아픔만이 너무 두드러지게 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답을 합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도와 줄 사람이 없어서 물이 움직일 때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안타까움을 표현합니다. 혹시라도 시간 되시면 내려갈 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대답 아니겠습니까? 아픔이 너무 커 보이면서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남들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추구해야 아픔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 에드워드의 『세 왕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세 명의 왕, 초대왕 사울, 2번째 다윗, 그리고 세 번째 압살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초대왕 사울과 스스로 왕이라 칭한 압살롬은 공통점으로 외모가 수려했습니다. 사울은 머리가 한 더 크고 장대한 왕이었습니다. 압살롬도 수려한 용모로 사랑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아버지가 왕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조건의 부모는 없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질투심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인기를 질투했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왕이 자기 부하를 질투합니다. 압살롬은 위대한 왕인 아버지를 이겨보고 싶었습니다. 왕의 권력을 질투했습니다. 그래서 누구 보다 뛰어나고 누구보다 수려한 이 두 사람은 실패한 왕으로 걸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습니다. 이새의 막내아들로 양이나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당시 목동은 환영받는 직종이 아니었습니다. 권력도 줄도, 힘도 능력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10년을 도망 다니면서 미친 척도 해야 하고, 굶기도 하면서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 넘깁니다. 하지만 앞의 두 사람과 다른 것은 그 시간동안 남을 질투하거나 자신의 조건을 탓한 것이 아니라 본질, 즉 하나님을 찾기에 쉬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이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 아픔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시 찾아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아픔에 고정될 때 나의 뜻이 기준으로 되어 버립니다. 결국 내가 뜻한 틀에 예수님을 맞추어서 이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게 됩니다. 나의 틀이 본질을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전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제 가슴을 적시는 구절이 있습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 가운데에서 보시고와 아시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장애인이 보기 전에 먼저 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애인과 대화하기 전에 먼저 아셨습니다. 이 말씀에 그렇게 위로가 됩니다. 나보다 나를 먼저 보신 주님, 나보다 나를 먼저 아신 주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문제 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십시오” 문제보다 더 큰 은혜.. 제대로 믿지 못하고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그 아픔을 아시고 찾아오셔서 만져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을 간구합니다.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서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어떤 주부가 쓴 〈당신은 저의 고향입니다〉 라는 글입니다. (좋은생각 2000년 5월호) 

첫 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던 순간부터 나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그리고 남편의 통곡 소리와 함께 아이가 세상을 떠나던 날, 나는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다가 입술이 터지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그때 내겐 이대로 한 줌 재가 되어 아들 곁에 뿌려지리라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즈음, 언제 오셨는지 아버지께서 내 앞에 서 계셨고, 누워 있는 나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슬이 채 걷히기도 전에 친정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나를 방에 들게 하고 잠시 나가시더니 약사발을 들고 들어오셨다.

보약이다. 너 오믄 멕일라구 밤새 다려 논겨. 어여 마셔라.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어찌 보약을 먹으라는지 아버지가 야속했다. 나는 앞 뒤 생각도 않고 약사발을 거세게 밀쳐 냈다. 약사발은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버지는 버럭 역정을 내셨다. 왜 이러는 거여! 너도 니 아들 따라 죽을껴? 너한티 그 놈이 가슴 애리고 기맥힌 자식이믄 이 애비한티는 니가 그런 자식이란 말여. 이 애비 맘을 그렇게도 모르겠는겨?
아버지의 목소리는 젖어 들고 있었다. 

아! 자식이 짊어진 고통의 무게만큼 당신도 함께 그 고통을 겪고 계셨구나. 나는 아버지의 무릎 위에 무너지듯 쓰러져 끝도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아이를 보낼 때에도 모든게 내 죄인 듯 싶어 한방울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나는, 아버지 앞에서 오래도록 목놓아 울었다.
그날부터 나는 얼마 간 잠만 잤는데, 잠결에도 군불 지피는 아버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아버지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나를 일으켜 벽에 기대 앉혀 놓고 때마다 정성껏 달인 보약과, 밥을 먹이셨다. 그리고 내 입에 밥술을 떠 넣으실 적마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듯 똑같은 말씀을 나지막이 중얼거리셨다.
너무 애달파 말그라. 시상엔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게 있는 겨. 그 간 자식 살리겄다고 월매나 애간장이 탔겄냐. 얼렁 세월이 흘러야 니 맘이 편해질 것인디. 얼렁 얼렁.

아버지는 그렇게 슬픔 속으로만 빠져드는 나를 붙들어 따뜻이 보듬으셨다. 늘 변함없는 자상함으로 자식들의 울타리가 되고 지친 우리들의 편안한 쉼터가 돼 주셨던 아버지. 당신은 저의 영원한 고향이십니다. (김순태 님: 대전시 대덕구 법동)

자식의 죽음 앞에서 오열 합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이럴 때 한 마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고통스러웠는데 친정 아버지는 아무 말 않고 딸을 데리고 와서는 약을 먹이고 쉼을 줍니다. 이것이 아버지 아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내가 수 없이 많은 아픔속에서 방황합니다. 그리고 힘들어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 뜻 밖에 계십니다. 아니 더 큰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뜻 밖의 만남을 이루어 주십니다. 바로 다 보시고 다 아시면서 나를 감싸주십니다. 우리의 아픔이 있으십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보혈의 피와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분의 몸을 통하여 온전케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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