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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말대로 사하노라 (민 14:17-20, 마 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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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대로 사하노라 (민 14:17-20, 마 6:14-15)


프랑스 수상이었던 클레망소는 이념을 달리한 청년에게 저격을 당했습니다. 청년이 쏜 일곱 발의 총알 가운데 한 발을 맞아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당했습니다. 수상은 청년의 사형을 반대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청년의 잘못에 대해 용서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교도소에서 8년을 살면서 집중적으로 사격 훈련을 받았습니다. 용서하면서 왜 사격훈련을 시켰는지 아십니까?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에 일곱 발 중 한 발밖에 못 맞힌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용서에 유머를 더해 즐거움을 줍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습니다. 
  
인간은 용서는 하지만 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죄가 완전히 없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죄사함이란 것입니다. 인간은 용서하고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8:12에는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용서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셔야 용서가 완전하게 됩니다. 
  
동시에 사람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5:23-24에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사람과의 화해, 용서, 화목,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과의 화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최종적인 용서의 결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엄밀히 보면 용서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누가복음 23:34에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용서하셨지만 하나님의 용서가 있어야 완전한 용서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사도행전 7:60에는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고 합니다. 스데반은 이미 용서했지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용서하셔야 완전한 용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헝거리의 작가 토머스 사즈는 “어리석은 사람은 용서하지도 않고 잊지도 않는다. 보통 사람은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용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용서 받는 희망을 캐는 복된 아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형벌 받을 자는 사하지 않으십니다. 

18절에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합니다. 허물을 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지만 형벌 받을 자는 절대로 사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죄악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묵인하면 우리가 그 죄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사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지키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란 말인데 ‘옮겨버리다’(bearing away), ‘감당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 보면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신 동물을 죽여 인간의 죄를 동물에게 옮겨버리신다는 의미입니다. 희생제물을 통한 대속적 성격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처럼 우리의 죄를 대신 하여 죽으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형벌 받을 자에게는 이런 희생이나 이런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움만이 작용합니다. 형벌 받을 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발동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인 둘째 아들이 돌아온 이유가 너무나 이기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가 굶어죽지 않으려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이유가 이기적이지만 괘심하다고 하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 이미 용서하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왜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받지 못하고 형벌 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회개하지 않은 자입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은 자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사함을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돌아오지 않고는 절대로 다시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여리고 성을 아주 쉽게 점령하였습니다. 그냥 나팔을 불고 횃불을 들고 성을 돌았는데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전리품을 하나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승리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리품을 가질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질에 탐을 낸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간은 여리고를 점령한 다음에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금 50세겔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천막 밑에 감추었습니다. 그런데 아이성을 치러 갔을 때에 이스라엘은 참패를 당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전쟁에 진 사실을 불평하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에서 전리품을 훔쳐온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때까지 아간은 가만히 있다가 제비를 뽑아 비로소 그가 범인인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아간은 형벌을 받아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뒤에 발각이 되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고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인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스승인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용서를 받고 위대한 복음의 사도가 되었는데 가룟유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룟유다가 왜 용서를 못 받았습니까?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가슴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용서할 의무는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만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경우에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른 점은 계속해서 회개할 수 있도록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제목에도 이와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한국영화에도 있고 미국영화에도 있습니다.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자가 많길 레 한국과 미국에서, 아마 다른 나라에도 이와 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 만큼 용서받지 못할 자가 많습니다. 요즘 인터넷에는 군에 가지 않으려고 멀쩡한 이를 뽑은 연예인과 외국에 원정도박을 갔다가 거짓으로 인터넷에 사진을 올리고 지금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연예인을 ‘용서받지 못할 자’라고 올렸습니다. 세상적인 잣대에서 보면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용서받지 못할 자가 많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남자’라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과거 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귀 뚫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귀가 막힌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머리카락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머리에 든 거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날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거짓 사랑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 그 이상은 생략하겠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여자’라는 글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웃고 넘어갈 말이 아니라 의미 있는 말들입니다. 
  
베드로후서 3:9에는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가 있을까요? 

마태복음 12:31에는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아십니까? 옛날 성경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회개케 하는 영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죄를 말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회개하지 않은 죄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이 오셔서 가장 잘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선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제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구원받게 하시는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을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은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방법은 회개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하세요. 회개하지만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는 죄도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용서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우리 자손 3, 4대까지 갚으신다고 합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부모의 죄 값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서야 되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우리가 받을 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습니다. 이런 좋은 부모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중보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19절에는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급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모세의 중보기도 부분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백성의 죄를 위해 중보기도를 시작합니다. 
  
옛날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듯이 모세의 대제사장적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하옵나니”라고 회개하지 않는 백성 위하여 정중하게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는 모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3, 4대까지 갚으시는 공의만 있으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대신 “인자의 광대하심” 때문에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자가 얼마나 광대하십니까? 애급에서부터 지금까지 사하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직후 바로의 추격을 받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마라에 왔을 때 물이 없어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간 모세가 산에서 더디 온다고 원망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광야 길이 힘들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불평과 원망에 익숙했던 백성들이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눈을 감아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런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사하심을 간구합니다. 
  
우리에게도 간구할 힘이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자의 광대하심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중보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힘이 있고 중보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중보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의인들 때문에 온 지역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도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합니다(출 32:32). 자신을 원망한 미리암이 나병이 걸리자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중보 기도합니다(민 12:13). 시편 106:23에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였습니다(삼상 7:5). 다윗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였습니다(대상 21:17). 히스기야왕은 백성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였습니다(대하 30:18).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는 자를 위하여 그들의 죄가 용서받기 위하여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중보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16에서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라고 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부지런히 중보 기도하였던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14에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장로들에게 중보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치유하는 자입니다. 중보기도 하는 자입니다. 
  
중보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5:16에는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합니다. 의인의 간구 즉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보하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중보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우연히 만나다’, ‘사이에 들다’라는 뜻입니다. 브리지트 허먼은 내면세계 정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풍성하게 하는 방법은 예배와 중보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중보 기도는 위대한 신앙인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죄사함의 간구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고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고, 우리가 용서 받아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모세의 말을 듣고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합니다. ‘사하다’는 말은 ‘살라흐티’로서 ‘내가 사했노라’(I have pardoned)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죄는 벌써 완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보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가 구하면 즉각 주십니다. 사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아야할 것이 무엇인지 미리 아시고 우리가 회개하면 즉시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실 준비가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일대학교 교수이신 미로슬라브 볼프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한 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들을 예견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 계획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세상을 용서하기로 하는 것뿐이었다.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용서의 약속은 창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볼프교수는 창조보다 용서가 선행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언약신학’에서는 세 가지 하나님의 언약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삼위 간에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기로 언약하셨다는 구속의 언약, 창조하신 다음 선악과를 만드시고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행위의 언약, 그리고 타락 이후에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한 은혜의 언약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타락을 예측하시고 이미 사죄의 언약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 지은 인간을 사하시기로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죄 사함의 준비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지은 사람을 위하여 누군가가 중보하여 기도해 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중보하는 기도가 성취될 것입니다.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예비한 은혜가 풍성할 것입니다. 이런 죄 사함의 은총이 풍성한 우리가 되어 늘 영혼의 평안함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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