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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께서 보시고 안수하시니 (눅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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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보시고 안수하시니 (눅 13:10-17)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행한 어떤 행동으로 인해 안식일 논쟁이 일어난 사건을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안식일에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 첫 번째 안식일 논쟁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배가 고팠던 제자들이 손을 내밀어 밀을 까서 먹는 그런 행위가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했던 많은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그 많은 추수행위를 했느냐? 이렇게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율법에 보면, 추수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타작도 할 수 없고, 벨 수도 없고, 또 손으로 까서 먹는 이 모든 것들이 추수행위였는데 이것을 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법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 시대 때에 성전에 가서 제사장들만 먹는 그 떡을 먹었다. 이 말은 사람이 배가 고파 죽어가는 때에 안식일이라고 해서 먹을 것이 있으면서 남들을 주지 못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주지 못해 죽게 되면 그것이 죄악이 아니냐?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

- 두 번째 안식일 논쟁

그 다음 번에 나오는 안식일 논쟁은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데 회중 가운데 오른손이 말라서 꾸부러져서 펴지 못하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있었던 회중 중에 많은 사람들이 “어디 한 번 보자. 예수가 오늘, 이 안식일 날 저 병자를 고쳐주나 안 고쳐 주나 한 번 보자” 벼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그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을 회중 가운데 서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안식일 날 죄를 범하는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라고 물으신 다음에 그 오른손이 마른 사람을 향하여 네 손이 나았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사람의 손이 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안식일 논쟁을 일으키셨고 이 안식을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이 분명히 메시지를 증언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는 율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을 안식일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예수님 자신은 사랑을, 사람을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세 번째 안식일 논쟁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세 번째 안식일 논쟁 가운데 나타난 이야기 입니다. 오늘의 본문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는 안식일 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회중 가운데 18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고생하고 또 허리가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이 회중 가운데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눈으로 보시고 가슴으로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시면서 내내 그 여인이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보시고 그 여인을 부르시고 난 다음에 그 여인을 향하여 “네 병이 나음을 입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회당장과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 했습니다. 회당장이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니, 안식일 빼놓고 엿새 동안 일 하는 날 얼마든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데 이 쉬는 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 사람을 고치는 일이 말이나 되느냐?” 비난하게 되자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5절)

너희들도 안식일에 너희 집에 매여 있는 가축들이 목이 마르면 풀어 주어서 살리지 않느냐? 하물며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 귀신에 매여 육신에 매여 고통 당하는데 이 여인을 고쳐 준 것이 잘못이냐? 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는 사람을 살리고 해방시키고 구원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하는 율법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비난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부끄러워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게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세 번째 안식일 논쟁을 통해 예수님이 하셨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사람들이 안식일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법이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율법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뛰어넘어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전달해야 된다는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 가운데 나타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 때 상황을 저희들이 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이 여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시대 때나 또는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시대 때는 공히 여자는 물건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자는 자기 이름으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고, 여자는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자와 이방인들은 성전에 이방인 뜰이라고 하는 바깥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자의 지위가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때에 이 여인이 회당 안에 들어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18년 동안 귀신에 얽매여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귀신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마귀에게 꼬임을 당해서 마귀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주 비 성서적인 그런 존재였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은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꼬부라져 참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렇고 재정적으로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이 여인이 당하고 있었을 영적인 정신적인 재정적인 또는 육체적인 어려움과 고난을 가만히 보면 이 여인은 한 마디로 절망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조금씩 모양이 달라서 그렇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가정이 해체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고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고 육체의 질병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야기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과 여러분만이 아는 고통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여인이 당하고 있는 영적인 정신적인 육체적인 아픔과 고통과 비슷한 고난과 아픔이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왜면하고 알아주지 않고 무시했지만 이 여인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말씀을 듣고 언젠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나음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 전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을 대하는 또 이 때 당시 회당에서 말씀을 증언하는 랍비들은 어떤 자세를 가졌을까요? 

랍비들 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목자에 가깝다고 한다면 랍비는 요즘으로 말하면 성서해석자 신학자를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 랍비들은 성도들 개개인의 삶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랍비들이 하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랍비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픔과 고난의 문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치유해주고 상담하는 이런 역활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은 수도 없이 많은 날을 회당에서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많은 랍비로부터 말씀을 들었지만 치유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 내내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12절)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시고, 이 여인을 부르시고, 이 여인을 안수하사 고쳐 주십니다. 왜 예수님은 여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일 보다 이 여인의 아픔에 주목하시고 이 여인을 부르시고 이 여인을 고쳐 주셨을까요?

랍비의 관심은 사람들이 안식일 날 하나님의 전 회당에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도 랍비로서 많은 날 동안에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보다 앉아 있는 회중들이 경험하고 있을 아픔과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증언하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과 재산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수도 없이 많은 그들의 문제를 예수님이 직접 어루만지사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얼마나 멋있는 찬양, 얼마나 잘 짜여진 예배,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우리와 함께 슬퍼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사 우리의 삶의 문제를 치유해 주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돌아갈 때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제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그냥 흘려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 군중들에게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고통당해 절망가운데 있고 눈물 흘려 힘들어 하고 있는 한 개인의 흐느끼는 음성과 그들의 절망의 소리에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눈물에 예수님의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한 여인이 경험하고 있는 아픔에 주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실 수 있나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셨습니다. 눈으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가슴으로 이 여인을 만지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차례 측은히 여기사, 불쌍히 여기사 부르셨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사람, 삭개오를 예수님은 보셨습니다.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중풍병자 또는 귀신 들린 자 또는 각색 질병을 가지고 있는 자, 버림 받은 사람들,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고 지나쳤지만 예수님은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가셔서 그들을 부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시고 어루만지사 예수님은 개개인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이 여러분의 고난을 보시고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을 안으사 여러분의 아픔과 고난의 문제를 어루만지사 치료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또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사람으로서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보다 더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학교 졸업하고 취직을 못해 얼마나 고난당합니까? 청년 실업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청년 실업자 뿐만이 아닙니다. 직장을, 사업장을 잃고 고난을 당하는 가장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우리들의 삶에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지새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중들 전체에 대한 관심보다 그렇게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과 하소연과 고난의 삶을 보시고 부르시고 어루만지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도 우리 주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보고 어루만져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개인이 하나님의 교회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해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개인에게 그리고 지역사회를 찾아가 어루만져주고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이 여인의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이 여인을 보시고, 이 여인을 부르시고 그리고 이 여인의 아픈 부분에 손을 대시고 안수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시고 이 여인을 부르시고 난 다음에 사랑하는 딸아 참 안됐다. 많이 힘들겠구나. 예수님이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렇게만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여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여인이 귀신들린 것과 18년 동안 꼬부라진 이 여인의 질병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정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아픈 부분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지시면 그곳에서 회복의 역사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만지시면 치유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생명의 구세주 창조자 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만지시면 회복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만지시면 열매가 열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지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를 예수님에게 가지고 가면 예수님은 만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위로만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동정만 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오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가셔서 여러분의 아픈 육신과 여러분의 상처 난 마음과 여러분의 힘들어하는 영혼과 삶을 어루만지사 여러분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과 말씀이 권위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은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말씀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읽는 자, 말씀을 가슴에 담는 자, 말씀을 외우는 자, 말씀을 듣는 자, 그 말씀이 살아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을 연출할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율법적인 접근을 경계하셨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15절)

오늘 본문에 보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귀신들린 사람이나 또 18년 동안이나 꼬부라진 병에 걸려있는 이 여인을 놓고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이 여인을 비난하였습니다. 이 여인을 무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귀신들린 것이나 18년 동안 꼬부라진 질병에 걸린 것은 그 여인의 죄 때문이야. 그럴만하니까 하나님이 벌을 주었겠지? 그 여인이 법을 어겼거나 해서 하나님이 징벌하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이 여인의 고난이 당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는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모든 것들을 다 징계로, 징벌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질병을 얻어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위로의 말씀 은혜의 말씀, 용서의 말씀을 주사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을 향하여 비난의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안식일에 집에 있는 동물들이 목말라 하면, 그 맨 것을 풀어 그 동물들에게 물을 주어 살리지 않느냐? 하물며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 귀신에 얽매이고 질병에 얽매여 죽어가고 있는데 이 여인에게 그 매인 것을 풀어주어 생명을 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 율법보다 앞서는 것은 생명입니다. 율법보다 앞서는 것은 은혜고 위로고 용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갖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흠과 부족함과 잘못과 실수를 놓고 지적하기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고 측은히 여길 때,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아들아 내가 너의 아픔을 아노라. 너의 아픔을 내가 가슴에 담고 이제 손을 내밀어 너를 치료하니 놓임을 받으라. 여러분의 질병이 놓임 받고 여러분의 아픔과 고난의 문제가 예수님의 눈 안에, 예수님의 가슴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손을 펼치사 여러분의 아픈 부분을 만지사,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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