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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와 겨자씨 믿음 (마 13:31-32,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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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겨자씨 믿음 (마 13:31-32, 17:14-20)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13:31-32)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14-20)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라의 백성들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은혜로 주십니다(벧후 1:3).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왕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사탄 왕국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의 선한 싸움’ 이라고 했습니다. 

딤전 6: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믿음이든 있어야 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겨자씨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두 본문은 이 겨자씨 믿음에 대한 두 개의 중심 구절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17장을 봅시다.

19-21절=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13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을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31-32절=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산을 움직이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겨자씨는 큰 나무로 자란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곱 가지 비유 가운데 세 번째입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미약하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나 나중에는 놀랍게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의 씨앗(시나피)은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그것이 땅에 심겨져 완전히 다 자라면 3m가 될 만큼 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겨자씨는 그 씨앗의 원래 크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하는 식물의 상징적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 하실 때는 보통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계속 작은 것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늘 커져갑니다.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 오신 성자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겸손하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천사들은 베들레헴 마구간에 오신 주님의 소식을 들판의 몇 명의 목자들에게만 알렸습니다. 신문에 기사 한줄 나지 않았지만, 구유에 뉘인 아기에게는 사탄 왕국 전체를 파괴할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주님이 오신 사건은 사소하고 거의 보이지도 않았지만 세상 전체를 바꾸는 과정이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일개 목수의 아들이요 별볼일 없는 나사렛 동네 출신으로 그야말로 하찮은 지위와 신분의 소유자일 뿐이었습니다. 공생애 기간의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의 무리는 당시의 다른 쿰란 공동체나 바리새파 무리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곳은 120명의 헌신된 자들로 꽉 찼습니다. 대단한 사건은 아닌 것 같았지만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 도시를 흔들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전한 복음은 초대교회를 통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헬라와 로마, 온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으로 확장되면서 그 규모는 몰라보리 만치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할 매체도, 다른 현대적인 수단도 없었지만 그들이 행한 일에는 하나님 나라의 고유한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겨자씨의 특성 중 그것이 큰 나무로 자랄 가능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모든 겨자씨가 나무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여러 종류의 덤불로 자랄 뿐입니다. 나무로 자라는 겨자씨는 자연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더 높은 법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변종이 분명합니다. 이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이유는 씨의 본성에 기인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자연적 한계에도 큰 나무로 자라는 품종의 씨가 될 자질입니다.

본절의 비유는 평범한 덤불로 끝나버리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겨자씨 비유는 자연의 제한 없이 땅을 깨고 나와 하늘을 꿰뚫고 천상에서 나뭇가지를 펼치는 교회, 하늘의 정사와 권세를 파괴하고 바로 도시를 뒤덮은 환경의 풍토를 바꿀 그런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씨가 자라면 도시를 덮고 있는 어둠의 나라의 분위기 대신 하늘나라의 분위기가 땅에 내려와 이를 대치할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의 비유 속에는 세계 도처의 모든 도시에 위대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성장해서 천국에 가지를 펼치고 서로 맞닿으며, 그들이 편 가지가 함께 지붕이 되어 모든 열방이 천국의 그늘 아래 덮이게 될 때까지 자라날 교회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하게 키우십시오. 여러분의 구역이 겨자씨의 특성을 나타내도록 농부의 열심을 가지십시오. 우리 교회를 주님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교회로 성장, 성숙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겨자씨는 왕국의 일부여야 한다 (왕국의 특징: 절대적 순종)

31절=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하나님의 겨자씨는 자연적 본성에 맞서는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가지를 펴서 천상을 가득 채우고, 천국의 그늘을 만들어 지상의 모든 것이 그 보호의 그늘 아래 살아가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겨자씨가 사소한 덤불 대신 거대한 나무가 되도록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필수 요소가 있고 나머지는 그로부터 절로 흘러나옵니다. 

첫째로 겨자씨는 왕국의 일부여야 하고, 둘째로 겨자씨는 산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겨자씨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일면을 알아봄으로써 겨자씨 믿음을 살펴봅시다. 겨자씨는 그리스도 왕국의 일부여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큰 나무는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 교회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면 이것은 대단한 뉴스이므로 기자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가 언덕 위의 도시처럼 숨길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숨길 수 없습니다. 설사 숨기려 해도 안으로부터 능력과 영광이 흘러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겨자씨에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분명히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정부가 도래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우리는 그분께 순종하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그냥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하시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 다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직 절대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겨자씨 믿음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 뜻에 즉각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즉각적 순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주님의 뜻에 피동적인지, 얼마나 자주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모릅니다. 

세례요한의 출생 이야기에 나오는 사가랴의 모습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예가 될 것입니다. 나이들어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사가랴에게 천사장 가브리엘을 보내십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그리고 그 천사는 하나님께서 사가랴의 아들에게 행하실 놀라운 일들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18절).

“이 일이 일어날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가랴의 반응에 가브리엘 천사의 놀라는 모습을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19절). 

좀더 감정을 실어 말한다면, “이봐 사가랴 제사장,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방금 왔어! 나는 당신에게 줄 하나님의 말씀(레마)을 가지고 왔는데, 제사장 쯤 되는 자가 이 일이 일어날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가브리엘은 매우 놀랐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무조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지.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 우리는 빛의 속도로 순종할 뿐이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의 피조물인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의문을 품거나 미루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야심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즉각적으로 완벽하게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겨자씨의 첫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겨자씨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겨자씨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면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열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내 삶에도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나의 바램인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추구하려는 강한 열망, 그 열망이 여러분의 믿음을 겨자씨 믿음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겨자씨가 되는 첫 번째 요소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겨자씨는 여러분 안에서 시작되어 급격히 외부로 퍼져나가며 이윽고 모든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3. 겨자씨는 산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산을 움직이는 믿음)

19-20=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본절은 겨자씨의 또다른 본질적인 차원을 보여줍니다. 겨자씨는 산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눅 9장을 함께 참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파송하셨고, 그들은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변화산 위에 있을 때, 그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홉 제자들은 귀신 들린 소년을 만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마도 사탄 왕국의 대장 귀신 중 하나가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탄 왕국을 파멸시키기 시작했음을 알고 직접 내려와서 소년의 몸을 점령하고 제자들과 맞선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애썼지만, 그것이 잘 안 되자 그들의 믿음은 새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마 17:14-20).

성도 여러분! 일단 여러분이 능력을 발휘하고 겨자씨가 싹이 나기 시작하면, 마귀의 세력이 여러분을 대적할 것입니다. 마귀는 많은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막 싹트기 시작한 여러분의 나무 바로 위에서 이를 밟고 자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자씨가 더 큰 나무로 자라는 것을 보려면 ‘산을 움직이는 방법’ 도 알아야 합니다. 

이 대장 귀신은 직접 와서 사도들에게 대항했습니다. 악한 영들의 큰 산과 같은 대장 귀신은 소년을 장악한 채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 라고 했습니다. 아홉 제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당장 나오너라!” 라고 말했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들의 믿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의 능력의 사역은 여기서 끝이 났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지난 날 이런 일이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한 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맛보고 감격했습니다. 악한 영의 힘에 맞서 어느 정도 승리했지만, 그 때 더 강한 귀신이 와서 여러분 위에 거대한 산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산은 재정적인 무서운 공격일 수 있고, 회복 불가능한 질병일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다가온 불행한 상황일 수 있고, 가까운 관계가 비극적으로 깨어지거나 자신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거대한 산이 행로에 놓여 있어 아무리 힘을 써도 여러분이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겨진 것은 큰 나무로 자라지 못하는 작고 싹이 조금 밖에 나지 않는 겨자 덤불입니다.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9절).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

개역개정판은 21절이 없지만, 킹 제임스역(KJV)은 의미 깊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으로 아니하고는 나가지 않느니라”(Howbeit this kind goeth not out but by prayer and fasting).
다시 봅시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불신 때문이다. 이 별종 귀신은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님이 이 별종 귀신을 다루시기 전에 금식하러 산에 올라가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매일의 기도와 금식의 삶을 통해 영원한 능력과 믿음, 권세의 자리에 이르셨고, 이를 통해 늘 산들과 맞부딪쳐 여러 문제들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평소의 기도와 금식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두 번째 단계, 나아가서 그 나라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귀와 그의 부하들에게 끝 없는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겨자씨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자질일 것입니다. 교회가 큰 나무로 성장하려면 산을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하체 장애인을 향해 산을 움직이는 믿음으로 손을 내밀어 ‘일어나라’ 고 외쳤고, 그 산은 믿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집사 빌립은 이방 땅과 같은 사마리아로 내려가 그곳의 악한 영들의 처소를 뒤흔들고 하나님 나라의 큰 일들을 행하였고, 그 결과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7:7-8). 빌립의 믿음은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믿음으로 찬송할 때에 옥문이 열리고 손발의 착고가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산을 움직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겨자씨 믿음은 위대한 믿음이며, “예수 이름으로, 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이다” 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믿음입니다. 일단 예언을 하기 시작하면 겨자씨는 자라기 시작하고 여러분은 산을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산을 움직이는 믿음이 되기 바랍니다. 평소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진 믿음은 과연 겨자씨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입니까?

여러분은 앞에 놓인 산을 향하여 예수 이름으로 담대하게 선포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 땅에 태산처럼 버티고 있는 우상의 영들, 음란의 영들, 부패의 영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쳐본 적은 있습니까?

이것이 겨자씨 믿음입니다. 이것은 산을 옮기는 법을 아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늘의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맞서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다. 이곳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더러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이곳을 속히 떠나라!”

(대구서현교회, 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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