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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갈 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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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갈 3:6-14)

   
오늘은 개신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 제493주년이 되고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대학의 성당 정문에 로마교회가 판매하고 있는 속죄권 즉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하여 95개 조문의 반박문을 내어 붙였습니다.  이것은 대학에서 학문의 방법으로 주로 하는 토론의제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내어 붙인 10월31일 마지막 주일인데 이 주일을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14-15세기 당시 유럽은 십자군전쟁을 끝내면서 동서의 교류가 활발하게 되었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예부흥,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탈리아는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문화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로 인하여 지식은 폭발적인 발전을 가져왔으며, 학문의 발전은 속도를 더하였습니다.  그 중 예술분야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운둔의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문예부흥, 이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을 부채질 하였습니다. 

로마에서 르네상스의 예술을 숭상하며 이끌어가는 교황은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당은 그 하나로서 위대한 작품이요, 온갖 예술품으로 가득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적인 건물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교황의 눈에는 교인들이 돈으로 보였습니다. 수많은 돈을 거두려고 면죄부를 팔아야 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으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티칸으로 끌어들인 사람입니다.  교황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재임 중에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교황청으로 불러들여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주었습니다.  교황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돈을 끌어 모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온 교회가 헌금해놓은 것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전임 교황 율리우스2세가 모아둔 저금과 레오 자신이 재임하면서 모은 수입과 헌금을 다 탕진하였습니다.    

돈을 모으다 모자라니 면죄부를 발행했습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야 하는데 가장 만만한 나라가 독일이었습니다. 교황은 독일의 알브레히트라는 사람을 마인쯔의 교구의 대감독과 동시에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할베르쉬타트의 행정권도 주는 조건으로 많은 헌금을 선불로 받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을 위한 속죄권, 즉 면죄부를 판매하는데, 절반의 헌금을 알브레히트로 가지게 하면서 독일에서의 판매권을 주었습니다.  알브레히트 감독은 독일에서 속죄권을 팔 수 있도록 책임자를 선정하는데, 능변가인 도미니카의 수도사인 테젤이라는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이 사람 테젤이라는 사람은 말을 청산유수와 같이 잘 했습니다.   지금 팔고 있는 속죄권은 지옥에 간 사람이라도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 속죄권이며, 거룩한 대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는 헌금으로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헌금통에 돈이 떨어지는 쩔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외쳤습니다. 가슴이 설레게 하는 속죄권이었습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그 속죄권을 사놓아야 했습니다. 

여기에 반박문을 내어걸고 면죄부의 부당성을 경고하고 나선 사람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이름 없는 한 교수,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당시 독일 신성로마제국은 황제 아래에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는 7명의 선제후와 수많은 제후들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은 작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작센의 선제후의 보호 아래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문의 토론의제를 내걸 때는 종교개혁을 하리라는 생각으로 붙인 것도 아니요, 어떤 확정된 프로그램으로 진행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만스펠트의 공작령인 아이슬레벤에서 한수 루터와 마가레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을 나와 아버지의 소원대로 법학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법학도 시절에 루터는 인생의 전환을 가져올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506년 6월 2일 그는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스토테른하임에서 큰 폭우를 만났습니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그의 옆에 있는 숲을 때렸습니다. 그 벼락으로 함께 가던 친한 친구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면서 “성안나여 살려주소서! 살려만 주시면 수도승이 되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습니다.  안나는 천주교회에서 마리아의 어머니라고 하여, 광산업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었기에 안나를 부른 것이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광산업자였습니다. 

루터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해 7월 17일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번개가 치듯이 갑자기 닥칠 죽음과 그 이후의 하나님의 심판을 온전히 준비하는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항상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았습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수도사 루터는 엄격한 금욕적인 수행을 감내하면서 그는 자기의 속사람, 내면적인 자아성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사의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사가 되기 이전보다도 더욱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수도원의 원장도 알아주는 신앙인이었고, 특별히 부원장 슈타우피츠 박사는 명설교가였고, 성경연구에 탁월한 사람이었고, 고행으로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고, 에어푸르트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루터는 그의 고백신부이며 수도원 부원장인 스타우피츠박사의 권면을 받아 비텐베르크로 가서 성서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스승을 대신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시편을 강의하였습니다.  그는 시편을 연구하면서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본문들이 있었습니다.  

시편 22편을 연구하면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라는 말씀을 강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복음교리의 핵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22편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는 다윗의 예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여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사색과 연구 끝에, 이 시편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져야 하는 인간을 대신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버림을 받으시고, 죄의 대가를 치르고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시31:1의 말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원하며 자유하게 하는 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는 후에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죄악에서 건지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시실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대속하신 구속의 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공의만이 죄악에서 건지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며,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로 그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1516년 9월까지 로마서를 강의하였는데, 로마서를 통하여 그의 실존적인 고민과 시련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탁상담화에서 이런 말로 회고하였습니다.  “의로운” 그리고 “하나님의 의”라는 말들이 번개처럼 그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루터는 무기력하기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면, 그 분은 인간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과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의로운 자로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의가 믿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곧 자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새로운 기운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이제는 그 의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비였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흠 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여전히 죄인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의 양심을 불안하였고, 그의 선한 행위를 가지고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고행에 고행을 거듭하면서도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원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다시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주시고 계속하여 억압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와 죄의 형벌과 심판을 가지고 고민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롬1:17의 말씀“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기 위하여 낮이나 밤이나 몸부림을 쳤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가능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사람의 선한 행위나 노력에 의한 만들어지는 나의 의,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의, 수동적으로 받은 의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면서 이루신 그 의, 그 아들의 공로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그 의로우심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금식하며 고행하고, 자기를 연단하면서 수련하여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루터는 로마를 방문하면서 수없이 고행하였어도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생각하였습니다. 수많은 금식과 수련과 고행이나 순례나 성자숭배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고, 구원의 확신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터는 고행을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회개하였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도 여전히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금식도 잘 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금식이라고 해야 얼굴이 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시시하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개혁운동의 핵심적인 주장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오직 예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은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신앙, 믿음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아들을 통하여 대속하시는 은총을 받아들이는 손과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믿음 외에는 그 어떤 공로나 선행이나 율법이나 지식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만 가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을 외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우리 주님이 대속하신 공로를 힘입어야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의로우시기에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벌하고 심판하시고 저주하시고 지옥에 던져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모든 진노와 심판을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에게 다 쏟으시고. 다 짊어지게 하시고, 죄 없으신 주님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아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은 나를 대신하여 아들을 보내어주셨으며, 아들이 나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속량하셨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의롭다, 하나님이 내어주신 선물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아들이라는 선물을 받아 아들을 구원의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의롭다,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 보십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여, 믿게 하시고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 예수님이 다 해결해주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과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과의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는 과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 속하는 사람이요,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9절 말씀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하나 있고, 율법을 다 준행하므로 구원받는 것이 있는데,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주기를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몰라주시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보아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그 몸으로 다 받으셨습니다.  죄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내신 최후 최선의 방책인 그 아들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들을 다 구원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도 받기 전에 의롭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더럽고 추한 죄를 고백하면서 전폭 하나님만 신뢰하며, 하나님에게 맡긴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주님이 다 해결해주셨다고 믿기만 하시면 그는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를 보시지 않고 아들의 의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

선한 행실은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선행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선하게 살고 남을 배려하고 사랑으로 살아가지만 그것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고, 우리의 믿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참된 믿음”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외줄타기 곡예사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습니다. 곡예사는 반대편에 무사히 도착해 큰 박수를 받은 후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건너편으로 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믿는다고 소리쳤고 곡예사는 다시 말했습니다. “저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중 저와 같이 건너편으로 건너갈 분은 제 어깨에 올라타십시오.”그러나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 한 소년이 손을 들었고 곡예사는 그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줄타기를 마쳤습니다. 사람들이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았니?” 소년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안 떨어질 줄 알았어요. 전 제 아버지를 믿거든요.” 곡예사는 아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저의 더럽고 추한 죄악을 다 용서해주시고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내신 방법이 구원의 유일한 길인 알기에 것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으로 확신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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