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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베소서 강해(13) : 거룩한 모델링 (엡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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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강해(13) : 거룩한 모델링 (엡 5:1-7)

 
지난 11월 11일 중국 광저우 웨슈산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축구 예선 경기에서 한국 국가 대표팀은 북한과의 경기에서의 충격적인 패배의 좌절을 디디고 요르단과의 게임에서 대표팀 주장 구자철의 멋진 두골로 다시 기세를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튿날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일간지는 이 경기 결과를 보도 하며 홍명보 감독의 아바타, 황태자로 제주 유나이티드 소속 구자철이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을 결정적인 위기에서 구출했다고 대서 특보했습니다. 언론 매체들은 새롭게 구자철이라는 선수에 대하여 국민적 관심을 표명하며 그가 누구인가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소개하는 글 중에서 동아일보의 한 기사가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일 힘든 질문이 “당신의 롤 모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동경의 대상은 있었지만 딱히 “누구와 같은 선수가 되어야 하겠다”는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최근 박지성 소속의 맨유팀의 게임을 관전하면서 맨유의 전천후 미드필더 대런 플레쳐(Darren Flecher)가 자기 시야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의 플레이를 보면 그의 스타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는 항상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시종일관 상대방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지칠줄 모르는 체력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팀에 공급하는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으로 이 플레쳐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기로 했고 수시로 그의 게임을 지켜보며 학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자신의 플레이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그의 기량 또한 현저하게 발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롤 모델은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의 롤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 롤 모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본 받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신 분,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바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롤 모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우리가 모델링해야 할 삶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하신 삶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진실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우리의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런 희생을 감수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블레싱 축제는 끝났지만 우리가 이웃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연습해야 할 삶의 모습이 자기희생의 삶입니다. 오늘날 전도가 잘 안되는 많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이기심이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그것을 부인하겠습니까? 과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행태가 비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여 좀더 이타적이고 좀더 희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타이타닉 침몰 사건은 우리의 이타적 사랑을 가상적으로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시험 케이스라고 할만 합니다. 타이타닉에는 그 배에 승선한 모든 사람2,208명을 구조할만한 구조선이나 구명조끼가 준비되어 있지 못했고 그중에 상당수인 1,513명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당신이 거기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이 배에 탄 사람 중에는 선박 회사 사장인 브루스 이스메이(Bruce Ismay)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하인, 비서, 수많은 선객을 버려두고 구명보트에 올랐고 이 일로 그는 목숨은 구했지만 나머지 일생을 세상과 여론의 비난을 받으며 구차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많은 영웅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존 스미스 선장은 끝까지 구명보트 승선을 거부하고 승객들을 구조하다가 죽었습니다. 뉴욕의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 주인 스트라우스 부부는 남편이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부인도 승선을 거부하고 자기 하인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준 다음 구명보트에 태운다음 부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기도하며 최후를 맞이합니다. 월레스 하틀리라는 사람이 지휘를 맡은 연주대 8명은 배의 침몰 10분전 까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찬송가를 연주하여 승객들에게 마지막 소망을 선물했습니다.

이런 극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나는 평소에 이웃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삶을 날마다 연습하고 계신지요? 십자가에 매달린 시간에서 조차 당신 옆에 매달린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며 위로하시던 주님처럼 살고 있는 것일까요?

2. 도덕적 시험을 극복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처럼 도덕적 시험을 직면하며 사셨다고 증거합니다. 히4:15을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래서 저는 예수님도 우리처럼 성과 돈과 권력의 시험을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험들을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도덕적인 시험의 밑바탕에 도사린 것은 욕망입니다. 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할 때 우리는 도덕적인 실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의 성을 탐하는 것이 바로 음행이 아닙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남용하여 이웃들을 무너뜨리는 모든 과도한 시도가 곧 더러움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족한 줄 모르고 탐함이 바로 탐욕이 아닙니까? 그것이 결국 음행과 더러움, 그리고 탐욕의 죄들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은 마땅히 이런 시험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이 경고는 5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너희도 정녕히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시험인 것입니다. 사단이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성, 돈, 권력이 주는 모든 환상)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하실 때 예수님의 응답을 기억하십니까? 마4:10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다만 그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섬기지 말고(Gold/God의 차이), 성을 섬기지 말고, 권력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더 재미있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그리고 달려가는 순간, 바로 그때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오직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경배함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고 최고의 기쁨을 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그를 닮으시기를 축원합니다. Solodios basta-"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입니다" ,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이 모든 시험에서 자유할 것입니다.

3. 감사의 언어로 빚어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만드는 중요한 한 열쇠가 우리의 언어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을 했습니다.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이 우리의 삶을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정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만나고 모셨다면 이제 우리는 그의 언어생활을 닮아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언어생활의 핵심이 바로 감사이셨다고 믿습니다. 

마태11:25의 예수님의 기도문을 읽어 보십시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의 그분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요11:41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둔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만찬의 모습을 마태는 26:27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그는 심지어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감사함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 기도하든지 말하든지 흘러나오는 말이 이 감사의 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신자와 비신자의 삶의 가장 현저한 차이가 바로 이런 감사의 언어라고 믿습니다. 감사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솔제니친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후 경험한 기독교 문화의 아름다움을 두 단어, <감사와 용서>라고 증언했습니다. 신을 상실한 공산주의 문화의 대표적인 삶의 모습이 감사와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감사하고 사과하는 것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감사의 언어를 상실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추한 말(폭력의 언어), 어리적은 말, 희롱의 말이 우리를 지배할 뿐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우리가 진실로 예수 믿고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면 이제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새 언어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감사의 언어를 학습해야 합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친구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감사했더니 나사로가 다시 살았습니다. 감사가 친구를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두고 감사했더니 사형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범사가 감사의 조건이 될 것입니다. 감사의 언어로 새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은 아마 지난 2006년 여름 우리 교회 주일 강단에서 저의 설교중 한 자매가 나와서 간증한 것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찬양의 특별한 은사가 있어 찬양하는 일로 섬기던 김명옥 자매의 이야기 말입니다. 찬양으로 섬기던 그녀가 설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으로 섬기던 자매가 설암 진단을 받고 혀를 끊어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러나 그녀는 말씀과 기도중에서 마지막 남은 기회로 주께 감사드리고 주를 더욱 찬양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아직도 내가 말할 수 있고 아직도 내가 찬양할 수 있고 아직도 내가 섬길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그녀는 주일학교로 돌아가 봉사를 하고, 입원해 있던 연세대 세브란스 신우회 예배에서 찬양으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암이 악화가 안될 뿐 아니라, 암의 징후들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후 그녀는 온전히 찬양 사역자로 헌신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감사가 낳은 기적입니다. 

이 가을 나는 여러분의 언어가 감사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감사했던 우리 주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고통이 아니라, 승리가 될 것입니다.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가 자랑과 은총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질병과 절망의 십자가가 치유와 희망, 부활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생애는 그분을 모델링하는 거룩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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