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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 축복의 장막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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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축복의 장막 (창 16:1-16)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3)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였습니다.(창12:4) 이후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후사를 주시겠다.’고 거듭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13:15-16)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창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런데 이 약속이 10년이 지나도 이루질 징조가 보이지 않자 사라는 믿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들처럼 젊은 나이도 아닌지라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조급해졌습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 하셨으니..” 라며 후사가 없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이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방법을 제안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고대 근동의 관습 중 하나가 족장이나 부호(富豪)와 같은 상류 계층에선 부부간에 자식이 없을 경우, 아내가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 태어난 아기는 여종이 아니라 주인 아내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라의 제의는 분명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어긋나는 철저히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한마디 반론도 제기하지 않은 채 받아들였습니다.(창16:2) 사실 하갈이 비록 몸종이지만 한 인격체입니다. 그런데 종이라 해서 ‘씨받이’(생산수단)로 삼고자 한 것은 반(反)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큰 실수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갈은 ‘씨받이’일지라도 자녀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신이 잉태함을 알고는 그 여주인 사라를 ‘하찮게 여겨 깔보았습니다.’ 주인의 자식을 잉태하다보니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주인이 쉽게 보여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이를 받아줄 리 없습니다.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불만을 터트립니다. 

(창16:5)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라가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고 한 말은 ‘모두 당신 잘못이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의 거만한 태도는 남편 아브라함의 태도가 분명치 않은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제안에서 남편이 따른 것인데 그 모든 책임을 남편에 떠넘긴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 전가(轉嫁) 성향은 범죄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로부터 비롯된 인간의 치부(恥部)이기도 합니다.(창3:12-13) 

인간의 죄의 유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하여 시비를 가려달라는 아내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창16:6)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며 무책임하게도 사라에게 모든 것을 위임합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여주인인 사라는 하갈을 종으로 되돌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의 자식을 잉태함에 따라 종의 신분에서 ‘첩’으로 신분상승되었지만 다시 종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라는 ‘좋을 대로 하라’는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갈을 종으로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주인으로서 지금까지 당한 멸시에 대해 보복한 것입니다. 결국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하갈은 주인의 학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억울했습니다. 굴종하며 살기에는 그의 피가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멀리 광야로 나갑니다. 학대를 견디며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광야의 자유가 낫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태중의 자식이 받을 냉대가 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광야는 임신한 여인이 견뎌내기에는 너무 가혹한 곳이었습니다. 길 가에 있던 샘터에서 하갈은 절망감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사라의 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나의 여주인 사라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라.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창16:9-10) 

너무나 간명하고 단호한 권고입니다. 비록 사라의 학대를 피해 달아날지라도 여전히 그녀는 ‘사라의 여종’임을 상기시켜 주는 말입니다. 종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주인으로부터 사면을 받아야만 합니다. 도망친다고 결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가정을 떠난다고 해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축복의 장막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에게 주인에게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여주인 사라의 학대가 아무리 심할지라도 돌아가 참고 온순하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한 축복의 장막에 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으로 돌아갈 때 크게 번성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돌아가기를 주저하자 사자(使者)가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창16:11)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스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신 분으로,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 하갈과 함께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일을 저질러 고통의 씨앗을 뿌린 자는 아브라함인데 그 뒷수습을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갈의 가슴에 희망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 그 후손들의 삶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16:12입니다.

(창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들나귀’는 들에서 자유로이 뛰노는 나귀로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 나귀’를 의미합니다. 이 예언은 30세기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정착 생활을 단념하고 문명 생활을 멸시하면서, 약대나 말을 타고 창을 든 채 광활한 자연을 마음껏 누비면서 난폭하고 거칠게 살아가는, 베두인(Bedouin)계 아랍족들 및 사라센(Saracens) 족들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라는 예언은 이스마엘 자손의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 이웃 족속들과 반목질시하며 살아가게 될 것을 뜻합니다. 

이 예언대로 그들 후손들인 아랍 여러 족속들은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사막 등을 방랑하면서 이민족을 침공,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창25:12-16) 그리고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사는 가나안 땅의 면전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데스와 수에즈 운하, 홍해 사이의 광대한 사막 지역에 거주하게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과연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축복의 장막인 아브라함의 언약 가운데 복종하며 살았겠습니까? 이스마엘과 그의 자손들이 누구와 결혼해서 어디에서 살았는가를 알면 축복의 장막 아래 살았는지, 그 장막에서 벗어나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25:12-18에서 이스마엘의 족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25:12-18)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 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 이 방백이었더라. 이스마엘은 향년이 일백 삼십 칠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하윌라에서 술까지 통하는 지역’은 애굽 국경 부근(Near the border of Egyp)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애굽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이스마엘의 모친인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기 때문에 그들 자손들은 자연히 애굽 국경 부근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왜 축복의 장막 아브라함을 떠나 살게 되었겠습니까? 하갈이 사라에게 돌아가 이스마엘을 낳고, 14년 후 약속의 자손 이삭이 출생했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즉 3살이 되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장난기 섞인 단순한 희롱이 아니라 17세나 된 이스마엘이 적자(嫡子)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멸시하고 핍박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마침 목격한 사라가 가만 놔 둘리 없었습니다.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며 당장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창21:10) 고 말합니다. 

하갈을 ‘여종’이라 부른 것은 종의 자식이 주인의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축복의 장막인 아브라함 아래 함께 살 수는 있을지라도 상속자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비록 종의 자식이라도 또한 아브라함의 분명한 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내쫓아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지니고 있던 모든 권리와 관계를 깨끗이 제거시키라는 것입니다. 사라의 강력한 요구에 아브라함이 매우 근심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창21:12-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결국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을 떠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친정집과도 같은 애굽 가까이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국경 부근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 하갈이 아들을 위해 애굽 여인을 아내로 얻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창21: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하갈 자신이 애굽 여인으로, 애굽이 고향이었고, 그래서 애굽 가까이에서 살았으며 자신과 같은 애굽 여인을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들 이스마엘 자손들이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창25:18-they lived in hostility toward all their brothers)는 말씀은 이스마엘은 그의 형제들과 적대적 관계로 살 것이고 그의 후손들 역시 이삭의 후손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인데 그 예언대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83:4-8)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라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장래를 예언한 말씀,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16:12) 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이 이삭의 후손들을 대적하여 살았다는 것은 축복의 장막인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창12:1-3)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장막에 살아야 복을 받게 됩니다. 하갈은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의 소행을 크게 책망하며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추방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임을 시인함으로 언약의 복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이 자신이 낳은 아이지만 분명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사라의 자녀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과거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녀를 잉태하자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고, 사라의 미움을 받아 학대를 받자 견디지 못하고 도망했던 것처럼, 이스마엘이 이삭을 멸시한 일로 쫓겨나게 되자 별 반응 없이 그 장막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아무리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할지라도’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살았어야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갈이 비록 종이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아브라함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로 언약을 상속할 언약 상속자는 아니지만, 아브라함에게 속한 종의 자녀이기 때문에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종과 종의 자녀이지만 아브라함에게 속한 복이 그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거할 때, 즉 아브라함의 장막에 있을 때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창13:5-6)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할 정도로’ 축복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서로 다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롯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한 마디로 화목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가장 좋은 곳으로 보인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분가했습니다. 

그러나 소돔성이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롯도 사로잡혀 갔고 그 모든 재물까지도 약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잘 훈련된 318명의 종을 이끌고 끝까지 추적해서 조카 롯과 약탈당한 모든 재물들을 찾아왔습니다. 롯은 이러한 환난을 당했으면 그 원인을 깨닫고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했어야 함에도 그는 소돔성에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롯은 소돔성이 유황불 심판으로 멸망당해 모든 것을 잃고 겨우 목숨만 건지게 됩니다. 롯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구하신 것입니다.

(창 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마찬가지로 하갈과 이스마엘 자손들도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할 때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종의 신분으로 사라에게 끝까지 복종하며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할 때만 언약의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3.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고,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 사라에게서 낳은 이삭입니다. 여종에게서 낳은 아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라 부르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을 ‘약속의 자녀’,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부릅니다.(갈4:21-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의 장막,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장막에 거하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비록 하갈의 후손들일지라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갈라디아서3:6-9입니다.

(갈3: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난 하갈과 그 후손들처럼,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자들로 하나님의 축복 밖에 있는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을 때, 그 이삭과 언약을 세워 그 후손, 즉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사람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창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갈은 주인 사라에게 돌아가 복종하므로 섬길 때에만 아브라함의 언약, 축복의 장막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종의 위치에서 축복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자유 하는 자의 자손으로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차별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종의 자식이 아니라 자유 하는 자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이제 종의 위치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종과 주인의 차별이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누구나 차별 없이 아브라함의 복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빈부귀천,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은 농사꾼이 아니었음에도 농사하자 백배나 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창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블레셋 땅에 거주할 때, 이삭이 날로 창대해지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시기하여 생명줄 같은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버리고 추방했습니다.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우물파고 샘물이 터지자 또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리고 쫓아냈습니다. 이삭은 또 다른 곳에 우물을 파고 물이 넘치자 그곳 그랄 목자들이 자기 것이라고 우겨 다투게 되자 또 다른 곳으로 옮겨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바로 그 밤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창26:24)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그랄 지역 사람들이 아무리 우물을 메우고 쫓아내도 그러할수록 이삭이 더욱 더 번성하고 창대하게 되자, 블레셋 왕이 군사령관을 대동하고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이삭이 ‘당신들이 나를 미워하여 이렇게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에게 왔습니까?’ 하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그대 사이에 평화조약 맺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가 그대를 건드리지 않고, 그대를 잘 대하겠으니 그대도 우리를 해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분명히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삭이 그들의 요구대로 화친조약을 수락하자 그들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창26:12-33) 바로 이렇게 어디에 우물을 파도 샘물이 터져 나오는 복을 받게 되는 이유가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이 살던 나오미가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약속의 땅’을 벗어나 모압 지방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동네 아낙네들이 알아보고 ‘이게 정말 나오미가 아닌가?’ 하고 떠들썩하자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룻1:20-21)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이고 ‘마라’는 ‘괴로움’, ‘쓰다’는 의미입니다. ‘기쁨의 인생’이 약속의 땅 베들레험을 떠났더니 ‘괴롭고 쓰디 쓴 인생’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애굽의 경호대장 보디발 가정에 종이 되었습니다. 주인되는 보디발이 요셉을 볼 때 그는 비록 종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고, 또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고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요셉에게 주관하게 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해 애굽 사람일지라도 그 집에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창세기39:5입니다.

(창39: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이 바로 약속의 자손이기 때문에 그가 주관하게 될 때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보디발 가정은 축복의 장막에 거하므로 복을 받아 형통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며 약속의 말씀 가운데 삶으로 ‘아브라함, 축복의 장막’에 거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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