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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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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7-12)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거룩한 피조물입니다.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고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피조물입니다. 

이 세상 만물을 개발하고 다스리고 취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절대 불가침의 영역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명령했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이 세상을 다스리거나 개발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시고 인간에게 이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문화적인 청지기 사명을 주셨습니다. 십일조는 인간이 갖는 소득의 소유 중에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철저히 우리의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영국 웨스트 민스터 교회의 목사였던 켄델 박사는 "목사가 강단에서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목사 자신이 십일조에 대한 자신이 없고 교인들에게 불안한 감정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십일조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의 설교가 없는 것이 교인들을 결국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일조에 관해서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도 십일조에 관한 축복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축복을 담보로 하고서라도 시험해보라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강단의 설교의 특색은 애매모호한 메시지입니다. 거룩한 강단은 언제나 메시지가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에 의지하여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신 말씀으로 설교하기 원합니다. 

Ⅰ. 십일조의 역사적 기원입니다. 

1) 아브라함 이전 족장시대의 십일조입니다. 
애굽에서 발견된 나일강 유역의 고대인들의 역사적 문헌에도 십분의 일을 신의 몫으로 떼어 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벨론 역사에도 B.C. 2100년 신전에서 십일조를 바친 기록이 있고 군왕부터 초부(樵夫)에 이르는 모든 계급을 막론하고 전 수입에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헬라인들도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군주에게 바치고 첫 열매를 신전에 바쳤습니다. 그들의 여신인 다이아나(Diana)신전에 "이곳은 다이아나의 성지로다 재산이 있어 이득을 거둔 자는 매년 그 결실의 십분의 일을 바칠지며…"라고 했습니다. 
로마에서도 십일조의 기록이 있습니다. 로마의 신 허큘레스(Hercules)는 십일조를 받는 신이었습니다. "십일조는 모든 백성이 공히 해야 할 일"이라고 시저(Julius Caesar)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전 세계적으로 이방민족에 이르기까지 행해진데 대한 확실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확산되면서 조상에게 배운 십일조 생활은 세월의 무게와 함께 사람들에게 부동의 생활문화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아벨이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충분히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 족장 아브라함시대의 십일조입니다. 
창세기 14장 20절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연합군에게 사로잡혔다는 급보를 듣고 318명의 정예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격파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과 인민을 다 찾아왔습니다. 소돔 왕은 사웨 골짜기 왕곡에 나와서 아브람을 영접하였고 살렘 왕 제사장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람을 축복했습니다. 

아브람은 그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히 7:2).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하여 말하기를 히브리서 7장 3절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벧엘에서 노숙했던 야곱은 꿈속에서 사닥다리 계시를 본 후 잠에서 일찍 일어나 베개했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하기를 창세기 28장 22절에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십일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약조건이 될 만큼 비중 있는 행위입니다. 

3) 모세시대의 십일조입니다. 
레위기 27장 30-34절에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일조가 모세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모세시대부터 하나님께서 공식화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십일조는 주를 위한 거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레 27:30-32). 따라서 십분의 일은 우리 개인의 재산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구약에서 제사장과 관련된 가족들의 부양을 위해서 드렸습니다(민 18:25-26). 

4) 선지시대의 십일조입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십일조는 성경에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역대하 31:4-6). 느헤미야 시대의 십일조는 성전 재건과 신앙부흥을 위하여 크게 고조되었습니다(느 10:34-37). 말라기 시대에 와서는 십일조의 선명도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말 3:7-8). 

5) 신구약 중간기의 십일조입니다. 
중간기는 신구약 사이의 약 400년 어간의 시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시대는 유대인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십일조 생활은 그 변화에 포함되지 아니했습니다. 

6) 신약시대의 십일조입니다. 
(1) 예수님과 사도시대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십일조 생활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활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42절에도 똑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도시대에 와서는 십일조가 율법화 된 의무감에서 탈피하여 훨씬 많이 드렸습니다. 바울은 노골적으로 연보 생활을 가르쳤습니다(고전 9:13-14).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물질과 함께 성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롬 12:1).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종들을 부양했던 것은 십일조였습니다. 이와 같이 십일조는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종들을 부양하기 위해 정해진 것입니다(고전 16:1-2). 
말라기에서 십일조를 『창고(Store house)에 두라』고 했습니다. 이곳이 십일조를 모아들이는 곳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저축하여(in store)』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말씀이 고린도전서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고전 16:2)라고 했습니다. 

(2) 초대교회 교부시대입니다.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유대인이 십일조를 바쳤거든 하물며 소유의 일체를 주를 위해서 바쳐야 할 은혜 아래 있는 성도가 십일조를 기쁨으로 바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확실히 모순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구약의 십일조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유를 얻은 크리스챤은 주님 사업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필요할 때까지 재산의 가치 있는 부분을 즐겁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부 오리겐(Origen)은 "크리스챤은 구약시대 유대인보다 헌금에 있어서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us)은 "십일조는 창조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교부 어거스틴(Augustinus)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유익과 축복을 위하여 헌금정신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태만이 하는 것은 확실한 범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십일조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는 동안 우리 모두 공감하는 것은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것입니다. 

Ⅱ. 십일조의 동기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요구이자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32번, 신약에서 7번 기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십일조의 동기는 필연적입니다. 

1) 십일조는 절대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① 하나님의 절대창조에 대한 감사입니다. ② 절대사죄의 은총에 대한 감사입니다. ③ 절대구속에 대한 감사입니다. ④ 절대은총과 축복에 대한 감사입니다. 

2) 십일조는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으로 택해야 합니다. 마치 무슨 구제나 자선 사업을 하는 것처럼 매번 똑같은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인색함으로 하지 않고 기쁨으로 드리면 적어도 타성적인 것은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3) 십일조는 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심지 아니하고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둘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연계나 영계의 공통된 동일한 법칙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4) 십일조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드려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의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도적질하고서야 그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으며 더욱이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엇을 얻기 위하여 무턱대고 구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5) 십일조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피터 와그너는 말하기를 "바른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하나는 주일예배 드리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인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까지 손해를 입습니다. 반대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릴 때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유익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 

Ⅲ. 십일조의 축복입니다. 

본문 3장 10절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는 축복과 함께 우리 가운데 거룩한 예배행위로 친숙해졌습니다. 적어도 십일조는 축복입니다. 드리는 그 자체가 이미 축복이고 드릴 때 현재보다 더한 축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본문 3장 1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질의 손해와 실패를 보지 않도록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미국 텍사스 주에 크롬웰 목사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아니하면 다른 방법으로 마음의 고통을 주시면서 그 십일조가 어떤 경우든지 나간다"고 했습니다. 십일조가 엉뚱한 곳으로 소비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현장입니다. 농사를 해치는 황충과 토양의 상태 때문에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과실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막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 얻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취하려고 할 때 안팎에 도사리고 있는 현대판 황충과 우리의 삶의 현장에 여러 여건들 때문에 재물 얻는 길이 막히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하게 되는 길은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정하신 이유는 첫째,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의 권리를 계속 인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십일조를 탐욕의 해독제로 정하시기 위함입니다. 셋째, 십일조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넷째, 십일조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즉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잘난 사람을 빼내어 사용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자기 백성을 빼내어 사용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한 일서 2장 3-6절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5장 25절에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늘 문을 연다고 했습니다(말 3:10). 노아 홍수 때에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했습니다(창 7:11-12). 이것은 막을 수 없는 풍성함입니다. 위의 두 성경구절은 동일하게 하늘을 연다,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하므로 분명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이 부분에서 temporal(일시적, 현세적인)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물질만 추구하는 부의 복음(wealth gospel)과 정반대입니다. 그는 물질적인 복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차원 높은 신앙입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물질보다 더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부요의 은택이 십일조를 통해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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