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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 사는 사람들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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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는 사람들 (눅 12:13-21)   


지난 주일에 많은 성도님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가을 단풍 구경도 있고, 환절기 기후로 인해 감기 몸살을 앓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이 쌍 10일로서 많은 결혼식이 있었답니다. 쌍 10일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2010년 10월 10일 10시로 쌍 10일에 결혼을 하면 잘산다 해서 수많은 쌍이 그 시간에 결혼을 올렸다고 합니다. 아마 내년 2011년 11월 11일 11시가 쌍 11일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그 날도 많은 사람들이 잘 살것을 기대하며 결혼하겠지요?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라면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심정인 것 같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은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같은 반에 잘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주변에 부자 친구가 없었는데 그 친구는 저에게 참 잘해 주었습니다. 아마 제가 힘이 세서 보호막으로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잘해 주었습니다. 가끔 학교가 끝나고 그 친구가 자기 집에 놀러가자고 하면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의사였습니다. 2층 양옥집으로 벨을 누르면 식모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고 정원을 따라 들어가는 길이 참 멋있었습니다. 

그 집은 먹을 것과 가지고 놀 장난감이 풍부했습니다. 그 집을 지으면서 바닥에 깔았던 고무 타일을 두 장 얻어다가 책받침으로 사용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그것을 부러워했습니다. 지금도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서 가장 부자 집은 바로 그 친구내 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부자로 사는 사람을 잘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런 생각은 저 만의 생각이 아니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집 참 잘 살아’ 라는 말은 ‘그 집 참 부자야’ 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는 ‘그 사람 잘 살아’라고 말하면 ‘돈이 많은 부자야’라는 말로 인식됩니다. 

어느 날부터 저에게 그런 생각에 변화가 왔습니다. ‘부자인 것’과 ‘잘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난에 찌든 삶을 살다 보니 경제를 중심으로 부자는 잘 사는 사람이라는 평가하며 살았습니다. 부자는 부자일 뿐이지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 가운데 사람답게 잘사는 사람도 있지만 부자이기 때문에 모두가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부자와 잘 사는 것은 구분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아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왕궁 옆에 포도원이 있었는데 아합 왕이 그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그 곳에 채소를 심어 키우기를 원했습니다. 아합은 포도원 주인인 나봇에게 포도원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인 나봇은 포도원이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팔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왕을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돌로 쳐서 죽였고 개들이 와서 나봇의 피를 핥았습니다. 

아합은 결국 포도원을 빼앗아 자신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아합의 악함을 보시고 노하십니다. 아합은 누구보다도 부자였습니다.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합은 부자이지만 잘 산 사람은 아닙니다. 잘 못산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부자는 잘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이제는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2장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여기에 수만 명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때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오늘 본문 13절에 보니 질문을 합니다. 13절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 말씀을 보면 형제가 있는데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형이 동생의 몫까지 챙긴 것 같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장남은 다른 형제들보다 갑절을 가지도록 정했습니다. 만약 형제가 있었다면 형이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에게 3분의 1을 주어야 하는데 형이 모두를 가진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해 동생이 예수님께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가 요구하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만 명에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별개의 내용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내용을 들어 보면 자신의 재산을 찾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챙기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을 요청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동생에게 14,15절의 말씀을 통해 대답하십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몫을 찾아달라고 요청하는 동생에게서도 그의 형과 동일한 탐심을 보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차지 하려고 하는 탐심이 결국은 형제애를 그리고 사람됨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생명’은 생물학적인 의미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 의미, 사람답게 사는 것 등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마을에 한 부자가 살았습니다. 그 해 쌓아 둘 것이 없을 만큼 풍년이 들었습니다. 부자는 더 쌓아 둘 곳이 없음을 걱정하다가 곡간을 헐고 다시 크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곡간을 지었습니다. 곳간에 곡식을 가득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가 만족해 하며 ‘내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고 합니다. 자신의 소유에 대단히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를 중심으로 만족해하는 부자를 향해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지혜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를 향해 ‘어리석은 자’라고 평가 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만약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네가 준비한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자’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를 구분하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자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조금만 더’라는 생각입니다. ‘조금만 더’라는 생각은 결국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신의 탐심을 채우기 위해 계속 질주하는 것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를 외칩니다. 자신의 욕망과 탐심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이웃과 공동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을 보면 그는 자신의 주변에 쌓아 두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개념과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영역이 없습니다. 

농사는 혼자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 도왔던 일꾼들이 있고, 함께 사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풍년을 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부자에게는 함께 농사를 지은 일꾼과 이웃, 그리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중심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부자인 것과 잘 사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별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와 감사헌금의 개념은 어려운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성전, 즉 교회를 세우는 과정입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세워나가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신앙 자세입니다. 

언젠가 한 번 미얀마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미얀마 선교를 하는 실로암 교회의 이명재 목사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 이명재 목사님이 미얀마 청년들과 고구마 농사를 지어 수확했다고 고구마를 조금 가지고 사모님과 함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제가 감동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목회를 하던 목사님 한 분이 한국에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실로암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찾아왔습니다. 이명재 목사는 그 분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미얀마 청년들을 위해 마련한 쉼터에 거하게 했습니다.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명재 목사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교통비와 식비로 40만원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목사님이 새벽 제단에 나와 의자가 아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를 하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에 들려오는 소식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미얀마에서 어려움이 있어서 사채를 약간 빌렸는데 그것이 200만원 정도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명재 목사님이 새벽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명재 목사님의 마음에 ‘저의 눈물의 기도를 내가 들었으니 네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주일예배 때에 미얀마 청년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창천 목사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만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청년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더랍니다. 지금 창천 목사님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우리가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한 형제가 아파할 때 우리 모두가 함께 아파하며 그것을 도울 때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나도 창천 목사님을 위해 물질을 심을테니 여러분들도 목사님의 고통과 슬픔을 위해 다음 주에 정성껏 헌금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사는 미얀마 청년들이 헌금한 금액이 이백 사십만 오천원이었답니다. 자신의 교회로서는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 후에 창천 목사님을 중심으로 둘러서서 축복과 감사의 찬양을 부르며 모두가 감동의 눈물로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제 가슴에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부자인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현장을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난해도, 어려움에 놓였어도 잘 살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지난주에 3/4분기 제직회를 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추구하는 나눔의 삶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재정이 예산에 비해 5%정도가 부족합니다. 특히 십일조와 감사헌금의 영역이 많이 부족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연말까지 예산에 대비해 약 삼천만원 정도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헌금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연초에 한 번 정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제가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성숙한 믿음으로 헌금 생활에 임할 것을 권면합니다. 

저희 교회는 헌금의 종류가 단순합니다.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 주일헌금, 그리고 여러분이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목적헌금입니다. 저는 십일조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당연한 의무라고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축복의 통로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도 감사헌금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와 교회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온 성도들이 특히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일꾼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역을 바르게 세워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잘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풍성하게 만들어 복된 자리에 서는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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