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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성장이 멈추는 병 (엡 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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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 멈추는 병 (엡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오늘 참 무서운 병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오늘 희귀한 불치병 가운데 하나는 “프로제리아”(Progeria) 라는 병입니다. 일명 “조로증”입니다. 이 병은 주로 아이들에게 걸리는 병인데 아이들이 출생하여 자라다가 2개월쯤부터 3년 사이의 아이들에게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병이 오면 어느 날부터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세포가 정상인보다 10배나 더 빨리 늙어갑니다. 그래서 체구가 왜소해지고 탈모증세가 나타나고 어린 아이인데도 피부주름이 노인처럼 되고 어른처럼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노쇠현상이 급격이 나타나 나이는 분명 어린아이인데도 생김새는 노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부분 10년 정도 생존하다가 생물학적인 노화과정을 다 거친 후 죽는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식물은 심으면 자라야 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식물의 사명입니다. 동물도 태어나면 자라서 새끼를 낳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도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을 안 하고 도중에 멈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자라가라”고 말씀합니다. 신앙도 성장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에서 영적생활의 목표는 예수에게까지 자라가는 일입니다. 본문은 교회의 일체성, 다양성을 말씀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모두 예수의 지체들입니다. 고로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 됨과 온전함과 성숙함과 발전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정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 

여기 “참된 것“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의 할 일은 첫째가 “구원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할일, 기독교가 할일, 성도가 할일은 구원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신앙이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오늘 교회가, 성도들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성장이 멈추어 버립니다. 오늘의 고민이 이것입니다. 오늘은 자꾸만 신앙이 형식화되어 움직이지 않고 편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그 말은 성장이 멈추었다는 말입니다. 이 성장의 멈춤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주일이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31일 날 이루어졌으니까 오늘 주일이 종교개혁 493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그때부터 매년 10월은 종교개혁의 달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종교가 왜 개혁되어야 하는가 하면 신앙이 형식화되어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형식화 되었다는 말은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신앙이 죽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이 형식화 되어 생명력을 잃었다는 말은 신앙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생명력을 잃으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앙도 개혁대상이 됩니다. 밭을 오래 놔두면 흙이 굳어버립니다. 씨를 뿌려도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밭을 가끔씩 갈아엎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얼마나 신선하고 참신하였습니까. 그때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고 감격이 있었고 하늘이 새파랗게 보였습니다. 괜히 흥분하고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좋아보였습니다. 그런데 오래되니까 그 감격이 희미해지고 감각도 밋밋해졌습니다. 신앙이 굳어지고 형식화 되어서 생명력을 잃어서 그렇습니다. 마틴 루터가 처음 은혜 받았을 때 조그만 죄를 지어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때마다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였습니다. 갔다 오는 길에 머리에 좋지 않는 생각만 스쳐도 다시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였습니다. 신부가 보자니까 가관입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 올 때는 좀 큰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영적으로 살아있으면 아주 작은 생각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도 죄스럽게 생각됩니다. 그만큼 영적상태가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성도는 30년 전에 어느 교회 부흥회에 가서 헌금 약속한 것을 잊고 지키지 못하고 살아오다가 30년 후에 은혜 받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들고 온 분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영적감각이 참신해지고 예민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 참신하던 신앙도 어느 순간 멈추게 되면 굳어져서 감각이 떨어지게 됩니다. 다시 갱신하고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대로 두면 밭이 굳어버리듯이 내 마음도 영적상태도 굳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작은 생각들이 스쳐가도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도 좀 큰 것을 가져오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생명이 고갈되어 형식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 기독교가 그렇게 굳어갔습니다. 로마시대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속에서 400여년을 숨어살며 지냈습니다. 눈물겨운 삶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8%였습니다. 이 소수가 무한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결국 로마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무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 자유가 마침내 신앙인들로 하여금 마음에 긴장을 풀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가 성직을 매매하기까지 이르렀고 마침내는 면죄부까지 팔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 기독교가 세속화 되어서 갈 데까지 다갔다는 말입니다. 종교가 이렇게 되는 것은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을 잃어버린 신앙이 무슨 효능이 있습니까. 그때 뜻있는 신앙인들이 “이것은 아니다” “변해야 산다” “개혁해야 한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치기를 “성경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돌아가자”하고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1517년10월31일 날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 금년으로 493주년이 된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진보주의를 자꾸 말합니다. 진보주의는 좌파가 아니고 성경에서 자라고 말씀과 신앙에서 성장하는 것이 진보주의입니다. 믿음도 자라야 하고 사랑도 자라야 합니다.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은 곧 사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신앙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권고합니다. 참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복음을 전하고 구속을 전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매일 밥을 먹어야 하듯이 신앙인은 구원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신앙이 살아있고 성장하는 신앙입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 

여기 “범사”라는 말은 “모든 방법으로” 라는 뜻입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에게까지 자라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그”는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성장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의 목표이고 푯대이고 모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예수를 닮는 일입니다. 질적으로 예수의 충만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상에서는 이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델을 현대용어로 말하면 멘토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게 하는 것은 그 위인전 속에 모델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을 보고 배우라고 하는 것도 선배들에게는 본  받아야 할 모델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연결되고 연합하라 

모든 가지들은 나무에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지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인도 주님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에게서 공급되는 영적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지체들입니다. 예수 없는 신앙은 윤리 도덕생활에 불과합니다. 예수 없는 헌신이나 봉사도 자선행동에 불과합니다. 예수와 연결되었을 때 윤리도 도덕도 봉사도 생명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신앙인들이 예수와 연합되었다고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상당히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외형은 신앙인인데 내용은 신앙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내 입으로 구속을 말하지 못하고 구원을 말하지 못하고 예수를 말하지 못하고 천국을 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10년 20년 하면서도 구원에 대한 확신도 자신감도 구원의 기쁨도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의 지체라고 말은 하면서도 주님께 붙어 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생명력을 힘 있게 공급받던 사람도 오래 있으면 고갈되고 형식화 되는데 연합도 되지 못했는데 무슨 힘으로 실감나는 신앙성장을 이루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리새 신앙인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생명력이 없고 내용도 없고 힘도 감격도 눈물도 기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탄식하셨습니다. 

493년 전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그때 상태가 그랬습니다. 신앙이 형식화 되다 보니까 모양만 남았습니다. 오죽 타락하였으면 성직을 팔고 사고 그랬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때는 공공연하게 면죄부를 팔고 사고 그랬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은 내가 성장하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는 것입니다. 성장해야 발전하게 됩니다. 성장이 멈추면 그때부터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노화를 방지해야 합니다. 노화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육신의 노화가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속이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면 늙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20세 전후까지 싱싱하다가 그때부터 늙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피부가 탄력을 잃고 신경은 무디어지고 근육이 뭉치고 굳어지고 기관마다 마모되어 갑니다. 고상하게 늙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 정신의 노화입니다. 정신도 늙어갑니다. 아이 때는 마음이 맑고 정신도 맑고 생각도 신선합니다. 무슨 말이든 말 그대로를 믿습니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그대로 믿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어떤 아이는 그 말을 듣고 며칠 심사숙고한 끝에 짐 싸들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재미있어 하지만 아이들은 심각한 일입니다. 말 그대로를 믿어서 그렇습니다. 사우나에 가서 아버지는 탕에 들어가면서 “아 시원하다”하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탕에 따라 들어갑니다. 아이는 당연히 그 물이 시원한 줄 알고 따라 들어갑니다. 생각이 순수해서 그렇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큰 희망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와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모두 큰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너무 괴리감이 컸습니다. 현실의 세계는 대학생 시절의 생각이나 꿈이나 기대와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젊은이가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적응을 했다 하면 그 젊은이는 정신이 늙은 젊은이입니다. 그 젊은이는 그만큼 정신이 늙어서 타협에 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육신도 늙어가고 동시에 생각도 마음도 의식도 늙어갑니다. 

또 영혼의 노화도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육신적으로 태어나지만 동시에 영적으로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어느 날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내 영혼은 주님과 긴밀하게 교통을 성장을 발전을 확장을 깊어짐을 얻게 됩니다. 그래야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이룰 수 있고 영적교류를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서 활동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 상태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영적으로 거듭나고 나면 영적 성장도 멈추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영적 성장에도 조로증 즉 프로제리아 병이 있습니다. 조로증과 같이 성장이 멈추고 곧 이어 급격한 노화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성장이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성장 세포가 죽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내 영혼 안에서 영적 생명의 능력이 역사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영적 병입니다. 내 영적 성장이 날마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장하려면 중단 없이 자아포기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버림의 생활도 해야 합니다. 매일 내가 새로 지음받기 위해서 나를 주께 맡기고 의탁하는 삶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내 앞에 놓여있는 각종 우상들을 부수며 넘어가며 부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으며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장14절).” 

이 고백이 중단 없는 발전을 기원한 기도문입니다. 발전이나 성장이나 변화는 날마다 달려가는 생활에서 주어집니다. 달려가는 삶을 중단하면 곧 찾아오는 것이 영혼의 노화현상입니다. 내 영적 성장이 멈추는 순간 나의 영혼의 노화가 시작됩니다. 


영혼의 노화현상이 주는 것 

영혼의 노화가 시작되면 사람들을 슬프고 힘들게 하는 행동이 나타납니다. 내안에서 영적 성장이 멈추는 순간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시야가 멈추어지고 남을 쳐다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남의 부족한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내 눈의 티는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티가 눈에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남의 흠이 크게 부각되어 나타납니다. 내 신앙의 영적성장이 멈추고 남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순간 나는 늙어가는 것입니다. 영적 노화가 촉진되는 순간입니다. 그 노화현상이 중증에 도달하게 되면 눈의 초점이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서 너만 보게 되고 너를 심판하고 지적하고 흉을 보게 됩니다. 그 상태가 이미 바리새인이 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예수께서 가장 강하게 지적하신 부분입니다. 그때부터 신앙생활은 생명력을 잃고 형식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개혁대상입니다. 

내 영혼이 거듭나면 밝은 주의 영이 내게 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내 영혼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보이는 것이 나 자신의 부족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계속해서 나를 수정해 가게 됩니다. 수정해 가는 동시에 나는 계속 발전하고 성숙해 가게 됩니다. 계속 깨달음이 주어지고 수천 번의 굴복도 가능하고 수백 번의 회개도 기쁘게 하게 됩니다. 그때는 내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영원한 생명이 내 안에서 충만한 영의 자양분을 배출하게 됩니다. 내 안에 영성의 샘물이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삶에 찬양이, 기도가, 감사가, 기쁨이, 만족함이, 주께 영광돌림이 있게 됩니다. 

그 상태를 이사야는 40장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노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28-31)”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성장은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멈추면 곧 바로 노쇠현상이 일어납니다. 노화현상은 나를 볼 수 없게 하고 너만 보게 합니다. 아주 슬픈 현상입니다. 사람이 한자리에 오랜 시간 멈추거나 앉아 있으면 일어나기 싫어집니다. 낮에 잠을 잘 수는 있으나 잠시 눈을 붙이고 곧 일어나야 합니다. 낮잠을 오래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진보파가 되어야 합니다. 진보파는 좌파가 아니고 내 영혼이 계속 자라도록 멈추지 않고 발전시키는 것이 진보파입니다. 

살다 보면 다 쇠퇴하고 노화합니다. 늙습니다. 육신의 노화현상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신의 노화현상입니다.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노화현상입니다. 본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고 주님의 소원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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