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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아디라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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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아디라교회 (계 2:18-29)

 
내 용 요한계시록의 네 번째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이 지역은 매우 유명한데 생산이 많아 경제 활동이 활발한 곳입니다. 그래서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전쟁을 겪은 지역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을 탐내는 전쟁 전문가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세기까지 이 지역은 평화가 없던 곳으로 로마가 들어와서 오히려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지역이 된 곳입니다. 그때부터 두아디라는 그 지역의 특성을 살려서 상업과 제조업이 많이 발달해 경제 번영이 잘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큰 인물 하나가 있는데 바로 ‘루디아’라는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바울을 만나서 자기 집에서 교회 창립을 한 사람이고 그것이 빌립보 교회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의 평생 선교 동역자 역할을 한 여성 사업가인데 자주 장사를 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루디아가 이 두아디라 지방 출신입니다. 거기서 배운 제조업을 가지고 마게도냐로 진출해서 큰 여성 사업가가 되었고 기독교 역사에 큰 쓰임을 받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낸 요한계시록의 편지 내용 가운데 이 교회가 제일 긴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칭찬과 책망 양면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양면성의 모습이 곧 지금 이 세상 교회 모습들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 조명할 수가 있습니다.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는가 하면 반대로 어두운 면이 보여주는 것이 인간 공동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인간들도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도 자신의 어두웠던 면을 인간답게 발표하는 것을 봅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자기 인격 속에 두 가지 양성면이 존재하는 것을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이 두아디라 교회가 잘 한 것은 무엇이며 주님 보시기에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가 조명하면 우리의 갈 길이 보입니다. 

이 교회는 다른 일곱 교회과 다른 특징이 하나 나타나는데 사업을 잘하는 교회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교회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사업을 아주 잘하는 교회로 주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두아디라 교회가 주님의 칭찬 받은 그 부분을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갈보리교회로 한번 평가를 한다면 주님도 똑같은 칭찬을 하셨을 계획들이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선교 사업 부분이라든가 교육 사업, 구제 사업, 봉사 사업, 친교 사업 부분은 잘하는 교회들이 가는 모습을 저희들이 따라가고 있으니까 아마 이 부분은 사업은 잘한다고 칭찬받을 수 있다는 객관적 평가를 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큰 사업을 벌였는데 주님과는 상관이 없을 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도 그게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판단이 안가는 일을 오래 전에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텍사스에 가서 개척교회를 할 때 예배당 건물을 빌린 미국 교회가 교회 사업을 많이 하는데 제가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프로그램에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교회는 체육관 시설이 아주 좋습니다. 본당보다도 더 좋은 체육관 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없어서 체육관을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요일 예배에 아무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넓은 체육관을 사회사업에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수요일 오후가 되면 그 교회 체육관을 무엇에 사용했느냐 하면 댄스홀로 사용했습니다. 수요일 저녁마다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경한 적이 있는데 수백 명이 파티복을 입고 와서 남자, 여자가 음악에 맞춰 댄스를 하는데 제가 장로교 신학을 공부한 보수적 한국 목사라서 그런지 얼마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이런 것을 못하게 하는 곳인데 이 교회는 왜 이런 사업을 할까?’ 저는 너무 궁금해서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교회가 왜 이런 댄스홀을 운영합니까?” 물었더니 “당신은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이곳 문화를 잘 몰라서 충격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자격이 있습니다. 싱글이어야 합니다. 이미 가정생활은 파탄이 나서 함께 살지 못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 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사람들은 못 오고 싱글들만 자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살려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상처를 해결하고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다시 가정을 가질 수 있는 기회 제공을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시며 “당신도 오고 싶으면 오십시오.” 하시는 겁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실 만한 사업이 있었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보시는 주님의 모습을 두 가지로 오늘 성경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이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이 말을 자주 쓰는데 여기 나왔기 때문에 사용하는 겁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살펴주사”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는 게 바로 두아디라 교회를 살피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빈틈없이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된 시설이 있습니다. CCTV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입니다. 아무리 다녀보아도 대한민국같이 잘 된 곳이 없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주차장에서부터 엘리베이터 안까지 CCTV가 다 설치되어서 누가, 언제, 어디서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날마다 남겨지니까 거짓말을 하나도 못합니다. 거리에도 이 CCTV를 설치해서 내가 몇 시에 종로 5가를 어떻게 걸어갔는지 다 보입니다. 이것이 세계에서 제일 잘 되어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또,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친구 목회하는 교회에 가봤더니 교회 본당 안에도 CCTV가 되어 있어서 누가 하품을 했는지, 누가 교회 늦게 들어왔는지, 졸았는지 거짓말을 못합니다. 다 기록됩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당 안에는 없으니까 마음대로 조시기 바랍니다. CCTV같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내비게이션도 참 신통합니다. 그 많은 거리에 그 많은 자동차가 가는데 그 거리의 상황을 앞의 방지턱 하나 있는 것까지 다 가르쳐주니까 내비게이션 같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지방에 부흥회를 많이 가는데 경기도에서 충청도를 넘어갈 때는 충청도 말이 나옵니다. “충청도유!” 이 도경을 넘어가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나오는지 모릅니다. 또 전라도 지방에 제가 부흥회를 제일 많이 가는데 전라도 지방에 가면 일부러 전라도 사투리로 말해줍니다. “전라도랑께!” 기가 막힙니다. 이 문화는 세상에서 제일 잘 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인간은 기계의 노예처럼 됩니다. 기계의 말을 잘 안 들으면 큰일 나게 됩니다. 기계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의 발이 빛난 주석 같다.”라고 했습니다. 주석은 풀무 불에서 단련된 놋쇠를 말합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낸 쇠를 말합니다. 옛날 로마 군인들이 타던 말 가운데 장교들이 타던 말은 장식을 했습니다. 발목에다 하얀 양말을 신겼습니다. 그래서 말이 걸어가는 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말발굽에 주석 놋쇠를 달아주었기 때문에 이 말은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고 어떤 험난한 길도 자유롭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장교들이 타는 말발굽에는 쇠 방울을 달아줍니다. 그래서 말 발이 움직일 때마다 장단을 맞추어서 “찰그랑찰그랑” 말 타는 사람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로만칼라의 장교복을 입고 장식을 한 말을 타면 그 사람은 아주 돋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빛난 주석 같다. 말을 탄 로마의 지휘관 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영광스럽고 권위스러운 분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조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가 하는 사업의 정신을 네 가지로 칭찬의 말이 나와 있는데 첫 번째 “사랑과”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사랑을 기초로 해서 하여야 합니다. 불평하려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 선교 사업하기 위해 헌금 많이 하는데 기쁜 자만하라는 겁니다. 불평하려면 선교 사업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사랑을 기초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움직여 나가는데 이 교회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하면서도 공연히 불평하려면 안하면 됩니다.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선교지에 가보십시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자꾸 오라고 합니다. 오라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꼭 필요한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와서 보고 이 프로젝트를 도와주시오.” 제가 가는 곳마다 100퍼센트 그런 요청 안하는 선교지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무엇을 준비해놓고 이것을 꼭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해주고 싶습니다. 100퍼센트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와주려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찬송가에 있잖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런데 마지막에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그대로 선교하러 가는 겁니다. 이 교회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지켜 나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합니다. 이상한 통계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나 어느 시대나 이것은 거의 맞는 통계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일조도 열심히 하고 헌금을 모아서 프로젝트도 열심히 하지만 돈 많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통계가 이상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교회 통계인 것을 어떡합니까? 

한 나라에서도 굉장히 성공한 재벌, TV에서 선전하고 신문에 나오는 굉장한 재벌이 있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가 제 친구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와서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아십니까? “이 목사! 우리 교회에 재벌 나오는 거 알지?” “그럼! 좋겠다.” “고민 있는데 우리 교회 예배당도 없어. 그 분이 눈만 한번 꿈쩍해도 넉넉히 혼자서 교회 열 개 짓고도 남을 텐데 어쩌면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지? 나는 이거 너무나도 이상해!” 그래서 제가 그 목사한테 대답한 말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로 보내!” 안 움직입니다. 이상한 통계입니다. 

교회도 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나타나지도 않으려고 하고 가만히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십일조 내고 헌금 많이 해서 개민 군단 같이 운영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통계가 그렇습니다. 제가 텍사스에 있을 때 한국의 최고 재벌 기업 직원들이 한 20명 이상 거기 와서 근무를 했는데 외로우니까 교회에 100 퍼센트 전부 나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면 점심에 김치찌개 해서 나눠먹고 그 시절은 70년대이니까 한국 사람들이 적었으니 교회에 오면 사귈 수 있으니까 교회에 다 나왔는데 재벌 회장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건축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지 그 교회를 직원들 시켜서 사진을 전부 찍으라고 하시며 이렇게 예쁘고 잘된 교회 처음 봤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사진 전부 찍고 “미국의 넓은데다가 내가 교회를 건축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해야겠다.” 혼잣말같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 있다가 ‘때는 이때다.’ 생각하고 “하나 지으십시오. 이거 하나 지으라 하면 금방 될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한번 해보지요.” 안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상하게 능력 있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 통계는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믿음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일을 잘하니까 주님이 칭찬하신 겁니다. 

그 다음에 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교회는 섬기기 위해서 다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가 1,300군데 교회를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섬기다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섬겨야 합니다. 예수는 인류를 섬기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배우러 다니는 겁니다. 여러분, 섬김을 받고자 마음먹으면 그 시간부터 나는 시험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불평스럽고 불만스럽고 내 마음에 안 들게 됩니다. 하지만 섬기는 자는 항상 기쁩니다. 내가 섬기는데 시험 들게 뭐가 있습니까? 받으려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칭찬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 교회는 ‘인내’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신앙생활을 한 두 번 하는 것은 쉽습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불우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해서 김치 담그는 작업 한다.” 유니폼 입고 나가서 하루 한다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안 불러주니까 못나갈 뿐입니다. “장애우 형제들을 위해서 하루 동안 봉사한다.” 하루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섬기는 것은 평생입니다. 평생 섬기는 생활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겁니다. 이 교회는 그러한 인내심을 가지고 한두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했습니다. 이것이 힘듭니다. “이렇게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고 섬김이 있고 인내가 있는 그런 사업을 잘하는 훌륭한 교회다.”

그런가 하면 책망의 부분이 나타납니다. 이 교회가 이렇게 훌륭한 교회인데 무슨 책망이 있는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활동을 막지 아니했다.” 이세벨의 활동이 뭔가?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교회에서 교인들을 유혹해서 하나님의 종들까지 유혹을 해서 바알 예배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우상의 제물을 갖다 먹이고 바알 예배의 모범인 행음을 시켰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또, 열왕기상 16장에 나오는 아합의 부인 이세벨의 부인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지금 두아디라 교회 안에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과 같은 역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교회가 왜 가만 두느냐?” 책망하시는 겁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7대 왕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 나라에서 왕후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 시돈 나라의 왕의 딸 이세벨 공주를 데려다가 왕후를 삼은 사람입니다. 왜 그랬는가? 조건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강대국 시돈과 사돈을 삼아서 평화롭게 지내자.” 하는 정치적 계략이 있었고, 또, 왜 이 이세벨 공주는 자기 나라에서 시집을 안가고 이웃 나라한테 시집을 왔는가? 약속이 있습니다. “아합을 이용해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버리고 시돈의 국교인 바알을 섬길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온 국민에게 바알 선교 힘쓰는 것을 막지 아니할 것!” 조건부로 온 것입니다. 그것을 약속하고 이세벨과 결혼을 해서 왕후 자리에 앉히니까 이세벨은 시집 온 날부터 생명을 걸고 힘쓴 일이 이스라엘 나라의 야훼 종교 하나님 믿는 것을 없애버리고 절대 핍박하고 바알 종교를 세워서 온 국민으로 하여금 바알 숭배 장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것입니다. 

아합 왕이 앞장서서 권력 무기로 강제화 하고 있는데 온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세벨을 따랐습니다. 하나는 권력의 힘으로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지 아니할 경우 엄청난 불이익을 당해서 살기가 힘들어집니다. 살려면 그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사 참배했잖아요? 안하면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목사님들도 안하신 분도 있지만 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가는데, 그리고 교회도 못하게 하는데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거나 똑같이 된 겁니다. 그 다음에 왜 국민들이 그렇게 바알을 쫓아가는가? 바알 예배가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마친 다음에 행음을 시키니까 젊은 사람은 바알 종교가 낙원인 겁니다. 다 쫓아갔습니다. 

이때 상황을 엘리야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열왕기상 19장에 나옵니다. “하나님! 이세벨 때문에 온 나라 다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남았습니다. 나도 죽일 것입니다. 그 놈들한테 죽기 전에 하나님! 나도 빨리 죽여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이렇게 나라가 다 망했습니다. 이세벨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 지금 이세벨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자가 있는데 왜 가만 두느냐? 제2의 이세벨을 없게 하라.” 이렇게 지금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바알 종교는 어떻게 교회 안에까지 침투했으며 왜 교인들은 용납했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지방의 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지방의 특색은 두 가지 공업이 발달했습니다. 하나는 염색 세공업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했습니다. 루디아도 거기서 자주 장사를 익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경제 부흥이 주어져서 그 사회에서 잘 살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이 염색 세공업 협동조합에 가입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농업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가입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게 되고 까딱하면 직업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 염색 세공업의 협동조합의 우두머리들이 다 바알 종교 신자들입니다. 그러니 큰일이잖아요? 거기서 그래도 벌어먹고 살려면 그 사람들의 말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은 교회 나오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협동조합의 조직원들이 되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바알 종교의 교회 침투를 막아낼 수 있는 영적 힘이 없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지금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또, 두아디라 지방의 산업으로 또 하나는 구리 세공업이 발달했습니다. 이들은 제우스 신전 종업원들이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전에는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로의 얼굴이 구리로 새겨져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을 수호신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 직장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살고 있으니까 이것을 버릴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다는 것은 결정적 위기가 찾아올 수 있고 더 심각해지면 목숨까지 빼앗기는 일까지 생겨버리니까 교회 다니면서 그런 주장에 대해서 함부로 대항하거나 대들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생기기 때문에 바알이 교회에 침투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부분을 책망하시면서 정신 차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행한 배로 갚아 주리라. 우상 숭배를 배격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음녀와 행음하지 말라. 로마 권력에 속지 말라. 로마가 음녀다. 바알이 음녀이다.” 이렇게 지금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만약 너희가 회개하고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을 굳게 잡고 끝까지 싸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가 시간적으로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초림예수의 사역기간입니다. 출생 때부터 승천까지입니다. 이때에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세상에 오셔서 그의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것으로 초림 예수의 사역은 끝났습니다.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 우편으로 가신 지금 시간입니다. 이때를 가르쳐 말세의 시간, 종말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승천 이후 예수의 재림까지의 시간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예수 재림의 심판 사역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미래 사건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이때에는 “신앙을 지킨 성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는 종말적 심판 사역이 남아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마지막 성경 부분에 보면 21장 26절에 “이때는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세세토록 왕 노릇하겠다.” 여러분! 다 세세토록 왕 노릇을 우리가 하면 예수님은 뭔가? 그래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라고 우리가 표현한 것입니다. 정당에 공천 안 받아도 왕이 됩니다. 투표 안 해도 왕이 됩니다. 선거 운동, TV 토론 다 필요 없습니다. 돈 안 써도 됩니다. 

여러분! 다 왕 되신다고 지금 주님이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조금만 나라에서도 왕 되는 거 그렇게 야단인데 만국 권세를 다스리는 왕 되는 권리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구절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성경이 끝나버립니다. 그때 왕들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여기 있습니다. “철창을 가지고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무슨 소리입니까? 사탄의 권세 멸망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쇠몽둥이를 들고 여기 지금 질그릇 항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그 질그릇 항아리를 쇠몽둥이로 깨뜨리면 얼마나 속 시원합니까? 와장창 깨져나가듯이 사탄의 권세는 깨져나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소 고난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이 세상의 역사의 교훈은 아주 분명합니다. 악은 멸망합니다. 당장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절대 아닙니다. 악의 세력, 악의 정권, 악의 권력, 악의 집단 그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 더욱 강하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도 당하리. 우리 가는 그 앞길에 어둔 장막 덮쳐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 항상 지켜 주시리. ♪” 할렐루야! 

마지막 약속을 이렇게 줍니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새벽 별이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말했습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예수님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에게 준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과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휴거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하늘의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왕이 될 것이며 메시야적 통치로 내가 통치하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 진리의 특성은 보상 종교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현세적이며 미래적이고 현실적이면서 미래 지향적, 그리고 철저한 보상 진리입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될 것이다.’ “이기는 자는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 별을 줄 것이다.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아멘”하십시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신 말씀으로 저희들을 조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이기는 자가 하여 주시고 어떤 유혹도 이 세상에서 물리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육 있는 능력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갈보리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을 사랑과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섬김으로 잘해나가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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