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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겔 3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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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겔 37:1-6)                 


I.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

바다에 보리새우란 놈이 있습니다. 허물을 많이 벗어야 살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허물이 부드러워서 자주 허물을 벗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허물은 딱딱해져가고 벗는 텀이 길어집니다. 그러다가 허물이 딱딱해져서 더 이상 허물을 벗지 못하면 그 허물에 갇혀 보리새우는 죽어갑니다.

교회도 기업도 세상사가 마찬가지입니다. 허물 벗어던지지 못하면 죽는 겁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면 망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493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Reformation = form 을 새롭게 한다. 본래의 form으로 돌아간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성경으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초대교회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한국교회를 자주 방문했던 영국이 낳은 훌륭한 강해설교가 데니스 레인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뼈있는 충고를 남겼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자랑만 하지는 마시오. 한국교회도 이제 변하지 않으면 시대속에 버려진 창고나 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100년전 영국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교회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하고 자랑스럽던 영국교회는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 나면 지금 텅텅 비어있고, 박물관처럼 전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 100년후 한국교회가 지금의 영국교회와 같이 되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차분이 그리고 겸손히 내일을 준비해 나가야 할때 입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들이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있는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절망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수많은 죽어 가는 영혼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위대한 영혼의 대추수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1세기의 추수를 우연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멋진 승리를 계획하는 명장처럼 멋진 작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처참한 몰락이냐? 엄청난 추수냐?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 몸부림은 일종의 혁명적인 몸부림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또 다른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란 말입니다. 


II. 본문의 이해

오늘 본문을(겔37:) 연극무대 위에 올려봅니다. 여러분을 영적극장으로 초대합니다.  연극의 제목이「마른뼈 골짜기」입니다.

① 남루한 옷차림의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부정과 부패를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열방을 의지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위정자들도 국민들도 회개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장면을 바꿔 가면 많은 선지자들이 스쳐지나갑니다. 자그만치 200백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② 잠시 백성들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한발과 재난,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습니다.

③ 그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수많은 군대를 끌고 쳐들어 옵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처에서 비명소리로 가득합니다.

④ 비극적인 장면들이 계속 지나갑니다. 유대 왕은 두 눈이 뽑힌채 쇠사슬에 묶여 개처럼 끌려갑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포로로 질질 끌려갑니다. 성전과 회당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마을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비극적 역사가 7년동안이나 계속되어졌고 골짜기마다 마른 뼈로 흘러 넘쳤습니다.

⑤ 장면이 바뀌어집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포로의 한 사람으로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에스겔아 너는 나를 따르라”(겔1:1)  한 골짜기에 다다랐더니 그 골짜기 처처에 마른 뼈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37:3)

그래서 이 연극의 주제는 “마른 뼈에도 소망이 있는가?” 입니다.

마른 뼈 골짜기의 상황을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① 뼈가 심히 많다는 말은 절망의 상태가 온 백성에게 퍼져있었음을 말합니다. 전 민족적인 참상이었다.

② 아주 말랐다고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재생의 기운이 전혀 없었습니다.

③ 뼈가 온 지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뼈는 본래 땅속에 묻혀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니 보기에 흉하고 더럽고 무섭기만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비참하게 죽었기에 장사지내 줄 사람이 없었던 게지요. 버려진 시체 - 짐승들이 뜯어먹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 까마귀가 뜯어먹었습니다. 뼈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치가 열방 앞에 여지없이 드러난 상황이었습니다. 7년동안 이 비극은 계속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구약시대 얘기만은 아닙니다. 500년 전에 꼭같은 모습이 있었습니다. 1500년전 교회가 생겨나면서 시작하여 지금부터 500년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교회의 비참한 모습, 앙상한 뼈만 남은 바로 천주교회의 모습은 에스겔 골짜기의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모습은 또한 500년 전 천주교회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여기 앙상한 뼈들은 7000만 내 민족입니다. 굶주린 내 동포들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한국교회요 내 교회요 내 영혼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필요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에스겔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이 마른뼈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루터와 칼빈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마른뼈처럼 화석화되어지고 조직화되고 타락하여 죽어 넘어진 천주교회로부터 생명있는 군대, 생명력 넘치는 교회를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영혼 살려내고, 죽은 교회 살려내고,  민족을 구원하는,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교회를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웰매스 재판정으로 소환이 되어졌습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몸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웰매스 재판정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황제를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했던 하루아침에 루터쯤이야 아침이슬처럼 날려버릴 수 있는 그런 곳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그는 외쳤습니다.  “웰매스의 재판정을 덮고 있는 수 많장의 기와장이 악마로 변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증언해 주신 복음을 변경시킬 수가 없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이 진리를 내가 사수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나는 흔쾌히 나아가 아침이슬처럼 죽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는 원래 법과대학을 나왔습니다.  법조계의 꿈을 안고 졸업반이 되었는데 그의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옆에 있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죽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어가는 친구의 손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며 하나님 앞에 외쳤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펴 주십시오.  우리를 살려 주시면 제가 수도원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경황 중에 이렇게 부르짖었고 이때의 충격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루터는 자기 죄 때문에 한없는 고민을 해 봅니다.  죄를 지었으면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를 괴롭히고 있는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를 않았습니다.  몰려오는 죄의 문제를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하루에도 수없이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해 보았습니다.  “내가 나쁜 마음을 품었습니다.  질투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하루에도 스무번 이상씩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는 날도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신부님을 괴롭히니까 그 신부가 “루터야, 네가 죄를 모아 가지고 한꺼번에 가지고 오면 안되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로마를 찾아가 속죄 계단을 기어올랐습니다.  이 계단은 콘스탄틴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부탁을 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피 흘리며 올라갔던 스물 여덟 계단의 돌을 뜯어다가 만든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 내리고 무릎에 피가 나서 이 계단에 피가 묻게 되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이 계단을 오르 내리는 사람이 수 없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천년동안 이 돌계단을 오르 내리는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순례객이 얼마나 많았던지 돌이 움푹움푹 패어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오백여년 전에 마틴 루터는 이 계단을 기어 오르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고 종일 그 계단을 오르 내리다가 무릎이 찟겨지고 터져서 스물 여덟 계단에 피가 벌겋게 묻었더랍니다. 그래도 그의 마음속에는 평안과 믿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강력한 말씀을 받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만이 살아난다! 그렇다. 이 계단은 구원을 얻는 사닥다리가 될 수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① 인간의 착한 행위를 통해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한다. 오직 은혜.  Sola Gratia.

② 오직 믿음 만이 천국가는 열쇠, 사닥다리가 될 수 있다.  
오직 믿음.  Sola Filde.


③ 교황이 아니라 성당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야 된다.  
예수께로 돌아가야 된다. 오직 예수.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그리고 1517년 10월 31일 오늘 로마 천주교의 틀린점 95개 조항을 공개 질의서로 만들어 비텐베르그 성당에 내 겁니다.  여기서 교회는 성경의 교회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 기독교회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 복음적인 교회-초대교회가 있었고, 그것이 천주교회로 중세까지 이어오다가 그것이 두 개로 갈라져서 하나는 구교가 하나는 개신교가 되었다.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웠던 최초의 교회, 복음적인 교회-초대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모습을 잃어버린 한 교회가 천주교회로 타락된 잘못된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 때에 복음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초대교회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어지는 주님이 세웠던 최초의 교회, 복음적인 교회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교회의 맥을 이어가는 우리 기독교회를 만들어 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기독교를 개신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교회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가 아니고 초대교회로부터 예수님이 세웠던 반석의 그 교회로부터 맥을 이어가는 복음을 이어가는 교회가 기독교회요 교회라고 믿는 것입니다.  


III. 교리개혁

종교개혁의 첫 번째 영역은 아무래도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키고 저질화시켰던 천주교로부터 주님이 전해 주셨던 원래의 복음, 복음의 원형을 회복하는 복음의 회복, 진리의 회복운동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우리는 타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니만큼 우리 기독교회와 천주교회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자가 아니라 그 깊이가 부족하여 우리교회 협동목사님으로 함께 교회를 섬겼던 장신대 조직신학 교수 김명룡 교수님의 「기독교와 천주교의 비교연구」라는 명강의를 가능한 한 그대로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개신교 국가들이 카톨릭 국가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발전된 나라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 자유가 신장되고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열강들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봐서 카톨릭 국가들은 두세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2류 국가로 전락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천주교회나 타종교로부터 배울점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천주교회는 세계에서도 훌륭한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카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져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논문들을 조사해 보면 카톨릭 정신이 개신교 정신에 비해서 상당히 열등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바꿔 말하면 우리 개신교 정신이 카톨릭 정신에 비해서 월등히 우수한 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교는 국가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비종교인들에게 여론 조사를 해보면 우리 기독교회가 오히려 타종교에 비해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크리스챤들이 잘못하고 교회가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야말로 개혁이 필요한 집단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적으로 보면 카톨릭 교회 신학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성례엔 7성사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고백성사”입니다. 고백성사라는 것은 일명 고해성사라고도 하는데 신부님께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카톨릭교회에 의하면 세례에 의하여 원죄가 사해집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집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신부님에게 가서 고해하는 성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이 신부를 비난하는 경우가 개신교에 비해서 월등히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회는 하나님 앞에만 죄를 고백하기 때문에 사람 앞에는 다 숨겨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신부님 앞에 가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살기 때문에 신부님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죄를 다 들여다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닐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끔 신부가 큰 잘못을 하더라도 신부님에게 덤벼드는 천주교 신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원죄를 사하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카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 있습니다. 중세 때 카톨릭이 면죄부를 팔아서 심각한 타락상을 보였는데 물론 지금 카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신학적인 이론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런점에서 목사나 장로 - 교회지도자들의 허물이 세상에 들어나고 비판을 받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구요.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사제에게 가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속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측면은 마리아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에 가보면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평화방송을 잠시 보고 있노라면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기도문이 계속 나옵니다. 

마리아론의 핵심은 5가지 정도로 요약이 되어집니다. 

①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②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 
③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④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⑤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의 중재성입니다.

여러분 과연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살았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는 물론 동정녀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예수님의 많은 동생들을 요셉과 결혼하여 낳은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의 분명한 기록에도 분명하고 교황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틀릴 수 있지만 교황의 말씀은 틀릴 수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많는 진리들을 마리아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께 기도하는게 유효할까요? 카톨리교회에서는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능한 대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 신학자로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 성 리구리란 분이 「마리아의 영광」이란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한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봤습니다. 왼쪽 끝에는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오른쪽 끝에는 마리아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왼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중간쯤 올라가다가 위를 보니 위에는 주님이 계시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얼굴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 사람이 놀라서 떨어지는데 그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려 오기를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성모 마리아가 자애롭게 맞아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리아가 이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뭔가를 얘기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보다 마리아가 더 인자한 성품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행위로, 교황의 말씀으로, 덧칠한 크나큰 오류외에도 이처럼 로마 천주교회는 진리를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직접 하나님께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이라면 카톨릭은 간접적으로 만나고 사제를 통해 용서받는 간접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신성한 기독교를 열등한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런 잘못된 교리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수도 있겠지요.

첫 번째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 교리의 개혁은 상당부분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개혁은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교향곡이 되었고, 사역의 개혁은 큰 시도조차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또 따른 종교개혁 예배의 개역이 필요합니다. 이를 두고 빌 벡헴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했습니다. 


IV. 예배 개혁

전세계의 살아있는 교회들은 한결같이 예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람이 살고 민족이 살아납니다.

저 자신도 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속적인 관심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예배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성경의 백성들이 드렸던 바로 그 예배,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행복해 하고 은혜를 누리는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꾸준히 연구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교회 주일 예배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고 더 많이 기도할 것이지만 나름대로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예배학적인 모델을 발견한 것으로 자부할만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거대한 예배당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그 자녀들의 총제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사귐입니다. 때문에 예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크게 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나면 안됩니다. 

우리의 좋은 시설도 주인공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지나치게 웅장한 강단이나 강대상, 권위적인 강단은 검소하게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강단위에 설교자나 기도자가 앉는 권위적인 의자는 성도들의 위치로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심지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자도 감추어져야 합니다. 특별한 가운이나 장식, 박사학위를 표시하는 무늬들 등은 특별한 시간 외엔 절제되는 것이 옳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가장 영광스런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다가 예배에 실패하면 안됩니다.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성경의 백성들이 어떻게 예배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 등록하신 교우들은 내가 지난번 교회에 있을 때에 어떻게 예배했는지 생각하지 마시고, 어떤 예배가 나를 기쁘게 하는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의 백성들은 어떻게 예배했는가? 주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이것만 생각해야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시간, 감정을 표현해도 좋습니까? 운다든지, 웃는다든지, 손을 든다든지, 기뻐 춤을 춘다든지 감정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합니다.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선수 하나만 나타나더라도 열광적으로 환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귀한 손님, 대통령쯤 나타났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온 식구들이 기쁨으로 반겨줄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에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되신 그분, 만주의 주가 되신 그분이 영광가운데 이 시간 임재해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찬양 가운데 기도가운데, 말씀 가운데, 내 영혼에, 내 중심에 임재해 계십니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예수님께서 피흘리신 그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상처가 있든지 모두다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기 위해 피 묻은 모습 그대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성 삼위일체 영광이 이 예배 가운데 충만히 넘치고 있는데 그렇게도 감정적인 표현을 안해도 좋은 것입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신 일을 열광적으로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 입술만 달삭거리는 찬양은 옳지 않습니다. 배에 힘을 주고 큰소리로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셨을 때 기뻐하며 환영하며 박수를 치며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손을 들고 환호하며 찬양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때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춤을 추며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찬양을 보면 19세기에 만들어진 복음성가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혀 드리는 찬송,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을 기뻐하는 찬송, 하나님이 오심을 마음껏 행복해 하는 찬송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가능한한 이 시대에 불려지는 모든 찬송들, 특별히 가장 최근에 우리 민족적인 정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맞는 경배찬송을 부르고 찾으려고 함께 몸부림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몸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시간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때묻은 것, 저는 것, 흠이 있는 짐승을 드릴 수 없습니다. 물질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스펄 전은 당신이 오늘 드린 헌금만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V. 사역의 개혁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 교회 예배가 살아날 때에 에스겔이 보았던 그 마른 뼈 같은 영혼들이, 교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그리고 예배의 갱신과 함께 마지막 남은 과제가 사역의 개혁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12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거기 보면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목사의 사역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사역이며, 성도들의 사역은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 작은교회 - 목장을 세우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목사의 사역인-

1.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성도들의 흠과 티가 없도록 도와준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뼈 골짜기에 팔뼈, 다리뼈, 두개골들이 사방에 흩어져있습니다. 그 뼈들을 제 위치에 정확히 갖다 놓아서 팔은 팔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리는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입은 입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 위치에 끼어 맞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시켜서. 구비시켜서.” 그런 뜻입니다. 

목사의 해야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입니다.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역인-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봉사란 말은 가족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가족은 오이코스, 봉사는 오이코노모스입니다. 가족을 위하여, 배고픈 가족을 위하여, 밥을 짓는 어머니의 손길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추운 가족들을 위하여 옷가지를 챙기고, 떨어진 옷을 깁는 어머니 바느질 손을 -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라고 -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 주는 사역을 말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나의 격려와 칭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장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함께 기뻐해 주는 활동을 말합니다. 배고픈 내 목장가족들을 위하여 밥을 짓는 손길을 말합니다. 봉사의 사역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섬겨주는 목회 사역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 모든 일들을 목사들이 감당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들은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역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써야될 면류관을 그동안 우리 목회자들이 빼앗아 갔습니다. 

지역장이 해야될 일도 구역을 섬기는 일들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들도 심방하는 일들도 아픈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일들도 교인들이 기뻐할 때 함께 춤추는 일들도 모두 목사 혼자 그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에게 이 모자를 나누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목사의 손에만 있던 사역을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성도들이 되었을 때에 교회소그룹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입교우들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직접 전도한 사람들을 모아 목장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예배를 섬기는 사역자가 되십시오. 남녀 선교회의 사역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님들은 우리 시대에 에스겔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시대 루터로 마른뼈들을 살려내라. 영혼들을 살려내라. 한국교회를 살려내라. 교회가 살아야 민족을 구원해 낼 수 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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