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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건강한 신앙공동체의 회복 (느 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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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신앙공동체의 회복 (느 5:1-13)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번째 공동체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만드시고 그 가정 속에 사랑의 신비를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만 만드셨을 때에는 보시기가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보시기가 참으로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축복받은 공동체가 바로 가정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가정이 오늘날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2009년의 이혼건수가 12만 4천 쌍으로 2008년보다 6.4%가 증가한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혼인 건수는 어떨까요? 2009년에는 31만 쌍이 결혼을 했습니다. 이것은 2008년보다 5.5%가 감소한 수치입니다. 이 통계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는 세 명 중 한 명꼴로 이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9년 결혼 초혼자의 평균 연령을 살펴보면 남자가 31.6세, 여자가 28.7세입니다. 반면 2009년 이혼자의 평균 연령은 남자가 44.5세, 여자가 40.7세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보통 12~13년을 살다가 이혼한 꼴입니다. 이처럼 결혼과 가정의 축복이 점점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가슴은 아파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결혼이란 판단력 부족 때문에 한 것이고, 이혼이란 인내력 부족 때문에 나타난 것이고, 재혼이란 기억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여러분, 함께 사는 것,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도 자녀의 이혼으로 인해 아파하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건강한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것은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다는 뜻일까요? 계속 사랑만 한다는 것일까요? 서로 싸우고 다투며 찡그릴 때는 없다는 의미일까요? 늘 웃는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 하나가 되고 공동체로 하나가 된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만난 부부도 얼마나 자주 부부싸움을 합니까? 문제는 이 갈등과 다툼을 어떻게 극복하고 처리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요사이 집중호우로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365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멋지고 찬란한 태양만이 계속 비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이 땅은 머지않아 황폐한 지역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먹구름이 다가와야 합니다. 때로는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장대비는 홍수를 일으켜 엄청난 피해와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으로 인해 자연만물은 자정작용을 하여 나무와 꽃들이 다시 자라납니다. 저수지에는 물이 고이고, 농작물은 복을 받고, 우리는 생수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공동체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는 홍수가 나기도 하고, 태풍도 불기도 하며 때로는 먹구름과 같이 어두운 그림자가 인생을 덮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 다가오는 갈등과 다툼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기를 포기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거기에는 질서와 조화가 없습니다. 각기 다르게 파괴되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새롭게 만들고 창조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안에 질서와 조화와 아름다움을 만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오랜 인내심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느헤미야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에게 나타난 갈등을 보면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되었던 바벨론 땅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참혹하게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자고 유대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택한 백성임을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자존감을 다시 되찾자고 외쳤습니다. 그때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던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적인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외부의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외부에서 생긴 문제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가난했고 피폐한 생활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벽을 짓느라고 그동안 해왔던 경작을 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식량도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이자를 내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고통은 극에 도달했고 마침내 느헤미야를 향해 외쳤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느헤미야 5:1) 

원망과 탄식이 가득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남편도 부르짖고 아내도 부르짖었습니다. 온 가족의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거창한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 우리가 소중하고 좋은 일을 한다. 성벽 재건이라는 민족적인 일을 감당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중하고 거국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은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느헤미야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느헤미야 5:13) 

그런데 우리는 13절에 가면 그 분위기가 바뀐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우성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변하여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아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커다란 위기의 자리가 어떻게 동역하고 함께 기뻐하는 자리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바로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지도자들, 귀족들, 민장들이 느헤미야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겸손하게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스라엘의 내적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조금만 더 참으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상태가 너무 급박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었고 자녀들은 종으로 팔려가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때 성벽 짓던 일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둘러보았습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을 하다보니 먹을 것이 없고 그들의 생계가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높은 이자를 조건으로 돈과 식량을 빌렸는데 식량을 또 사기위해서는 자기의 집과 밭을 다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금도 너무 많았습니다. 토지와 집을 저당 잡힌 사람들이 이자를 내다보니까 세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노예로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애국과 애족을 위한 모든 일들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집안의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가족과 내 가정이 안전해야 애국이 가능합니다. 내 가족이 평안해야 애국이 가능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모든 것을 멈추게 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느헤미야가 보여준 리더십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긍휼함이 공동체를 이끌어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느헤미야 5:6~7)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있는 사람들, 가진 사람들, 그리고 없는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하고 있던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다. 하나님도 백성들을 긍휼히 여긴다.” 가진 자들의 마음이 넉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는 자들이 마음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도덕적인 의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공의를 내세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아무리 강하고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우리가 지도자가 될 때 가져야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엄정해야합니다. 젊었을 때 공의와 정의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연약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해지는 비결입니다. 젊었을 때는 너그러웠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 엄정해지고 공의와 정의만을 이야기한다면 아무도 그런 지도자 밑에서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말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악한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지금도 독재자들, 전제 정치를 하는 지도자들 밑에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북한 땅만 봐도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지도자,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권력을 보존하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본문에 귀족들이란 영어번역을 보면 ‘the nobles’라고 되어있습니다. 각 지방의 사회정치적인 유지들이었습니다. 민장들이란 ‘the officials’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고위관리들, 오늘날로 표현하면 고위공무원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런 폐허가 된 사회 속에서도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높은 이자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식량을 비싸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자를 갚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그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 5:8)

느헤미야는 그들을 향해서 꾸중하고 있습니다. “형제보다 돈이 더 중요한가? 동족보다 돈이 더 중요한가? 동족들이 이렇게 고통당하는데 우리만 잘 살아서 되는가?” 그런데 이 귀족들과 민장들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느헤미야의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하는 말에 순종했습니다. 

이 사회에 가진 사람들, 넉넉한 사람들의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저는 소망교회를 보면서 늘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게 33년 동안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축복을 주셨을까요? ‘한국교회를 섬겨라. 가난한 교회를 섬겨라. 한국사회를 섬겨라. 이 시대를 섬겨라. 오지에 있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겨라. 전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망교회에 축복을 주신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일당백입니다. 여러분들이 일당만입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연약한 자,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 이 땅의 아파하는 자들을 끌어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증거 할 때,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민족, 이 교회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지도자가 될수록 더 넉넉해져야 합니다. 지도자가 될수록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돈을 똑같이 사회주의적으로 나누라는 것은 아닙니다. 생존권이 위협당하는 사람들,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껴안아야 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갖고 있던 두 번째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세상에 조롱을 받았을 때 통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느헤미야 5:9) 

느헤미야는 우리의 행한 일이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야!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동족을 팔아먹고 있구나! 동족에게 고리대금을 해서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구나!” 이에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모독을 당할 때 우리의 가슴이 아픕니까?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이 모독을 당한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까? 느헤미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공동체의 모습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비난하는가? 이것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우리 동족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귀족들과 민장들에게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그들이 함께 나아와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말대로 우리가 변화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스스로 솔선수범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진 세 번째 리더십은 그가 솔선수범했다는 것입니다.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느헤미야 5:10) 

느헤미야 역시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느헤미야가 말합니다. “이제 보니까 저들이 정말 고생했구나! 저들이 그동안 고통 속에 있었구나!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했구나! 나도 그랬고 내 형제들과 종자들도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꾸어주었는데 우리부터 이자 받기를 그치자! 우리의 연약한 형제들을 우리가 받아들이자!” 느헤미야가 이렇게 말했을 때 모든 사람들, 지도자나 평민들이나 할 것 없이 유대의 모든 백성들이 “아멘! 아멘! 우리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한 믿음의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임을 확인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공의와 정의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과 긍휼입니다. 사랑과 긍휼을 가진 지도자가 있어야 그 공동체가 편안해집니다. 가정에 불화가 있습니까? 남편으로 내가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내를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로 내가 더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남편을 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가정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도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마음을 간직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공동체는 건강해질 것이고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축복의 통로가 되어 가정과 직장,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감당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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