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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소망에 눈뜹시다 (벧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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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소망에 눈뜹시다 (벧전 1:3-7)

  
저는 어제 리더들과 함께 여수에 있는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갔습니다. 손목사님은 나환자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고름이 흐르는 저들의 발에 입을 맞추며 돌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순명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나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여순반란 사건이 터지고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 동신, 동인 형제가 순교당했습니다. 장례식을 치루며 하나님앞에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때의 열가지 제목의 감사가 유명합니다. 그리고 반란이 평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안재수도 잡혀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찾아가 용서하며 석방을 탄원하여 양자로 삼았습니다. 당신께서도 6,25전쟁중에 잡혀서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무리 목사라도 그렇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고난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부정하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50년 초반 강원도 어느 산골에 상수라는 아이가 살았습니다. 어느날 상수는 큰아버지로부터 노란 고무신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난생 처음 받아본 새 고무신이 너무 좋아서 상수는 그 신발을 신지 않고 품고 다녔습니다. 어나늘 상수는 개울에서 고무신을 씻다가 그만 한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고무신은 물살을 타고 떠내려갔습니다. 상수는 고무신을 건지려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고 고무신은 계속 떠내려가다가 큰 강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상수는 길을 잃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처구니 없이 길을 잃은 상수는 온갖 고생을 하며 한많은 세월을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초로의 노인이 된 상수는 TV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 나와 굵은 눈물을 흘리며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침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던 그의 형이 동생을 알아보고 연락하여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잃고 난 뒤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고 늙으신 아버지는 치매를 앓아 50년만에 만난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상수는 아무 말도 못하며 눈물만 흘렸습니다. 
  
이처럼 기가 막힌 일이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무신처럼 별것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달려가다가 정말 소중한 것을 쉽게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고무신 한 짝같은 시시한 것을 쫓느라고 얼마나 고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삶이 끝나갈 때에야 깨닫고 후회하지만 이미 때는 늦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건강, 명예, 출세 등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깁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영원히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앞에 설 때에 돈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죽음앞에서 건강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출세도, 지위도 죽어가는 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앞에서도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교회에 부목사로 섬긴지 5년이 되어 담임 목회를 나가기 위해 기도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병원에 갔다가 암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임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충북 음성의 한 교회로부터 주일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던 목사가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친구인 이 분을 후임자로 추천한 것입니다. 교인들은 기대를 잔뜩하고 교회에 왔는데 막상 나타난 목사님의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초라한 몰골의 환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교회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안수집사 한 분이 이 목사님을 담임교역자로 모시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다들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암환자를 담임목사로 모시느냐고 반대했습니다. "오늘 저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목사님이 비록 암환자이고, 이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시고 이런 설교를 한 주밖에 더 듣지 못한다 해도 우리 교회로서는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시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날 모든 교인들이 모두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청빙서를 받은 목사님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암 환자인 자신을 담임목사로 받아주는 교회가 있다니..'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교회에 부임할 생각보다는 너무 감사해서 그 교회에 정말 훌륭한 목회자를 보내달라고 기도드리려고 기도원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게서 큰 은혜를 주셔서 암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의 암이 치유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 교회의 청빙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한 번의 설교가 얼마나 은혜로왔기에 모든 교인이 암환자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려고 했을까요?  아마도 그 목사님은 자신의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할 수 있겠습니까? 심혈을 기울여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남은 시간이 한 주일밖에 없다고 하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만일 하루의 시간밖에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가족들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다투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려고 눈에 불을 키고 덤벼들겠습니까?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불평하며 원망하는 어린아이같은 자세를 붙잡고 있겠습니까?  대부분 하나님이 보내주신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용서를 구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부탁한 일들을 소홀히 한 것을 후회하며 남은 시간 조금이라도 더 최선을 다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이제 곧 주님앞에 서야 함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하나같이 어리석어서 죽음이 가까워야 소중한 것을 깨닫습니다. 평소에 죽음을 의식하며 소중한 것을 붙잡을 줄 알아야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산 소망에 대해 말씀합니다. 산 소망이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는 것입니다. 세상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그런 유업이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에수님이 다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을 기대하고 살아야 합니다.

북한에서 금년 5월에도 지하교회가 발각되어 총살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국에 양식을 구하러 갔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와 같은 마을에 사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전하여 일곱 명이 은밀하게 예배를 드렸는데 공산당에 발각되어 모두 순교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또 북한 선교를 하는 분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입니다.

어느날 산 속에 김일성 별장을 짓고 도로를 닦는 중에 한 언덕을 허물었는데 굴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굴속에 늑대처럼 생긴 동물이 있어 붙잡았는데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자 굴을 파고 50년간을 은밀하게 예배하며 기도하며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체를 알게된 공산당원들이 20여명을 길거리에 눕혀놓고 불도저로 지나가며 깔아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때문에 50년을 짐승처럼 고생하며 굴속에 숨어 살았을까요?  천국 소망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주실 것을 확신하고 하늘 소망으로 견디며 살았던 것입니다. 소망은 고난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소망은 천국을 바라보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소망은 믿음을 견고하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면 소망이 우리를 거룩하고 복되게 인도합니다.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선교하던 찰스 마쉬선교사는 현지에서 7명에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모두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님,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 14장 13절 말슴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받은 가장 큰 축복은 천국 시민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빼앗긴대도 천국만큼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되는 축복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중에 그 천국에 어서 가고 싶어 천국에 들어갈 날을 사모하며 기쁨가운데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구원받아 천국간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지 천국을 향한 진정한 소망이 없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받게 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잊고 이 땅의 것에만 소망을 두고 현재의 것에만 집착하여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안타까와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를 믿음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 즉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약속하시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유혹과 핍박앞에서도 흔를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 나라를 소망하지 않고 세상에 것만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유혹앞에서 쉽게 흔들립니다. 세상에서 편하게 사는 것이 더 좋아보입니다. 세상에서 맘껏 죄짓는 생활이 더 좋아 보입니다. 세상 쾌락과 세상 부요와 세상 권세가 하늘에 예비된 축복보다 더 좋아 보여서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핍박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작은 핍박도 견디지 못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믿음을 포기합니다.  믿음을 지키므로 가정 또는 직장으로부터 주어지는 비난과 불이익과 고난앞에서 쉽게 굴복합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에 눈뜬 그리스도인은 죽음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무서운 고문도 이겨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고통스러워하기는 커녕 천사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늘 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일어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늘 나라를 본 스데반은 죽음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천국에서 곧 예수님을 다시 만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힘이 나온 것입니다. 천국에서 곧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만날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진실한 용서와 숭고한 사랑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죽음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늘 나라의 소망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상급과 칭찬을 바라보기에 이 땅에서 누리는 작은 복보다 훨신 더 큰 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려다가 가난하게 되면 '잠시 견디고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부하게 살면 되지!' 하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려다가 출세의 길이 막히면 '잠시 견디고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누리면 되지!' 하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천국 소망은 죽음이 임박한 노인들이나 이제 다 살았으니 천국이나 바라보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여기가 전부가 아니고 영원한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작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소망은 지금이 전부가 아니니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 인내하며 성결하고 헌신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조감도를 보셨습니까? 조감도가 무엇입니까? 새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듯 전체를 그려 놓은것 또는 작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높은 건물도 별거 아닙니다. 높은 산도 작게 느껴집니다. 밑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작은 동물같이 느껴집니다. 이처럼 하늘 나라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아주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큰 집과 작은 집이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잘 생긴 인물과 못 생긴 인물이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 권세와 세상 지위도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싸우는 심각한 문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민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집착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면 하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주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을까?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제 곧 주님앞에 서야 하는데 그날에 주님께서 "너 세상에서 뭐하다 왔느냐?" 물으시면 뭐라고 답변할것인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삽니다. 단지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학교가고 취직하고, 집사고 차사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누리면 기뻐하다가 조금만 덜 누리게 되면 몹시 슬퍼합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를 전혀 준비하지 않고 살면서 그 날에 칭찬 받을 수 있을까요?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천국 소망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발견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온힘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하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다 내주고라도 하늘 나라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붙잡는 사람이 지헤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늘 소망에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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