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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머나교회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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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교회 (계 2:8-11)


예수께서 직접 평가하신 일곱 교회 중에 두 번째는 서마나 교회입니다. 지금 이 서머나라는 이름은 “이즈미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당시 소아시아의 꽃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답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195년에 이곳에다 로마의 여신을 위한 신전 건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인과 같이 아름다운 도시 건설을 위해 로마가 경제적으로 후원을 했습니다. 서기 26년에는 로마에 대한 충성 표시로 티베리우스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축했고 아드리안 황제, 카라칼라 황제 신전을 모두 여기에 건축했습니다. 이렇게 서머나는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의 중심지가 되어 국가 지원을 막대하게 받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경제 부흥이 잘 이루어진 부유한 도시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정반대의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지게 됩니다. 황제 숭배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당시는 황제 숭배자들이 정기적으로 신전에 모여서 일제히 합창하는 말이 공식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이사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로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로마 국가 원수를 모독하는 결과가 되어지고 거기에서 잔인한 핍박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서머나 기독교인들이 당한 핍박은 다섯 가지 종류로 나타났습니다.

사회 공직에서의 박탈,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재산 몰수, 모든 재산권은 국가에서 있으며 국가 권력은 로마에 귀속되어 있다라는 논리입니다. 감옥에 투옥되고, 마지막에는 처형되었으며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8촌까지의 일가친척까지 이런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기들까지 고난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가문에서 예수를 믿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폴리갑이라는 교회 감독입니다. 바로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습니다. 서기 155년 2월 23일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그에게 총독이 간단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 책임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 이 공개된 자리에서 ‘가이사는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라. 그리고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가르치지 말라. 그러면 너는 평생 복되게 살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네 옆에 쌓아놓은 저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태워 화형을 당할 것이다.” 

그 때 폴리갑 감독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86년 동안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버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저 장작더미는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주시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화형 당해 죽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분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나 편안하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까운 중국에서는 기독교 핍박국가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 공산당이 교회를 허락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첫째로 삼자 교회에 등록할 것. 국가가 인정하는 교회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3자 교회는 나쁜 교회라든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다든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입니다. 18세 미만의 어린이는 교회 나오는 것을 금할 것, 외국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말 것, 설교 가운데 예수 재림에 대해 말하지 말 것,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강조하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하 교회가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지하 교회에서는 가장 강조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온다고 하는 설교를 제일 좋아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종말론적 설교라고 합니다. 간단한 통계가 있습니다. 기독교 핍박 국가에서는 모든 교인들의 생각이 종말론적으로 변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세상에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핍박 시절에 모두 똑같은 신앙으로 결속되었습니다. 그 때 제일 은혜스럽게 부르던 복음성가는 천국 소망에 대한 노래였습니다. 교회 헌금송이나 특송 부르는 사람은 이런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꿈결 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다해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가느냐?” 
“이팔청춘 그 꽃다운 시절도 다 지나고 혈기방장 그 장면도 옛날이 되누나. 
성공 실패 꿈꾸면서 웃고 우는 그 순간에 원치 않는 흰백발에 눈서리 휘날린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하늘나라만 생각하는, 그래서 이 세상은 헛되다고 하는 ‘허사가’는 라는 것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홍안소년 미인들아 자랑치 말고 영웅호걸 열사들아 뽐내지 마라
유수 같은 세월은 널 재촉하고 저 적막한 공동묘 널 기다린다.”

지금은 복음성가도 다 변했습니다.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세상이 살기 너무 좋아져서 천국가고 싶은 믿음 열정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실 서구 사회에 교인 감소 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이 생활향상입니다. 이대로 좋은데 ‘천국이 뭐가 그리우냐?’라는 생각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세상 기준으로는 하나도 좋은 것이 없고 오직 고난스러운 일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른 것이 뚜렷합니다. 주님의 책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본 에베소 교회도 여러 가지 칭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일곱 교회를 분류하면 칭찬만 있는 교회, 칭찬과 책망이 함께 있는 교회, 책망만 있는 교회인데, 서머나 교회는 칭찬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무슨 칭찬을 하셨는가?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알아주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누군가 나의 진실과 본심을 알아줄 때 매우 행복합니다. 나의 본심이 전달되지 않을 때 같이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환장하겠다는 말을 쓰는데 배를 째서 속을 다 드러내 보이고 싶을 때 쓰는 말입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염려하는 충정의 자기 마음을 몰라줌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는 시입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환란을 당하고 궁핍해졌는데 주님께서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환란이나 궁핍은 심할수록 축복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말이“실상은 네가 부요한자니라.”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로마 정권도 그 세력 많던 황제들도 흔적조차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영원한 면류관을 소유했으며 장작더미에 화형 당했으나 폴리갑 감독은 기독교 역사에 영원한 순교자 스승으로 부요해졌습니다. 

우리 삶의 가치관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베다니 마리아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셨을 때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가격의 옥합을 열어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데 왈칵 쏟아 부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 놀랐습니다. 제일 놀란 사람은 가룟유다였습니다. “어찌하여 이 비싼 향유를 허비하느냐?” 300데나리온이면 꽤 큰 돈입니다. 지금 돈으로 아무리 싸게 계산해도 3000만 원 이상입니다. 

어떻게 계산하나? 예수님이 부흥회하셨을 때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5000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항상 여신도들이 더 많았고 지금도 대한민국 어느 교회든지 군인교회를 빼놓고 여신도가 더 많습니다. 그러면 아이들, 여자들 모두 합치면 5000명에 충분히 배가 됩니다. 만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계산을 했습니다. 이 무리를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만 명의 한 끼 식사 가격으로 지금 우리가 3000원짜리 점심을 먹는다고 3000만원이고, 5000원짜리를 먹으면 5000만 원 정도가 200데나리온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300데나리온 향유를 발 한번 씻는데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유다의 계산대로 마리아가 그 돈을 가지고 다른데에 사용했다고 합시다. 그것을 재투자해서 돈도 늘리고 장사를 해서 이익도 많이 남겨서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합시다. 그것과 예수님 발에 부어서 주님이 알아주는 칭찬의 말이 오늘날까지 성경으로 남은 것, 온 세상 설교자들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이야기하는 것, 어느 것이 현명합니까? 이것이 영적 가치관입니다. 주님은 “잘 했다. 괜찮아.” 칭찬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의 인정을 얻은 교회요, 그 믿음의 풍요가 실상은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부요하게 하는 일이 부요한 것입니다. 선교비 많이 지출하느라고 우리 교회가 실제로 수고 많이 한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힘들다고 해서 만약 안하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일마다 잔치해서 먹어치워버릴까요? 주님의 인정이 있는 교회 “나는 너를 안다. 네가 왜 힘들고 궁핍한지 내가 잘 알고 있다.” 옛날에 관리들은 억울한 일이 있거나 어떤 소원이 있을 때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임금님에게 상소를 적어 보내는 것입니다. 그 상소의 글은 최고의 문장으로 가장 진실 되게 정성 드려 올려서 만약 임금님이 그것을 보시고 인정했다면 일은 간단히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정만 하시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인정받았습니다. “ 왜 너희가 궁핍하며 왜 환란을 당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어떤 사명이 계속해서 주어지나?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고난과 궁핍이 끝나지 않고 계속됨을 알리고 더 심해질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이렇게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모든 권세는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역사는 예수 재림시까지 공존한다는 것이 성경의 뒷받침입니다.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해석은 몇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길지 않은 시간, 1000일 동안 이라고 했으면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의 의미일 텐데 10일이라 했으니 곧 끝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되고, 둘째는 핍박하는 황제가 10명이 될 것이라고 해석도 많이 해 왔습니다. “네로, 도미티안, 트랴쟌, 세베루스, 맥시민, 데시우스. 아우렐리안, 발레리안, 디올클레티안, 안토니우스” 이 열 명의 황제들이 계속해서 핍박했으나 멀지 않은 시간에 10일 후에 이 모든 것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마귀의 권세는 아무리 강하게 나타나도 이미 예수의 십자가 밑에 항복한 권세입니다. 결국 로마는 기독교 국가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세계인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필연적 요소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핍박을 당해야 되고 누군가는 순교를 당해야 됩니다. 누군가 희생자가 나와야 하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나의 망함을 통해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십자가입니다. 그 누군가가 곧 내가 되고 그 누군가가 내 교회가 되고…. 그래야 하나님께 진정 쓰이는 교회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순교당하고 베드로가 순교 당해서 복음이 세계에 전해진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죽님을 위해 죽을 수만 있다면 죽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죽음으로 주님을 섬긴 사람과 세상적 축복 속에 섬긴 사람 다양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주는 교훈은 주님을 위한 환란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견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이 실상은 부요자가 된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인정 속에 내가 있다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희생은 절대 보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보상을 서머나 교회에 약속하셨나?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성경에 면류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면류관은 최고 영광스러운 상징으로 씌워졌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 면류관의 상징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는 썩을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스럽다고 판단해서 열심히 노력하여 얻기는 얻었는데 썩을 면류관, 아무짝에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로마 정부에서는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행사 때 면류관을 씌워주는 행사적 면류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사를 식민지 만드는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야고보서 1절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베드로전서 5장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생명의 면류관이란 가장 영광스러운 영생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성도의 승리란 말입니다. 마라톤 경주 우승자에게만 씌워주는 월계관 같은 의미로 약속된 성도의 상급을 말합니다. 

그 다음의 약속,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사망은 무엇이고 둘째 사망은 무엇인가? 첫째 사망은 이 세상 누구나 다 경험하는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경험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죽었던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29절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런데 이 때 불신자들은 또 다시 심판을 받는 둘째 사망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는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하고 있는데 편의상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장례식장에서 다시 살아난 것 모두 예수님이 살려내신 부활사건입니다. 그러나 편의상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이것은 진정한 부활은 아닙니다. 그들은 또 죽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과 같은 것입니다. 한번 죽었다가 부활하면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부활,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주님을 향한 어떤 일도 헛되지 아니한다.”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는데 또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사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게 된 진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쇠잔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문명도 다 없어집니다. 어떤 영광도 다 소멸됩니다. 잉카 문명도, 아즈텍 문명도, 바벨로니아 문명도, 페르시아 문명도, 로마의 영광도, 몽골의 영광도, 알렉산더의 영광이나 바로의 영광 모두 사라집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이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러므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여러분! 이 세상에서 죽어가면서 충성할 가치가 무엇이죠?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죽도록 충성할 가치는 오직 하나입니다. 영원성을 얻기 위한 것, “내가 이것을 주리라.” 

이 약속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서마나 교인들이여! 다 빼기고 환란당하고 궁핍당하지만 나는 너의 환란과 궁핍을 알고 있다.” 성도 여러분! 죽음의 핍박을 견디면서 놀랍게 그 믿음을 지킨 서머나 교인들을 우리가 이 시대에 기억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시대가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우리가 너무나도 편안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서머나 교인들과 같은 초대 신자들의 핍박 때문에 되어진 일인 것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의 어려웠던 삶을 우리가 영적으로 오늘 조명하면서 이 시대에 누군가는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피 흘려야 되는데, 어떤 교회인가는 노력해야 되는데, 거기에 바로 나와 우리 교회를 써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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