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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과 하나님의 거래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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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하나님의 거래 (창 28:10-22)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도망자의 신세로 고향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정처할 곳이 없어 돌베개 베고 노숙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우리 의지가 전혀 작용할 수 없는 꿈속에서 하나님은 먼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먼저 찾아오시고, 예기치 않은 때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16절에서처럼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하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이 만남은 야곱의 인생의 전환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 이 만남 때문에 야곱의 인생이 결정적 전환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자기 야망을 좇아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복의 도구가 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밧단아람에서 보낸 20년의 세월은 무의미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야곱은 섣부른 결정을 하고 그곳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삼촌 라반이 열 번이나 속이고 자신을 이용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가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20년은 야곱에게 인격적 연단의 시간이 되었고, 가정과 물질적 기반을 이루어 복의 근원으로서 합당한 그릇이 되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는 이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당시 가장 강성했던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했던 것은 어느 날 청년의 때 꾸었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엎드려 절하는 꿈을 꾸고 난 연후였습니다. 일개 목동이었던 다윗을 한 나라의 목자가 되는 꾸는 꿈을 꾸게 했던 것은 하나님이 보낸 사자 사무엘이 그 인생에 갑작스럽게 찾아와 그의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어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던 베드로를 2천년 교회사에 빛나는 사도요 로마 1대 교황의 자리에 올렸던 것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야망을 좇아서 권력을 사람을 죽이는 데 쓰던 바울을 땅끝까지 이르러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도구로 만들었던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환한 빛으로 그를 급습하듯 찾아오셨던 예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인생이 변화됩니다. 이런 결정적 만남은 아닐지라도 우리 모두는 내 인생을 변화시켜줄 누군가를, 아니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낸 책 제목을 <뜻밖의 초대>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 책 이름 때문에 끌렸다는 평들을 많이 썼습니다. 사람들이 뜻밖의 만남을 좋아하거나 기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는 지금 사는 인생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알겠는데 정작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 인생을 바꿀 그럴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아니면 어떤 무엇인가가 자기 인생을 낚아채듯 그렇게 채어갔으면 하는 기대심리가 있습니다. 

또한 뜻밖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활력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그런 삶이라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삶의 일탈을 꿈꾸고 막연한 기다림에 대한 그런 기대가 우리에게 희망이란 요소를 만들어내고 삶의 건조함과 무력감을 이기게 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복권 한 장을 들고 1등 당첨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흐의 그림 중에 ‘복권 판매소 풍경’이 있습니다. 비오는 날 아침, 수많은 사람들이 복권 판매소 앞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한 노파들이었는데 복권 가게 앞에 뒷모습만 보인 채 서 있는 그림입니다. 복권을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불건전하다느니 요행수니 하는 핀잔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삶의 현실, 그리고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그런 현실에서 복권이란 것은 단번에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입니다. 아무리 확률이 적다할지라도 그들은 그곳에서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고흐 자신도 동생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그들의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권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음식을 사는 데 썼어야 할 돈,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샀을지도 모르는 복권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고통과 쓸쓸한 노력을 생각해 보렴”

성격은 다르지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이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하나님의 임재나 능력에 의해서 내 삶이 바뀌고, 내 인생에 뚜렷한 목표가 생길 것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명확히 길을 제시해 주시던가 아니면 강제로 이끌어 가시던가. 금요기도회에서 우리는 항상 성령충만과 성령임재를 놓고 기도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능력과 스스로의 결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 하나님의 때, 인간의 무능력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간절한 기대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복권처럼 확률이 8백만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희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복권은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 편에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요인이 하나님의 임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의 하나님의 축복을 향한 열정입니다. 그 열정 때문에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결국은 고향을 떠나야 하는 불운을 맛보았지만 어쨌든 그의 열정이 결국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되 열정적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열정이라는 것은 결단과 행동이 수반되는 것이고 그런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에디슨이 ‘천재는 99%의 땀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99%의 땀보다 더 중요한 것은 1%의 영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영감이 떠오르면서 우리는 일의 성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1%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99%의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의 영감은 99%의 땀을 흘린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는 자는 부지런히 순종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야곱이 빈 그릇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인생이 무엇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 야망과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비워져 버린 순간입니다. 축복은 받았지만 쫓겨가는 신세, 거처가 없어 노숙해야 하는 그 신세,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이 정도 가지고 비웠다고 하는가?’ 하고 반문할 분도 있지만 비움은 상대적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비워진 순간입니다. 

야곱이 또 한 번 하나님을 만난 때가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얍복강에 섰을 때였습니다. 형 에서의 위협 앞에 그동안 쌓았던 모든 재산과 가족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상실의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야곱은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외롭고 곤고한 순간,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고 느끼는 순간 어쩌면 그때가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때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열정과 비움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야곱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과 보호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13, 14절과 15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14절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비전과 축복의 말씀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땅의 약속입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자손의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의 근원의 약속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한 야곱의 눈물겨운 투쟁이 드디어 하나님으로부터 최종 인정을 받는 순간입니다. 복은 이처럼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욕심을 내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욕심을 내는 자에게 그 축복이 주어집니다. 잘못되지 않은 거라면 마음껏 욕심을 내십시오.

야곱과 하나님의 만남에서 더 특별한 것은 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먼 길을 떠나는 야곱에게 특별히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에도 세 가지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둘째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지켜 주겠다. 셋째는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는 20절과 21절의 야곱의 서원 기도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군대나 세력이나 재물을 주시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에 통장을 쥐어주시기보다 자기 가신을 주십니다. 가장 강력한 약속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야 할 사명 앞에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주셨던 말씀은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는 말씀이었습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온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 또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그 뜻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만큼 잘 표현하고 있는 것도 드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추억해 보니 그 때는 자기가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섭섭한 마음이 든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 때, 늘 저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는 왜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는 거예요. 왜 제일 힘든 순간에는 저를 버리셨나요?”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이여, 나는 너를 결코 버려둔 적이 없다. 시련과 고통을 겪는 그 순간에 네가 본 그 발자국은 바로 너를 업고 걸었던 내 것이란다.”

우리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런데 <모래 위의 발자국> 2탄이 나왔습니다. 한결 업그레이드 된 버전입니다.

그 사람이 다시 꿈속에서 모래사장에 있는 발자국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에 발자국은 여전히 한 짝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발자국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 정말 저 때문에 업고 걸으시느라 많이 힘드셨군요. 죄송해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래 그때는 정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치던 때였지”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진 발자국은 지그재그로 더 엉망이 된 두 짝의 발자국이었습니다. “이건 왜 그런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기억 못하는구나. 그때는 우리가 함께 춤을 춰서 발자국이 저 모양이란다.” 함께 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통의 순간뿐만 아니라 기쁨의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너를 지키겠다는 약속입니다.

곁에 있으면서 지켜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고, 굶주림의 위기에서 구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시편 23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늑대나 절벽의 위험이 있지만 양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재물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가정에서야 지킨다고 하지만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지킨다고 하지만 그 영혼을 무엇이 노략질할지 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되 완전하게 지키십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121:7) 

야곱은 20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라고 하여 기본적인 삶의 위기에서 지켜줄 것을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모든 염려에서 해방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 하나님은 우리를 굶기시지 않습니다. 요즘 굶어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굶어죽을 것 같아 염려하다 죽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먹이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20년 후에 밧단아람에서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가 나올 때 두 아내와 열두 아들 그리고 수많은 양떼와 소떼와 노비들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셨습니다. 야곱보다 더 이기적이고 사기꾼인 라반의 손에서 야곱의 목숨을 구하고 그를 물질적으로 부하게 하셨던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셋째는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아마 야곱이 가장 간절히 원했던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35장에서 실현이 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머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벧엘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창35:6-7)

하나님은 충실히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 약속의 실현은 곧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졌던 희망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AD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하고 근 2천년 동안 방랑 생활을 했지만 그들은 그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낼 것을 믿었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야곱의 개인사는 단지 한 개인의 인생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은 이런 안전과 무사 귀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런 약속을 받았을 때 우리 같으면 꿈에서 깨자마자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과 거래를 합니다. 아무리 은혜 받아도 인간성이 변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20절 이하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조건을 겁니다. 영어로 If 절입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조건절입니다. 20절과 21절이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약속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이 약속을 지키시면 다음과 같이 행하겠다고 합니다. 세 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이 게 맞는 거래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이런 것 같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보고 당신을 예배할지 안할지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서원은 참 어린애 같은 서원이라 할 것입니다. 당신이 확실히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보고 난 후에는 이렇게 당신을 대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런 거래도 허락하십니다. 사실 우리 신앙이란 것이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듯한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당신이 복을 주시면 믿겠다는 것이고, 당신이 사인을 보여주시면 따르겠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거래한다는 것은 그래도 이미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입닏.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과 거래 한 번 해 보십시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신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나를 최고의 부자로, 아니면 최고의 자리로, 아니면 이 일에 성공을 주시면 이렇게 살겠습니다하며 서원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냥 속으로만 하지 말고 심각하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거래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야곱의 위대한 점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서원 기도를 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인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행동을 서원의 형태로 말했다는 점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 서원대로 이루어졌고 그 또한 그 서원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입니다. 그것이 조건부이든 아니면 헌신에서 나온 서원이든 우리 일생에서 서원은 필요합니다. 

서원이 없는 신앙은 곧 결단이 없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삶에서 아니면 어떤 헌신 한 번 없이 그저 미적지근한 관계로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한나는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평생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서원이 있으므로 머리를 깎았다고 하였습니다. 서원이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거나 무엇을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주신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서원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서원을 하고 나면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셔서 그 서원을 이루어지도록 만드십니다. 창세기 31장 13절입니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이 때는 밧단아람에서 2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은 후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서원을 기억하셨다가 그대로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서원을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서원까지 했습니다. 십일조의 서원입니다. 목숨을 살려주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만 이루어진다면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아도 결코 손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계산이 빠른 야곱은 이 순간에 십분의 일만 내어놓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우습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은 이 거래 또한 받아들입니다. 신앙적으로야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는 모든 것이 자기 피땀으로 벌은 것 같고, 그래서 내어놓기가 아깝습니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어떤 서원도 할 수 있지만 막상 위기가 지나고 어느 정도 부요함을 얻은 후에는 이 약속을 지키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서원을 물질의 형태로 고백을 하였습니다. 물질이 가는 곳에 우리 마음도 갑니다. 자신의 헌신과 손해가 동반된 서원이 진짜 유효한 서원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내어놓음으로써 우리 서원에 대한 공고한 의지를 밝힙니다. 하나님 또한 이 물질에 대한 서원을 통하여 우리 의지를 확인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서원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서원을 기뻐 받으시고 그 서원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서원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결심과 헌신을 표현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작은 서원일지라도 그 헌신에 100배로 보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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