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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거라, 청년들아! (눅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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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청년들아! (눅 10:1-6)


[이 일이 있은 뒤에, 주님께서는 다른 일흔<두> 사람을 세우셔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거기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 백수 철학

긴 휴일이 지난 후 맞이하는 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빕니다. 또한 중부 지방에 내린 큰 비로 피해를 입으신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한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 하루 종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백수가 된 기분으로 지냈습니다. 종일 편안한 옷을 입고 책도 보고 음악도 듣노라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물론 교회에 비가 새지는 않는지 염려가 되었지만, 오 집사님이 곳곳을 잘 살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심하고 지냈습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청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청년 실업이니 중년 실업이니 하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는 판에 저는 백수처럼 지냈다고 은근히 자랑질을 했습니다. 이 단어는 당사자들에게는 무력감과 우울함까지 자아내는 단어입니다. 대학을 졸업한다 해도 대기업은 고사하고 정규직 일자리를 얻기도 어려운 판입니다. 눈높이를 낮추면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은 왠지 루저가 되는 것 같아서인지 꺼림칙해 합니다. 

세계화라는 말로 요약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이미 실패로 판명 되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자본이 만들어놓은 질서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소수이고, 나머지는 열패감을 간직한 채 살아갑니다. 마치 진액이 다 빠져나간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얼마 전 벼에 생긴 백수현상白穗現象에 대한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삭도열병이나 강풍에 의해 벼의 수분이 다 빠지고 이삭이 쭉정이로 변하는 현상을 일컫는 표현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런 백수가 되면 안 됩니다.

경쟁에서 졌다고 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쟁의 쳇바퀴에서 자발적으로 내려온 이들이 훨씬 더 큰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다른 삶의 가능성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제 신학교 선배 중에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백수를 자처하며 유유자적하며 삽니다. 몇 해 전 그는 자기 삶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또 남들에게 변명도 할 겸해서 ‘백수를 논함’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볼 때마다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백수는 루저는커녕 도인이라 할 만합니다. 그 논지를 다 따라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몇 가지 성찰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백수는 “뜻은 높이하고 마음은 너그럽게 하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우주를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지되 나를 버릴 수 있는 맑은 마음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겨우 먹고 사는 문제, 집 장만하는 문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이들에게 그가 말하는 ‘우주를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은 매우 허황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툭 터지고 나면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는 백수가 살아가는 법도 간결하게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백수는 번거로움을 피하되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만나면 최선을 다하고, 인정에 얽매이지 않되 나의 도움을 구하는 자가 있다면 힘을 다해 도와야 한다.” 백수는 자유인이어서 번거로운 일에 끼어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실도피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언제라도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백수로 살기 위해서는 삶이 청빈해야 합니다.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고상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일상사와 살림살이를 지극히 간소하게 하는 것입니다.

• 추수할 일꾼

자, 그런데 문제는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꿈결에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듯이, 세상 사람들의 관습과 행복의 신화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대는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느라 허덕이지 않으려면 ‘다른 북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건 하늘의 북소리입니다. 예수님은 참 멋진 고수鼓手입니다. 예수가 치는 하늘 북소리를 들은 이들은 대개 옛 삶의 인력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났으니 말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도,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도, 변혁에의 의지로 꿈틀대던 열심당원도, ‘나를 따라 오너라’ 부르시는 주님의 북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면 인생은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갈 곳을 분명히 알고 갈 때 인생은 소명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인류의 가슴에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종교가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소중히 여김을 받는 세상의 꿈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이 없었지만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선물이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음습한 마음의 상처는 치유해주시고, 넋이 빠진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사람이 돈과 권력 앞에서,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려는 그의 꿈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잇대어 사는 이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유의 길로 이끌기보다는 예속의 길로 이끄는 종교로부터도 사람들을 해방하셨습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10년 이내에 망하거나 죽거나 자식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부정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많은 이들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을 ‘복’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는 진짜 복은 서로를 귀중하게 여기고, 섬기기 위해 몸을 낮추고, 어려운 이를 잘 돌보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세상을 가리켜 보이는데, 지금의 기독교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치 애굽을 떠나온 탈출 공동체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자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슬그머니 옛 삶을 향해 돌아서고 있습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2)

저는 지금 주님의 이 탄식소리를 아주 생생하게 듣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일꾼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병들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 또 삶의 지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치유하고, 마음의 눈을 뜨게 하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일을 다 해낼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청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적습니다. 하지만 천년의 어둠도 촛불 한 자루가 밝혀지는 순간 물러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의 뿌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처럼 교만한 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어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내 짐도 무거워 비틀거리는 판에, 어찌 다른 이들의 사정에 눈을 돌릴 수 있겠냐며 지레 손사레를 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 몸을 굽히는 순간 우리 어깨를 짓누르던 비애가 사라질 때가 많습니다. 자기 초월이 일어날 때, 전혀 다른 차원에서 공급되는 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생명의 신비이고, 신앙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과학적으로도 입증됩니다. 뇌파를 연구하는 이들은 우리 마음이 긍정적인 상태에 있거나 남을 배려할 때 뇌에서 알파파가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 파동은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수용력과 집중력을 증대시킨다고 말합니다. 너를 살리는 게 나를 살리는 길이라는 게 빈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터에 있다고 하여 늘 기쁜 것은 아닙니다. 회의가 찾아와 달아나고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동료를 주십니다. 서로를 감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명을 일깨워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라는 것일 겁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누군가가 함께 있으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전도서의 기자도 그런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4:9-12) 

교회 공동체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 순례 여정의 길벗들입니다. 시인인 고진하 목사가 여러 해 전 홍천에 있으면서 썼던 시가 생각납니다. 그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마을길을 걷다가 쟁기질하고 있는 양순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의 눈은 절로 멍에를 함께 멘 겨릿소에게로 향했습니다. 소들도 힘이 드는지 왕방울 같은 두 눈을 꿈벅꿈벅 마주치면서도 산비탈 비탈밭을 단숨에 갈아엎었습니다. 

그 광경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던 시인은 문득 마음에 한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독자들에게 전합니다. “네 시린 등짝에 얹힌 멍에 무거워 괴로울 땐,//홍천 땅 늙은 양순 애비/두 마리 소에 빛나는 쟁기를 메워 돌 많은/황톳빛 산비알 밭을 갈던 땀 밴 풍경을 그려보아라”(고진하, <파릇파릇한 쟁기질>).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 동료도 함께 주십니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그 동료는 때가 되면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 평화의 일꾼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여벌로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물론 과제의 긴급성을 암시하는 말씀이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도 귀한 교훈이 됩니다. 이 말의 속뜻을 저는 주님의 일은 돈이나 치밀한 계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새깁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인천에서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서영남 씨는 아무 대책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자발적인 후원에 의지하여 노숙자들을 위한 밥을 짓습니다. 그야말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입니다. 내일 밥 지을 돈이 생길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밥을 못 지은 적이 없습니다. 밥을 못 짓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맡길 뿐입니다.

이런 일은 주먹구구처럼 보입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검토까지 마쳐야 비로소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지시를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일은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무력해져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 절실하게 원하게 되고, 이웃의 선의를 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경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삶의 방식은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길로 삼고 걸어가는 이들은 마이너리티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류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주류적 가치에 틈을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입니다. 경쟁과 폭력이 정상이 된 세상에 협동과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들입니다. 평화 없는 세상에 사느라 지친 이들에게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이들입니다. 

덜 먹고, 덜 화려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우리 앞에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스스로를 social designer라 칭하는 박원순 변호사는 청년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1천 가지 직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잘 먹고 잘 사는 게 인생의 목표일 필요는 없지 않냐면서, 주체적인 영혼으로 살아갈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대기업, PD, 기자, 공무원 등을 red ocean이라고 말하는 그는 blue ocean에 눈을 돌리자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블루 오션은 비영리단체,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녹색 산업,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 농촌 살리기 등입니다. 한결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직업들입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눈여겨보아야 할 하나님의 선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일터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런 일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참 뿌듯합니다. 생명과 평화의 새 세상을 열어가려는 주님의 꿈에 동참하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청년들만의 사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이 모든 청년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될 세상에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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