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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만찬의 의미 (고전 10: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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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의 의미 (고전 10:16-17)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참된 교회란 복음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매월 첫째 주에 실시하는 성만찬은 이렇게 교회다움을 가늠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인 작가인 김성일 씨를 아시지요? 
그 분의 작품 중에 ‘제국과 천국’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성만찬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 초기에 네로 황제를 시발로 10명의 황제들로부터 기독교가 대 박해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사도들의 제자들도 발각 되는대로 순교를 당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이 순교를 당하여 설교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령 지도자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감시자들의 눈초리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히11장 36-38절에 보면, 그 때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그런 상황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성만찬이었습니다.
생존해 있는 목사님이 성별한 떡과 포도주를 검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 신실한 성도들이 바삐 움직입니다. 
어두운 밤, 으슥한 호숫가에서 몇 명의 성도들이 목소리를 죽여 가며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입니다.”를 고백하며 성만찬을 받습니다. 
깊은 지하묘소인 카타콤에서 음습한 벽에 몸을 기대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의 성만찬을 받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때로는 ‘사람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식인종의 무리라고 비난과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만찬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만찬은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었습니다. 
성만찬은 그들의 천국에 대한 소망의 보증이었습니다.
성만찬은 그들이 한 형제자매임을 드러내는 사랑의 확증이었습니다.
이 성만찬으로 그들은 그 무서운 박해를 견디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면 성만찬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체험합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이 말씀은 우리가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신비적인 합일이라고 합니다.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몸 속에 젖어들 때, 그것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영적체험입니다.
하나 됨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는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합하여 우리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 사죄의 확증을 얻습니다.

벧전 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 제물로 어린양을 드렸습니다. 
끌려온 어린양은 애처롭게 웁니다. 
어린양의 목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옵니다. 
어린양의 가죽이 벗겨집니다. 
선홍색 붉은 살이 드러납니다. 
어린양의 몸이 각 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피를 쏟고, 죽어가는 어린양의 죽음을 보면서 사죄의 확증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주의 잔을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보면서, 사죄의 확증을 얻습니다.
신학서적에 이런 좋은 글귀가 있어 소개합니다. 

“성만찬상 앞에서 신자는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발 밑에 서며 자신의 모든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며 회개한다. 성만찬상 앞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을 만지며 옆구리에 손을 넣는다. 성만찬상 앞에서 신자는 십자가상에서 흐르는 땀과 물과 피를 만지며 그의 절규하는 음성을 듣는다. 성만찬상 앞에서 신자는 비로소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죄의 확신을 얻는다.”

3. 우리는 한 떡을 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은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합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원래 유월절 만찬에 사용하는 빵은 조각조각 난 것이 아니라 큰 덩어리였습니다. 
주인은 큰 덩어리에서 식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먹을 만큼 떼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우리는 한 빵을 먹고 있는구나!’ 

그렇습니다! 
성도는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에서 살과 피를 받습니다. 
한 부모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들을 형제, 자매라고 하듯이, 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은 신자들은 서로를 향하여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한 가족’이란 말씀입니다.
한 가족은 기쁨도 슬픔도 함께 합니다. 그렇지요?
한 가족은 잘못된 것을 들춰내지 않고 덮어줍니다. 그렇지요?
한 가족은 아무리 의가 상해도 가족관계를 끊지 못합니다. 
그것은 한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느 부흥회 강사님이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해야 됨을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몸에 붙어있는 눈은 아름답습니다. 
고요한 호수 같기도 하고, 수평선 너머로 막 저무는 석양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몸에 떨어져 있는 눈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강사님은 그것을 ‘눈깔’ (용서하고 들으십시오) 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다 한번 몸에 떨어진 눈깔을 볼라치면 사람들은 그 흉측스러움에 당장 치우라고 손사래를 치지 않겠어요? 

몸에 붙어 있는 여인의 미끈한 다리는 아름답습니다.
남성뿐만 아니라 같은 여성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지요.
그런데 몸에 떨어져 있는 다리를 상상해보십시오.
어쩌다 우연히 몸에 떨어져 있는 다리가 처마 끝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놀래 자빠질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어야만 아름답듯이 성도는 교회 공동체에 붙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교회를 떠나면 성도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성만찬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천국의 향연을 미리 맛보며 천국을 소망합니다.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성만찬은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갖게 될 성대한 하늘잔치의 맛보기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들판에 나갈 때가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밭일을 하시고 우리는 밭가에 흙장난을 하면서 놀지요. 
긴긴 여름철 한나절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배고프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그럴 때 어머니는 간단한 간식거리, 사카린을 넣고 삶은 감자 몇 톨을 내놓으면서 “얘들아, 간단히 요기해라! 조금만 참으면 엄마가 맛있는 저녁밥 지어줄게.” 
우리는 어머니의 약속을 믿고 해가 뉘엿뉘엿 지도록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성만찬이란, 언젠가 주님께서 성도들의 손을 덥석 잡으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면서 베풀어 주실 하늘 큰 잔치를 기대하면서 맛보는 작은 잔치입니다. 

성만찬이란, 하늘 잔치를 소망하면서 ‘우리 흔들리지 맙시다.’ ‘우리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 약해지지 맙시다.’라고 격려하면서 맛보는 작은 잔치입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1절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2절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후렴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5.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주님께서 몸을 찢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삶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나누겠다고 결단합니다.

요한1서 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찢어 나눠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물질과 시간 그리고 삶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나누겠다는 결심을 갖게 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프랑크 마샬이 감독한 ‘Alive'-The miracle of The Andes,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금요일 오후, 45명이 탑승한 전세기가 안데스 산맥에서 기상 악화로 추락하게 됩니다.
추락지점은 해발 3천 5백 미터. 
생존자들은 우루과이 명문 사립고등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평균 연령 20세의 럭비선수들입니다.
비행기 탑승객들은 이들 외에도 방송국 PD, 의사, 중견 사업가, 선수들 등 다양했습니다.
승객 몇은 그 자리에서 죽고, 중상을 입은 승객들은 죽음을 기다립니다.

그 중 난도 파라도, 안토니오 발비, 로베르토 카네사는 남은 생존자를 돌보며 구조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구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8일이 지납니다.
라디오 안테나를 조작하여 방송을 듣는데, 들려진 소식은 수색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추락 10일 후 극심한 추위와 베고픔에 떨던 이들은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죽은 시체를 나눠먹기 시작합니다.
그 후 심야에 불어 닥친 폭설과 눈사태로 또 다시 생존자 중에 8명이 죽게 됩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내 몸을 먹으라.’고 내줍니다.
기꺼이 죽은 자들은 생존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놓은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육포처럼 된 죽은 자들의 얼은 시체를 뜯어먹으면서 그들은 고백합니다.
“나는 비로소 주님의 성만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미국 ‘라이크’라는 잡지는 이 기사를 ‘안데스 산맥의 성만찬’이라고 제목을 붙여 실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찢어 나눠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나누겠다는 결심을 갖게 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산다는 것은 인간 본연의 의무이기에 난도와 로베르트는 또 다시 죽음과 맞서며, 안데스 산맥을 넘어 마침내 생명이 넘쳐나는 칠레의 푸른 계곡을 만나게 됩니다. 드디어 72일간의 생존일지를 마감하고, 1972년 12월 23일 그들은 구출되었습니다.)

지난 주 우리교회는 참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장기 나눔 행사’에 많은 교우들이 참여했습니다.
사후에 각막을, 뇌사상태일 경우에는 8개의 장기를 기증하는 헌신을 다짐하는 행사였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참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눔은 성만찬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만찬은 이와 같이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 거룩한 예식이기 때문에, 쉽게 가볍게 장난스럽게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진지함이 없이 성만찬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피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에 주님의 살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만찬을 받을 때마다 이 예식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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