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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게르솜! (출 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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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게르솜! (출 2:11-22) 
  

어떤 사람이 오랜만에 단골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인테리어도 달라지고 종업원들도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웬일인가 싶어 종업원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 식당 갑자기 싹 달라졌네요. 무슨 바람이 불었나 ... ?” 그러자 종업원이 별 일이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주인이 바뀌면 싹 달라집니다.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본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히 멸망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신앙생활은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1] 신앙의 본질 : 하나님의 주권 존중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주권(主權 Lordship)이란 ‘주인됨’을 의미합니다. 과연 누가 주인이냐 하는 겁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주만물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게 신앙의 출발이며 본질입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신앙인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시24: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하나님이 만물과 만인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2:6~7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뤄진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실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세상만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뤄진다는 겁니다. 

장로교회의 창설자인 쟝 칼뱅의 신학 사상 즉 칼빈주의(Calvinism)의 핵심은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입니다. 성경을 가장 잘 요약한 것으로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 살면서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이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갖게 된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에 인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그어놓은 게 바로 선악과 계명입니다.(창2:16~17) 이를 신학에서 ‘창조 언약’이라 말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었죠. 그 중에 생명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고, 선악과는 따먹을 수 없다는 한계를 정해놓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범죄와 타락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뱀(사단)이 유혹할 때 결정적으로 여자가 넘어간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주권을 넘본 겁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인생의 온갖 고통과 영원한 사망)이 여기서 기인합니다. 

그런 사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 아닙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탑을 높이 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흩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언어의 혼잡이 생긴 것 아닙니까? 외국어 공부하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신앙은 본래 주인인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겁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고, 그 죄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아버지로 모시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성숙도입니다. 신앙이 미성숙할 때는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행동합니다. 그러다 다급해지면 마치 심부름 시키듯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런 모습은 아주 미숙한 어린 아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이런 미숙한 신앙인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으로 앞장서시는 분이지 인간의 뒤를 따라가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컨트럴(control)하시지 인간에게 컨트럴(control) 당하지 않습니다. 가장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고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들일수록 신앙이 성숙해지도록 변화시켜 가십니다. 이게 바로 연단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예외 없이 이 연단의 과정을 다 거쳤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기왕에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과정은 불편하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신앙의 정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일단 신앙의 정상에 올라서면 내리막길처럼 인생이 아주 쉬워집니다. 이게 바로 형통의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누가 나오죠? 모세! 모세도 마찬가지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시간 그 과정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으로 성숙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습니다.(신34:7) 흥미롭게도 그의 120년 생애는 40년씩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 D. L. 무디는 이 세 단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40년 동안은 모세가 스스로 대단한 인물인(I'm somebody.)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굽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서 당대의 최고 학문을 공부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얼마나 프라이드가 대단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모습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미숙한 신앙의 단계입니다. 잠시 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죠?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광야로 망명합니다. 애굽의 왕자가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겁니다. 이 두 번째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던 모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것(I'm nobody.)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끌고 엄청난 기적의 역사를 연출합니다. 이때 모세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I'm God's body.)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가장 성숙한 신앙입니다. 내가 대단한 줄 아는 것은 착각이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줄 아는 것은 오해요,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 붙잡히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2] 미성숙한 신앙 : ‘나’ 중심의 신앙   

모세는 처음 40년 동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는 신앙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말하자면 ‘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최고의 부귀와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러다 보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신앙 상태를 짐작하게 해 주는 사건이 본문에 나옵니다. 

11절~12절.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그는 어려서 어머니 요게벳의 품안에서 자랐습니다. 공주의 양자인 모세를 길러주는 유모로 채용됐었죠. 보나마나 모세에게 신앙심과 애국심을 심어줬을 겁니다. 모세는 이렇게 해서 신앙인이 된 겁니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가운데 자기 능력으로 뭔가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피러 궁궐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다 애굽 감독관이 강제 노동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화가 난 모세는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암매장을 합니다. 

이때의 모세의 신앙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행7:22~23,25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자기가 뭔가 하려는 모세의 교만한 모습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모세의 착각이 산산이 깨지고 맙니다. 13절~15절.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 ”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다 오히려 코너에 몰리자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방법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의 추격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물론 단순히 이 사건만으로 그가 도망자가 된 건 아닐 겁니다. 명색이 애굽의 왕자인데 일개 감독관 한 명을 죽였다고 그 시대에 문제가 됐겠습니까? 그렇게 된 데에는 애굽 궁궐 내부의 권력 투쟁이 한 몫을 했을 겁니다. 바로의 공주 즉 모세의 양어머니는 ‘하셉수트’(Hashepsut)로 무남독녀입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 ‘투트모스 2세’(Thutmose II)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모세를 양자로 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남편과 궁녀 사이에 아들 즉 서자가 태어나는데, 다음 바로 왕이 됩니다. 그가 당시 왕인 ‘투트모스 2세’(Thutmose II)입니다. 하셉수트가 마음만 달리 먹으면 모세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 왕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모세가 눈엣가시죠. 그래서 이런 계기에 애굽 대 이스라엘 민족 문제로 비화시켜 모세를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어쨌든 이건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 결과 모세는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하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이런 신앙 자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생각을 주장하고, 내 방법을 행사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연단 : 미디안 광야 훈련

바로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모세는 이제 미디안 광야로 피신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연단이 시작됩니다. 

15절(하). “...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도망자 모세의 한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때부터 간섭하십니다. 모세가 우물가에 앉아 있는데, 때마침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러 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횡포를 부리자 의분을 느낀 모세가 그들을 쫓아내고 르우엘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잘 도와줍니다. 집에 돌아간 딸들이 아버지에게 이런 사연을 말했고, 모세는 그 집으로 초청됩니다. 르우엘이 모세를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모세로서는 얼씨구나 했죠. 

21절~22절. “21 모세가 그(르우엘)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가 르우엘의 집에서 살면서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뭐라고 지었나요? 게르솜! 무슨 뜻인가요?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이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런 뜻이죠. 그의 고난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그의 신앙은 정금처럼 연단하신 겁니다. 욥이 극한 시련 가운데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시편기자도 고난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죠.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제머대로 살았는데 고난을 통해 연단됨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신앙인에게 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을 하는 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다! 이런 자기 부인이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을 보내면서 자기 교만, 자기 고집, 자기 욕심, 자기 방법, ... 모든 게 깨짐을 경험합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내려놓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으로 가는 계단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실패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뜻이다.”(로버트 슐러) 

캐나다 록키산맥에 무릎 꿇은 나무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폭풍우를 견뎌내며 자라온 나무인데, 마치 무릎 꿇은 것처럼 순종하는 자세로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나무가 명품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련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훈련을 받으면 멋진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4] 성숙한 신앙 : 하나님 중심의 신앙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 그러니까 모세가 80세가 됐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인으로 일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모세가 정말 성숙해져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도약하는 단계입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3:10~12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 ” 모세는 자신이 이제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려고 길을 떠납니다. 성경은 그 광경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내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너무 초라하죠. 그러나 그의 손이 무엇이 있나요? 지팡이!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볼 때 사용하던 평범한 지팡이 아무 것도 아닌 지팡이! 그러나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증표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붙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붙들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증표! 이 지팡이 하나로 홍해를 갈랐고, 반석에서 물을 냈고, 무수한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면, 소년이 예수님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옵니다.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드시고 축사하시자 5천명이 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매 돌로 물리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돌멩이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까 천하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한 방에 무너뜨렸습니다. 기독교 역사 상 성경 다음으로 위대한 명작으로 일컬어지는「천로역정」은 본 번연의 평범한 펜대에서 탄생했습니다. 그 펜대를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준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모세는 “아, 게르솜!” 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아픈 시련이 있었지만 그 연단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모세를 “여호와의 종 모세”(the servant of the Lord)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신34:5, 수1:1,13,15, 8:31,33 등) 모세가 하나님을 주인 삼았을 때 그를 통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지식, 내 경험, 내 생각, 내 야망, 내 재물, 내 지위, 내 권세, 내 명예 ... 하나님 앞에 별게 아닙니다. 질그릇일 뿐입니다. 고후4:7 에 나온 대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혹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40년 세월처럼 “아, 게르솜!”하며 탄식하고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겁니다. 부디 이 진리를 붙잡고 진정한 승리의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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