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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덕을 세우는 길 (롬 1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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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1-11장까지는 믿음이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12장부터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한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 것인가를 강조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덕을 세우는 생활이다. 1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합창을 잘하려면 세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 악보를 정확하게 읽고 악보대로 불러야 한다. 둘째, 지휘자를 잘 보고 따라가야 한다. 셋째,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맞추어야 한다. 나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파트의 소리를 듣고 맞추고 또 같은 파트의 다른 사람의 소리도 듣고 맞추어야 한다.

신앙생활도 합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배우고 그대로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의 인도를 잘 따라가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생활이기 때문이다. 합창을 할 때 옆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함께 소리를 맞추어야 화음이 되듯이, 신앙생활도 다른 사람과 화목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덕을 세우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나 자신, 이웃과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저 사람과 내가 모두 좋으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만 좋을 수밖에 없다면 내가 희생하고 손해를 보아야 한다. 또 내가 손해보고 희생해서 남도 좋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사람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어쨌든 덕이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덕을 세우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다른 사람과 뜻을 같이 해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목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덕을 세울 수 있을까?

강한 자가 되라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강한 자’란 ‘능력 있는 자’란 뜻이고, ‘약한 자’란 ‘능력 없는 자’이다. 참는 것도 힘이 있는 강한 자가 참는 것이지 약한 자는 참을 것도 없다.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이해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지 아무 것도 모르면 남에게 덕을 세울 것이 없다. 가진 것이 많은데 이웃을 위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일단은 내가 강한 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강한 자란 믿음이 강한 자를 말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고 모든 행위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약한 자의 약점을 덮어주고 감당해 주는 것이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든지 안 먹든지 분명한 확신과 근거를 가진 후에 덕을 세우기 위해 참아주고 양보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장점은 최대한 크게 보아주고 그의 단점은 최소한으로 작게 보아주고 덮어주면 불편한 관계도 화목하게 되고 하나가 될 수 있다. 슬픔을 당한 사람도 그의 아픔과 슬픔도 자꾸만 건드리거나 말하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덮어주어서 아프고 슬픈 기억을 다시 되살리지 않게 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이나 아픔이나 슬픔은 잊어버리고 덮어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덮어주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고 그럴 때 관계가 회복되고 덕을 세울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될 때 가능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고 믿음의 능력이 강하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섬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의 장점은 크게 보이고 단점은 작게 보인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은 덮어주고 슬픔과 아픔은 감추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화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잘 길러서 믿음이 강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라 
“1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새번역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덕을 세우려면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 덕은 깨진다. 어느 정승의 술좌석에 애첩이 함께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호롱불이 꺼졌는데 그 사이에 한 사람이 그 애첩의 손을 잡았다. 애첩이 정승에게 “내 손을 잡은 사람의 갓끈을 끊었다”고 말하자 정승은 “불을 켜기 전에 모두 갓끈을 끊읍시다”라고 했다. 모두가 친구인데 밝혀서 좋을 것이 무엇인가? 모르는 게 낫지. 이것이 덕이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기쁨만을 위하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기가 쉽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만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게 된다. 또 자신에게 대한 말도 좋은 소리만을 들으려고 한다. 나에 대한 나쁜 소리를 들으면 다른 사람과 화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자기감정이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것은 자기감정을 따라 자기만족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정 위에 지식이 있고 그 위에 의지가 있어야 한다. 감정은 쉽게, 자주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정보다는 선한 지식을 가지고, 그리고 잘 참을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감정대로 한 것은 반드시 후회하게 되고 지식과 의지로 한 것과 사랑으로 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도 그렇게 하고 싶은 감정을 따라서 하기보다는 선한 지식과 의지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나를 기쁘게 하고 나의 감정을 만족하게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의 감정과 기분을 따라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만족, 나의 유익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려야만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웃을 기쁘게 하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새번역 “2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웃을 먼저 기쁘게 하고 그로 인해 나도 기뻐할 수 있는 정도의 인격이 되어야 덕을 이룰 수 있다. 덕 있는 사람은 상대방을 기쁘게 해놓아야 내가 기쁠 수 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생각해 보라. 진정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고 그것을 기뻐한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참 인심이 좋다. 그중에서도 술 인심이 가장 좋다. 술자리에 가면 그 비싼 술을 마시기 싫다는 사람에게도 자꾸 마시라고 권한다. 안 마시면 마구 화를 낸다. 술꾼들은 상대방이 즐겁게 마셔야 자기도 즐겁게 된다. 세상인심이 술 인심만 하다면 세상은 싸움도 없고 바뀔 것이다. 그 비싼 술을 서로 먹이려고 애를 쓰듯이 남을 위한다면 이 세상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미국 뉴욕 브롱스에 스파포드 소년원이 있다. 범죄 청소년들을 수용하고 있는 교도소이다. 어느 해 12월 초에 글로리아 와이즈라는 할머니가 소년원을 찾아왔다. 성탄절까지 3주 동안 자원봉사로 소년들을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와이즈 할머니는 소년들에게 “내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어 줄 테니 원하는 사람은 모두 내 프로그램에 참가하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그중 한 소년이 소리쳤다. “우리는 악마의 도구에요.” 모두들 깔깔대고 웃었지만 180명의 수용자 중에 25명이 와이즈 할머니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프로그램의 내용은 양로원에 보낼 선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성탄카드 만들기, 도자기에 색칠하기, 선물 만들기 등의 작업이 다 끝난 후에 16세의 지미라는 소년이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줄 선물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본 것은 난생 처음이에요. 어떤 분이 이것을 받게 될지 그 기뻐하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요.” 

우리 교회에 매월 무료로 노인 분들의 머리를 만져주는 봉사팀이 있다. 직장을 쉬고, 가게 문을 닫고 나와서 기쁨으로 일한다. 또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나 중환자들을 찾아가서 목욕을 시켜주는 분들도 있고, 말기암 환자들을 찾아가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돌보는 호스피스 사역을 하는 분들도 있다. 모두가 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그것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참 사랑, 참 믿음이다.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가 기쁘고 즐겁기를 원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애쓴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한다면, 너를 즐겁게 해주어야 나도 기쁠 수 있다는 믿음과 인격으로 덕을 세우기를 힘쓴다면 시험도 유혹도 없고 화목한 세상이 될 것이다. 너와 나 모두가 기쁘게 되면 좋겠지만 부득이한 경우라면 내가 양보하고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를 힘써서 덕을 세우라.

서로 받아주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단점이 있고 실수와 잘못이 있고 부족함이 있어도 사랑으로 너그럽게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나와 다른 점이 있어도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받아주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내 멋대로, 내 욕심대로 죄를 지으며 살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죄가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 위에서 대신 담당해 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서로 받아주라는 것이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사랑도, 용납도, 용서도 주의 사랑과 용납과 용서가 내게 주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니 나도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고 하면 내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 나를 값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신 그 용서와 사랑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아직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너그럽게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한 회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받아주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8-12절은 유대인과 이방인도 다 같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구원받았으니 그들을 차별하지 말고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방인들까지도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시고 종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9-12에 반복해서 ‘열방’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이라고 무시하고 멸시하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9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10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11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12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인인 우리를 조건 없이 받아주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턱이 높거나 교인들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안 된다. 교회는 죄인이 구원받아서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어떤 죄인이라도 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곳인데 그 교회에 아무나 올 수 없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사람을 받아주어서 덕을 세우기를 힘쓰자.

소망을 가지라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소망이 확실하고 소망이 넘쳐야 한다.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기쁨을 주셔야 누리고 평강을 주셔야 누리고 성령 충만케 하셔야 소망이 넘친다는 것이다. 내 안에 소망이 있고 내일을 볼 수 있어야 덕을 세울 수 있다. 내일을 모르면, 약속을 못 얻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마음이 조급하고 좁아져서 아무도 못 받아들인다. 그러나 소망이 확실하면 모든 사람을 받아줄 수 있고 덕을 세울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이 내 안에 넘쳐야 한다. 내 안에 소망이 있으면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되고 그 믿음으로 덕을 세우며 살게 된다. 소망이 잇기 때문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받아줄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절망적으로 여겨지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한 번은 극도의 절망감에 빠진 중년의 남자가 노만 빈센트 필 박사를 찾아왔다. 필 박사는 “긍정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이란 책을 써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분이다. 그 남자가 이렇게 말한다. “박사님, 이제 저는 끝장났어요.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필 박사가 물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구요? 그럼 종이에 당신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봅시다. 아내는 있습니까?” “예, 좋은 아내입니다.” 필 박사는 종이에 ‘좋은 아내’라고 적으라고 했다. “자녀들은 있습니까?” “예, 저를 믿고 따르는 세 아이들이 있습니다.” “친구는요?” “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좋은 편입니다.” 계속해서 종이에 적어나가던 이 남자가 말한다. “어쩌면 제 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은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희망이 없는 상황이란 없으며 오직 그 상황을 극복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절망이란 희망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든지 희망을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 

어떤 소망인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지금 이 세상은 힘들고 어렵지만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영광된 삶을 살게 될 것을 바라보는 소망이다. 베드로전서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이 흔들리거나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다. 마음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고 위해주고 섬기며 덕을 세우며 산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두고 그것들을 의지하고 산다면 우리는 또 다시 절망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다 지나가는 것이고 다 놓고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는 소망을 찾을 수 없어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흔들리지 않고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소망이 넘치는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고 덕을 세우며 살아야 한다. 하늘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주며 덕을 세우라.

북아일랜드에 캘라한이라는 감리교 목사가 있었다. 당시 북아일랜드에서는 계속해서 영국에 속해 있자는 개신교인들과 남쪽 아일랜드 공화국과 합방하자는 천주교인들 사이에 17년간이나 싸움이 계속되어서 이미 2,500명 이상이 죽은 상태였다. 그래서 “아일랜드에는 개신교인도 많고 천주교인도 많지만 그리스도인은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물고 뜯는 곳이었다. 그러나 캘라한 목사가 섬기는 벨파스트교회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하지만 결코 종교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그의 교회에서는 새벽송을 부르는 성가대를 조직하고 천주교인들이 사는 빈민가를 방문하기로 했다. 경찰에서는 즉시 중지하라는 충고를 해왔다. 캄캄한 새벽에 개신교인들이 그 거리에 들어서면 반드시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며 그에 대해서는 경찰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캘라한 목사의 벨파스트교회 성가대는 그 거리로 들어서서 크리스마스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수처럼 지내던 그 집들의 창문이 하나둘씩 열리고 출입문이 열리면서 천주교인들이 촛불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크리스마스 찬송을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경찰의 예측과는 정반대였다. 캘라한목사는 말했다. “사람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싫어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함께 찬송을 부르는 사람과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강한 자가 먼저 나서서 약한 자의 손을 잡는 법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가? 말씀 한 마디면 화려한 궁전을 지으실 수 있는 분이셨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다.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빵 한 조각도 만들지 않으셨다. 수많은 천군천사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말없이 매를 맞고 침 뱉음을 당하셨다. 다른 사람의 상처와 질병은 다 고쳐주셨지만 자신은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도록 내버려 두셨다. 죽은 나사로는 살려주셨지만 자신은 십자가 위해서 힘없는 자처럼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자신은 전혀 돌보지 않으시고 오직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만 사셨고 남을 위해서만 사신 분이었다.

신앙생활이란 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이웃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고, 사랑으로 서로 받아주고 섬기며 덕을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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