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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에 복을 더 하사 (대상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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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에 복을 더 하사 (대상 4:9–10)


오늘 읽은 본문은 ‘야베스의 기도’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10년 전쯤 ‘야베스의 기도’라는 제목의 책이 나와서 미국에서 첫 해에만 이미 400만권을 넘겼고, 우리 나라에서도 첫해에 100쇄를 훌쩍 넘기고 지금은 200쇄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제목의 찬양도 최소한 세 가지 버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여성을 위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도 있다고 합니다.  

뭔가 유행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방어기제에서 출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야베스의 기도의 붐에는 분명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어 보입니다.  단지 ‘기복신앙’이라는 이름만으로 거부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한편 우리가 복을 구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지 않은가라는 자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의 기도에 관한, 아니 결국 우리의 기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근본적으로 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몇몇 다른 기도와 이야기들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여러 간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화라고 해야 할까요, 여하튼 그 에피소드들은 일단 좀 유치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큰 걸 구하라고 말하면서 비행기 시간에 늦으면서 그 비행기가 연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결국 연착되서 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백 명도 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을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저를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바른 기도인지요.  그리고 그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겁니까?  

창세기 15장 12절부터 16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땅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엄청난 약속의 땅, 가나안, 그곳을 허락하실 때도 아모리 족속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이 넘쳐서 그 땅에 있는 것이 용납되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것도 400여년을 말이죠.  이런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이 먼저 세우신,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마음이 떠난 사울 왕의 몸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울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고, 사무엘을 통하여 다윗을 새롭게 세우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그냥 왕좌에 등극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십 수년을 기다립니다.  그것도 죽을 고비 여러 차례 넘겨가며 적국에 넘어가서 미친 체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오히려 사울에게 다윗 자신은 사울을 죽일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기회로 삼았을 뿐입니다.  누구에게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시기 보다는 약속하셨던 그 일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 사무엘상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아이들이 떼를 쓰는 것처럼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랬더니 주셨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엮어 놓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상황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야베스의 기도와 비슷한 기도는 오히려 의외의 곳에 있습니다.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허락하셨더라.’  다시 들어도 좋긴 합니다.  

창세기 4장 13절부터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동생을 죽인 죄로 쫓겨나고 있는 가인입니다.  그 가인은 하나님께 낯짝도 두껍게 최소한의 생존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가인의 생명을 보호해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어떠한 형태인지 알지 못 하지만 일종의 표시를 주시면서 가인에게 안전을 약속하십니다.  결국 가인은 가정을 이루었고, 아들의 이름을 딴 성을 건축하며 살게 됩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지경을 넓히다 못 해 가정을 이루고, 성을 세우고 살게 하셨고, 환난을 벗어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창세기 28장 20절부터 22절을 보시죠.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던 길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에서 서원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32장에서는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올 뿐만 아니라 두 떼를 이루고, 거부가 되어 돌아왔지만 28장의 서원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딸 디나의 강간사건이 있고 나서 정신을 차리죠.  야곱의 신앙사를 놓고 봤을 때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은 그야말로 유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인의 기도나 28장에서의 야곱의 기도나 야베스의 기도는 그런 면에서는 유아기적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시 조금 있다가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비슷한 유명한 구절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로 대표되는 갈렙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 14장 10절부터 14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의 이 산지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약속하셨던 땅 가운데 있는 곳이지만, 아낙 자손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있는 곳입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 공격하는 쪽은 수비하는 쪽의 세 배의 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지와 같은 천혜의 요새들은 그것보다 몇 배의 힘이 드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아낙자손은 거인으로 유명한 네피림의 후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렙의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는 단순히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와 비교될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오늘날로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한국에서 탈세하지 않고 뇌물 없이 기업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영국이나 미국은 모르겠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몰라서 한국 이야기를 드리는 거지 영국이나 미국은 좋은데 한국은 안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하튼 탈세, 뇌물 없이 기업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세금 정확하게 다 내고, 뇌물 쓰지 않고, 깨끗한 방법으로 기업해서 성공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사업하시는 분들 아니면 잘 안 와 닿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들이 꺼려하던 그 아낙자손의 땅을 향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는 정말 믿음의 담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갈렙의 기도처럼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하는 그 어려운 자리.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자리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  만약에 그런 배경을 가지고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가 나온다면 또 다른 의미이겠습니다.

잘못된 예로는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이야기가 기니까 짧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눈으로 따라가시면 될 겁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가지고 싶어했습니다.  두 배로 주겠다고까지 했지만 나봇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거부했습니다.  아합 왕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어찌 할 수 없어 물러섭니다.  이를 들은 왕비 이세벨은 하나님의 법을 이용해서 거짓 증인을 내세워 나봇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가로챕니다.  

결국 그 일로 이세벨은 죽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사람을 죽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봇입니다.  나봇은 왕의 요구에도 굴하지 않았고, 두 배로 주겠다는 경제적 이득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증인들에 의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던 나봇은 그야말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 많은 의인들의 피를 모르십니까?  성경의 첫 번째 살인자 가인 이야기를 드렸었는데, 동시에 성경의 첫 번째 피해자는 아벨이었고,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아벨의 제사가 어찌어찌해서 의로웠다가 포인트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난 첫 아들부터 살인자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의로워도 피살됩니다.   그것도 형의 손에 죽습니다.  하루 아침에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을 잃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죽고, 형은 도망갑니다.  에덴동산 밖의 첫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부터 38절을 봅시다.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유명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이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믿음으로 고난 받고 죽임 당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승리를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 기도문을 주문처럼 외우면 만사형통,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믿음으로 톱에 켜는 것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결국 그 일 때문에 형한테 맞아 죽습니다.  나봇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다가 여호와를 저주했다는 거짓 증언 때문에 죽습니다.

만사형통, 승승장구 듣기 좋은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보자면 복에 복을 더하사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  어르신들 기도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이 구절은 야곱이 죽으면서 요셉에게 남긴 말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실 야곱의 장자권은 유다에게 넘어갑니다.  

민수기에 보면, 민수기가 사람 숫자 세는 기록이라는 뜻 아닙니까?  영어로 Numbers입니다.  거기에 두 번의 인구조사가 나오는데요, 거기서 가장 강성한 건 유다족속입니다.  물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합하면 유다 보다 조금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질 때 북이스라엘은 이 므낫세를 중심으로 갈라섭니다.  결국 우상을 섬기며 배도하는 근원이 바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을 받은 요셉지파의 후손들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하냐 하면은, 무작정 우리가 복 주시기를 원하는데,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기를 원하는데, 정작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 복이 곧 화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너무나 많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길지 않은 제 인생을 돌아봐도 확인 가능합니다.  쉽게 말해 로또 당첨되서 인생 불행해졌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듣습니다.  

행복한 가정에 관한 세미나로 유명해지다가 결국 너무 유명해져서 가정 소홀히하고 강연 다니다가 남편 분 바람 나서 이혼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 공부하러 많이 오셨죠.  공부 잘 하게 해달라고, 혹은 좋은 학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공부 핑계로 주일 예배 빠지기 시작합니다.  공부하고 나서 혹은 이것만 끝내고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건강하고 공부 잘 해서 학위 받고 좋은 곳으로 취직되서 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과정이 끝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길까요 아니면 결국 비슷할까요?  교회 대충 다녀도, 기도 대충 해도, 가정 화목하고, 공부 잘 되고, 건강하고, 돈 잘 벌면 좋겠죠?  거기다가 자녀들도 다 엄친아 소리 들으면서 자라면 좋죠, 뭐.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다가 누구 하나 암에 걸리거나, 교통사고 나거나, 바람 피거나, 부도가 나거나 하면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도 않고 잘 살아갑니다.  배 아프죠.  

시편 73편입니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데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승승장구하는 그 곳, 복에 복을 받고 있는 그 곳, 오히려 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미끄러운 곳입니다.  아니면 6절 이하에 나오듯이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 됩니다.  그야말로 괴물이 됩니다.  한국 교회가 특히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위하여 주문처럼 외우던 기도가 있습니다.  머리가 될찌언정 꼬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구요, 공부 잘 해서 하나님 영광 드러나게 해 달라구요.  하나님은 그런 기도도 들어주셔서 지금 한국의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교인입니다.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장, 차관급 인사들에 소망교회 출신들이 너무 많아서 이젠 놀라지도 않습니다.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의 지도층 인사들의 뒤에는 기도하던 어머니들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승승장구하고, 복에 복을 더 해주었더니, 교만하고, 강포하고, 압제하며 그야말로 미끄러운 곳에 있습니다.

복에 복을 받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합당하게 누려서 미끄러운 곳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잠언 30장에 아굴의 기도가 있습니다.  30장 7절부터 9절입니다.  연봉 5000만원보다 1억이 좋겠죠.  그런데 그 만큼 더 미끄러운 곳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돈 많으면 쓰느라 정신 없습니다.  없으면 버느라 정신없구요.  결국 아굴의 기도처럼 그 중간의 지점이 안전합니다.  많이 주시면 더 많이 나누라고 하시는구나 알아 듣고 나누면서 사시면 더 복을 주시겠죠.  그것이 복에 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나누려다 보니 정신 없이 온 것 같은데요 다시금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오늘 읽은 본문의 야베스에 관해서는 이 본문 외에 성경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습니다.  일단 유다 지파인 것 같지만 족보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라도 다 같은 유다지파가 아니라 4장의 족보는 유다지파 중에서 왕족이 아닌 쉽게 말해 기타 등등에 포함되는 지파입니다.  그 중에서도 족보에 없는 것으로 봐서 장자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야베스’라는 발음이 히브리어의 ‘고통’과 비슷해서 어머니가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으니 유복자인지 모른다, 혹은 야베스가 장애가 있었던 것 같다 온갖 억측이 난무합니다.  거기다가 형제 중에 존귀한 자라는 구절로 봐서 이 야베스의 기도 때문에 정상보다 못 한 상태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일단 장애를 가졌다는 말은 좀 많이 간 것 같구요, 유복자도 그렇습니다.  유다라는 이름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이스라엘의 지파가 된 그의 형제들의 이름은 아버지인 야곱이 아니라 그의 다양한 부인들 즉 어머니들이 지은 겁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유복자면 그 형제, 아니 동생은 없겠죠.  형들과의 터울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결국 다 아버지 없는 상태로 자라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형들보다 조금 나았다는 게 엄청난 축복인 것처럼 과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축복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전의 불행을 과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나의 지경’이라는 것에서의 지경을 영적으로만 해석하기도 힘들고, 또한 땅으로만 해석하기도 힘듭니다.  거기다가 땅을 넓힌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미 서로 정해져 있는 각 지파의 땅 혹은 가문의 땅이어서, 그건 왕이라도 안 된다는 것을 나봇을 통해 보았습니다.  

또한 사고 팔더라도 50년마다의 희년을 통해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론 희년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없다고 합니다만 원칙은 원칙입니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에서 환난 또한 특정한 전쟁이나 천재지변인지 도무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인생의 괴로움인지 야베스의 특정한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야베스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확실한 증거가 없는 추측일 뿐입니다.  한 가지 큰 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역대기라는 책은 멸망하고 흩어졌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 둘씩 다시 모이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나를 돌아보며 만든 책입니다.  

그런 와중에 ‘고통’과 발음이 비슷한 야베스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이 이런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 상황도 야베스 즉 고통의 상황인데 우리도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모세가 누구인지, 아브라함은 누구인지, 유월절은 어떤 것이며, 또 희년은 어떤 것인지도 모르던 사람들에게 다시금 하나님을 가르치던 상황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던지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고 자세하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라서 족보 사이에 소개하듯 끼워놓은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는 이 구절이 보석과도 같다고 하는데, 그렇게 중요하고 보석 같은 이야기를 이 넓은 책 속에서 이렇게 흘러가듯 말씀하고 지나가실 리가 없습니다.  이 보다 더 많은 기도문이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의 충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보았을 때 야베스의 기도라고 하는 이 구절은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이 초급 수준에 머무르는 이야기입니다.  바울 식으로 표현하자면 단단한 식물이 아닙니다.  저희 집 아이가 먹는 이유식과 같습니다.  못 씹어 먹으니까 다 섞어 갈아 먹입니다.  몸에 좋은 것 골라서 얼르고 달래가며 먹입니다.  

쉽게 말해 이유식 먹는 단계에서는 많이 봐줍니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 하는 아기가 해 달라는 것 다 해 줍니다.  일단은 그렇게 키우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커 가면서 더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게 합니다.  넘어져도 혼자 일어나기를 바라고, 훌쩍 커서는 혼자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할 때가 있겠죠.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아플지 모르지만 그래도 혼자 이겨나가야 하는 상황이면 모르는 척 지나갑니다.  그저 밥이나 먹자라고 할 뿐이죠.  그렇게, 그렇게 커 나가기를 바라는 것 아닙니까?  야베스의 기도가 신앙의 전부인양 하는 건 마치 이유식 먹으면서 음식을 논하고 미식가인 것처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돌아와서 근원적으로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어떤 복을 구해야 하는가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가 가고 싶은 방향을 정해놓고 우리가 가고 있는데 힘이 조금 드니까 하나님께 뒤에서 조금 밀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전거에 모터 달린 거 있죠?  오르막 갈 때는 그 모터의 힘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평지에는 내가 페달을 밟으면서 자전거의 맛을 조금 느끼다가 오르막 나오면 버튼 눌러서 한결 수월하게 올라가는 것.  일상에서는 우리가 그냥 살아가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기도해서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갈급해 하십니까?  아니면 먹고 살만 한데 저것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야베스의 기도 같은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동생을 죽이고 쫓겨나는 가인의 기도도 들어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형 에서에게서 도망칠 때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고통 속에서 환난 속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필요한 분이 있을 겁니다.  어느 누구나 그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작정 복에 복을 더 해달라고 떼 쓰는 게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굴의 기도처럼 하나님이 없다 할만큼의 재산은 애당초 바라지도 않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게 여기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는 갈렙의 담대한 외침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우리들은 나름 공부 잘 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고, 또한 이곳에 모일 만큼 건강합니다.  그래서 더 미끄러운 곳에 서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잊고 당연한 것으로 혹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면 거기가 바로 미끄러운 곳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구할 수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 같은 유아기적 기도도 필요할 수 있지만 더 장성한 자의 기도를 하십시오.  또한 복에 복을 더하사를 외치면서 미끄러운 곳으로 가지 마시고, 오히려 아굴의 기도를 기억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꿇어 엎드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고백 위에서 여러분만의 기도문을 써 가시기 바랍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몰라 고난 받고, 때로는 낙망하며 눈물로 그 길을 걸어갔던 것이 아닙니다.  더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길은 히브리서 11장의 많은 경우들처럼 나라를 이길 수도 있고 톱으로 켜는 것을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복에 복을 주시고자 기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시려는 복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복이 오히려 화가 되어 우리가 다칠까 해서 우리가 아까워서 조심하시는 겁니다.  가나안을 허락하실 때도 그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되지 않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운전이 미숙한 아들에게 차 키를 건네기를 꺼려하는 것은 차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 차가 아들을 다치게 할까봐, 아들이 아까워서 조심하는 겁니다.

여러 찬양이 있겠지만 455장을 택했습니다.  가사를 보시죠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 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까?  이유식을 먹는 걸음마 겨우 떼는 신앙의 수준을 벗어나서 멀고 험한 길 앞에서도 주님만을 따라가겠다는 다짐이요 소원입니다.  나의 궁핌함은 나의 필요는 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채워주실 것이니 주님만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많아 교만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물질이 없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운 겁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느 가사의 어느 구절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온 날들 속에서의 감사가 있을 수 있겠구요, 다가올 날들의 다짐과 기도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려면 주님을 찬송하면서,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게 하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의 다짐이요,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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