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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식적 믿음에서 행함 있는 믿음으로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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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적 믿음에서 행함 있는 믿음으로 (약 2:14-26)


어제 모 대학 교수님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소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부부가 함께 3년 동안 성가대로 봉사하시던 집사님이었습니다. 딸 셋이 있고 아직은 젊은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병상에 있으면서 저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이야기를 하고 퇴원하면 우리 교회에 나가자고 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은 풀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 같다고 했는데 만약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너무나 인생은 허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고 살아 있는 동안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 인생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오늘 나에게 죽음이 온다면 천국에 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지옥에 가 있겠습니까? 정직하게 자신을 향하여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벌에, 믿는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25:46)라고 했습니다.

다행이 눈을 떠보니 죽음도, 눈물도, 한숨도, 질병도, 고통도 없는 천국에 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질문합니다. “너 어떻게 천국에 왔느냐?” 이 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시어머니 잘 모셔서 천국에 왔습니다.” “주일 예배 열심히 참여하여 천국에 왔습니다.” “헌금 생활 열심히 하여 천국에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천국은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그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요3:14,15; 민21:9).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산 것처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죽음에서 살리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1:12; 요5:40; 요 7:37; 요6:44,6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믿음이란 예수님을 통하여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정죄 하에 있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갈망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영접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갈 수 있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그런데 이 믿음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언어는 외연과 내포로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언어의 외연입니다. 어머니가 되려면 “여자이어야 하고, 아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내포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어느 여 집사님에게 “사랑합니다.”라고 편지를 썼다고 해보세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의 의미는 다릅니다. 이성으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추행으로 몰아붙여 고소하면 안 됩니다. 믿음도 내포적 의미에 따라 종류가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귀신도 믿고 떠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귀신도 믿으니까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이 믿음은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압니다. 예수님도 압니다. 역사적으로 존재하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적으로 알 따름입니다. 구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 믿음대로 살지도 않습니다. 이런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력이 없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12:33)”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라고 했는데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체만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여야 하는데 입술로 시인하는 체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 선생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하는 것은 말로만 믿는 지식적인 믿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일부 교인들 가운데는(2:14, 18) 이신칭의 사상의 획일적인 강조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선행을 행하지 않고 논쟁만을 일으키는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강조하면서 삶은 개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 생활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 믿음이 행함과 함께 하는 믿음,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함께 옆 사람을 보고 말합시다. “지식적 믿음에서 행함 있는 믿음으로 신앙생활 합시다.” 어차피 짧게 살다가는 인생,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신앙 생활하는 것 행함 있는 참 믿음 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장에서 일하는데 직원인지 손님인지 모르게 직장 생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학생이 공부하는데 공부하는 학생인지 오락하는 선수인지 모르게 공부한다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10년 20년 다녔는데도 여전히 지식적인 믿음의 수준에서 머물면 무슨 생동력있는 신앙의 기쁨과 축복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실행 있는 믿음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만 확실히 하면 인생은 평강의 삶, 기쁨의 삶, 행복한 삶, 승리하는 삶,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 믿음,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 보장이 무엇이겠습니까?

1.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줍니다(14)

14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행함은 없습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는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14).

지식적 믿음 즉 역사적 믿음은 성경의 진리들을 자기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듣고도 행하지 않는 신앙(마7:26)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크게 네 종류의 믿음이 나옵니다. 

이적적 믿음이 있습니다.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능동적 의미에서의 이적적 믿음은 자기를 통해서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막16:17,18).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믿음을 통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수동적 의미에서의 이적적 믿음입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이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여도 하인이 병에서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마8:5-13). 마르다는 예수님이 구하시기만 하면 오라비가 살아날 줄로 믿었습니다(요11:22). 이 신앙은 구원적 신앙을 수반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낸 자들도 구원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가룟 유다도 이적을 행한 사람이었으나(마10:1-8) 제 갈 길로 갔습니다(행1:25).
일시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이나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마13:20-22)로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되 곧 넘어지거나 결실치 못하는 믿음입니다. 일곱 집사 중에 니골라같은 믿음입니다. 일시적으로 믿고 직분을 받았지만 결국 니골라 당을 만들어 이단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히6:4-6)”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믿음은 중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감정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오히려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고"(딤전1:19)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딤후4:10).

진정 구원얻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 참 믿음, 구원적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 자리를 마음 곧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격에 두고 중생에서 비롯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신앙이 지성에 자리를 두나 주님께로 향한 회개의 눈물이나 사랑, 감사 같은 감정이 결여되고 또 그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의지가 결여된 신앙입니다. 일시적인 신앙은 단순한 감정에만 자리 잡은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성령의 중생시키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서부터 주님께로 향한 뜨거운 회개의 눈물과 구원 은혜에 대한 감사, 주님께 대한 사랑이 용솟음치게 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자기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적 신앙은 그 사람의 전인격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신앙입니다.(갈2:20) 참된 구원적 신앙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로 변화가 됩니다.(골3:9-10) 문제만 맡기는 삶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와 우리 열린 교회 성도님은 참된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지식적인 믿음에서 머물지 말고 행함 있는 믿음으로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완전히 구출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성취된 구원입니다. 영적 사망과 영적 소경으로부터 우리가 중생을 받은 것입니다. 정죄의 신분에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양자가 된 것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제 친죄 성향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점점 성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입니다. 장차 육체적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적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영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세상에 그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겠습니까? 참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데 그저 구원에서 낙제생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음 후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도 비록 병들고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산다고 해도 믿음으로 행복한 천국 생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행복 연구가 밝혀낸 행복연구에 따르면 행복은 나를 위하는 행동보다는 타인을 위하는 행동으로부터 더 강하게 경험된다고 합니다. 2008년「사이언스」지에 발표된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 달 지출 중 자신을 위한 지출과 타인을 위한 지출(선물 구매. 기부 등)중에서 타인을 위한 지출이 행복과 더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서 돈을 더 많이 지출하는 사람들이 더 행 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을 실험실에 초청한 후에 각 사람에게 봉투를 하나씩 주었답니다. 5달러부터 20달러까지 돈이 들어 있었답니다. 실험자는 참여자들의 절반에게 “이 돈을 전부 자신을 위해쓰시오.”라고 지시했고, 다른 절반에게는 “이 돈을 전부 다른 사람을 위해 쓰시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다 사용 한 후 오후에 실험실로 돌아오도록 했답니다. 오후가 되어 실험실에 돌아온 이들의 행복을 다시 측정했답니다. 

놀랍게도 ‘남을 위해 돈을 쓴 사람의 행복도가 증가했더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5달러를 썼는지 20달러를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동일하게 행복감이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남에게 베풀면 그것이 자신에게 행복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18~19; 이사야 58:7~8)

연구에 따르면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여러 가지 신체적 고통을 덜경험한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병을 예방하는 아스피린 보다 더 큰 효과로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실제로만 55세 이상의 성인들 중 두 곳 이상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장수한다고 합니다. 이는 일주일에 네 번씩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보다도 강한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15-17).
15,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지식적인 믿음만 가진 사람은 헐벗고 양식이 없는 형제에게 말로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라고 말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돕기 위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입에 발린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참 믿음을 가지면 생명력 있는 믿음을 통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유익을 받습니다. 아들이 유익을 받습니다. 딸이 유익을 받습니다. 남편이 유익을 받습니다. 아내가 유익을 받습니다. 시어머니가 유익을 받습니다. 며느리가 유익을 받습니다. 이웃들이, 나라가 유익을 받습니다. 세상이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됩니다.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중풍병자의 친구들을 보십시오. 친구가 병들었습니다.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봐 나을 거야라고 말만하지 않았습니다.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내렸습니다. 행함의 경쟁력이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행함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 예수님의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기도의 능력만 알고 행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추석 명절 때 여러 권의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6년 반 동안 주중대사를 지낸 김하중 장로님의 기도행전이었습니다. 전 통일부 장관을 지내신 분입니다. 오늘날도 사도행전 교회처럼 신묘막측하게 응답받는 기도 내용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고 중국에서 사스가 창궐하던 시기에 과감히 대통령(당시 대통령 노무현)의 방중(訪中)을 건의하였고, 방중계획 불과 이틀 전에 사스가 공식 종료되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북한 고위 간부였던 황장엽 씨가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점퍼 차림으로 은밀하게 다니며 35일이라는 최단 기간 내에 해결할 때도 그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많은 이들이 있었고, 기도를 통하여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수천 번의 기도를 통하여 중국 감옥에 있는 죄수를 석방하게하고 사형수를 감형받게 만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억된바 되었다가 이 땅에 성취된다는 믿음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행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행함 있는 기도를 통해 순종하는 기도 생활을 통해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받으며 나라가 유익해지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간증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비난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만 하고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10월 달 목회와 신학을 보니까 세상을 보듬는 하나님의 손길 나눔을 특집으로 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붙들고 나눔을 실천하는 여러 사람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연주 공연 기획사는 운영하는 한 성도(유경희)는 교회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피아노레슨을 무료로 시켜 주었습니다. 자신은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대학 시절 형편이 어려워지고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제적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학비를 친구들이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만나 신앙 생활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은혜를 나누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연주 봉사도 하고 일주일에 하루를 잡아 아이들을 무료로 피아노 레슨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언론에도 알려진 고영씨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경영 컨설턴트인 그는 결혼하지 않은 때는 수입의 80%를 재소자, 가난한 대학생, 고려인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재능을 기부하기 위해 프로보노 전문가 집단인 SCG을 만들어 기업을 무료로 컨설팅 해준다는 것입니다. 처음은 3명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변호사, 회계사, 마케터, 애널리스트 등 총 220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 좋은 어머니로부터 배웠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친구 분의 딸 등록금을 초등학교 6년 간 모은 적금을 헐어 주라고 했답니다. 그 때부터 그는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평촌에서 학원을 하시는 한 원장(김효정) 이야기도 실렸습니다. 학원을 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무료로 공부시키기 위해 별도로 물댄 동산을 만들었답니다. 어느 때는 선생님 월급과 유지비가 1,700만원이 들어가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나눔을 실천했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어 학원 아이들이 1,000명이 될 정도록 성장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믿음을 실천하는 삶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믿음을 실천하면 세상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면 우리를 비판하는 세력의 입을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벧전 2:15)"

우리가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면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벧전 3:1)"
내가 행하는 믿음을 가지면 나도 유익이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이 유익을 봅니다. 행하는 믿음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눅 6:38)”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3.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18-26).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하면 “어디 성경에 행함으로 구원받는 내용이 있느냐? 믿음으로 구원받지”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적대적인 입장에서 있는 자들이 자기는 믿음이 있고 야고보는 행함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은 행함을 통하여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믿음의 허구성 고전13:1-3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여기에서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의롭게 되는 도구로서 행함이 아닙니다. 구원의 도구로서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함을 말합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칭의의 결과로 주어지는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으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가진 자로서 행함 있는 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은 행함 있는 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는 참 믿음을 역사적 실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이방인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기생 라합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들어 설명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얻는 것은 확실합니다(롬4:9).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믿음이었느냐 아니면 행함 있는 참 믿음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행함으로 보인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신앙이 있음을 증거하였다는 말씀입니다(21-23) (창17:17-18,22:1-13, 롬4:1-23, 히11:18-19) 

22절을 보십시오. 진정한 믿음은 행함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였습니다(22) 그런 믿음을 보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해 주었고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해 주었습니다(23-24).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25-26; 수2:9-11) 라합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확실합니다(히1:31). 기생입니다. 이방인입니다. 당시 사람 취급하지 않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오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단지 지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함 있는 온전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수2:9)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습니다(수2:10)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이심을 믿었습니다(수2:4)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으로 끝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정탐꾼을 살려 주었습니다. 행함으로 그의 믿음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았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행함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요(마7:21-25)”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4-40)

행함 있는 참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줍니다(14) 행함 있는 참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15-17). 행함 있는 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18-26). 지식적인 믿음에서 행함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 복된 신앙인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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