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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랑이 인생에 몰려올 때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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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인생에 몰려올 때 (막 4:35-41)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나 우리는 똑같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어려움의 종류와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우리 모두는 살면서 인생에 폭풍우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는 잘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게 되서 직장을 잃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자녀가 갑자기 사고를 당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또 사랑하는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에 가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진찰을 해 보니 암으로 판정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게 되기도 합니다. 자녀를 앞세우기도 하고, 사랑하는 배우자가 하늘나라에 가기도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건 안다니는 사람이건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다 이런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아픔과 고통에서 부터 멀어지게 되고 잔잔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고통과 아픔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없을까요?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만 아픔과 고난이 몰려올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문제가 없고 풍랑이 없고 고난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도 비를 내리시고 악인에게도 비를 동시에 내리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모든 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항해를 하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잔잔한 호숫가와 같은 바다 위를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파도가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기도 하고 폭풍우가 몰아쳐서 온 배안에 물이 가득 잠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도 또 햇볕이 나고 잔잔한 바닷가 위를 가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자체는 이렇게 비구름이 있기도 하고 폭풍이 있기도 하고 잔잔한 물결 위로 가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이 경험하게 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 보이는 반응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것을 당할 때 보이는 반응이 보이는 반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반응이 다르다는 것은 결과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아름과 고난을 당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비난하고 상황을 비난하고 환경을 비난하고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게 되지만,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고난과 폭풍우와 어려움 속에서도 깨달음을 진리를 그리고 보다 더 나은 성장과 발전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계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폭풍우를 만났던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반응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게 되면 이 본문을 통해서 인생에 폭풍우가 몰려올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좋은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 저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굉장히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성경 3장과 4장 앞 절에 보면 그날 하루 종일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또 가족들 중에 몇이 찾아와 예수님이 귀신들렸고 예수님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해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귀신들린 자 정신병자로 취급을 당하셨던 예수님은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피곤하셨지만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쉬실 겨를도 없이 하루 종일 복음을 증언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주셔서 예수님의 심신이 모두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쉬시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이제 노를 저어갑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신 나머지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그 때 배가 호수 가운데쯤 들어갔을 때 풍랑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정도 쯤은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점점 심해지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바닷물이 배안으로 들어오고 빗물이 배안에 가득차자 배가 가라앉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혼비백산해진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시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말씀으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면 “잠잠하라.”예수님의 이 말씀 한 마디에 바다와 바람이 잠잠하여졌습니다. 그 성난 파도와 바람이 잠잠해 지자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랐습니다. 첫 번째 놀란 것은 바다와 바람 때문에 놀랐지만, 두 번째 놀란 것은 도대체 이 선생님이 누구시길래 바다와 바람을 말씀으로 잠잠케 하셨는가! 결국 이 배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이 기적의 이야기를 가만히 보면서 우리가 인생의 항해에 만약에 폭풍우가 몰려온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가르침을 가슴 속에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진리는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인생의 항해에 폭풍우가 몰려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라고 폭풍우가 빗겨가지는 않습니다. 우리라고 암에 걸리지 않지 않습니다. 우리라고 상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라고 사업이 망하지 않거나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아픔과 고난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에 우리가 그런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저편이라는 것은 가보지 않은 곳을 말합니다. 앞으로 갈 곳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미래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게 되면 언제쯤인가 풍랑이 몰려와 그들의 배에 물이 들어와 그들이 거반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아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의 삶에 언젠가 우리의 앞날에 우리가 인생의 항해를 할 때 물이 차서 우리가 거반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사실을 주님이 먼저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이렇게 풍랑과 어려움이 있게 하셔서 우리고 하여금 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좌절하고 절망하고 파선해서 우리의 인생이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인생에 항해를 하다가 물속에 빠져 죽는 것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목적이 없이 계획이 없이 우리를 풍랑 가운데로 그런 바다 한 가운데로 인생에 항해에 물이 쳐들어와 거반 죽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계획 없이 하나님의 자녀를 그렇게 풍랑 속으로 몰아넣지 않으십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반드시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런 목적과 계획 없이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신앙의 위대한 위인들의 삶을 가만히 보면 이런 모든 풍랑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가요? 고대사회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부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축이 있어도 땅이 있어도 자식이 없으면 모든 것들을 관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대시대의 많은 자식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고난이었지요.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금이야 옥이야 얼마나 귀하게 키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말이 제물이지 제물로 바치는 것은 아들을 나무에 올려놓고 칼로 아들을 죽여 그 살을 불태워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로서 할 노릇입니까? 하나님께 제물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아브라함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시험과 고통이었습니다. 그의 삶에 이러한 폭풍과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모세는 어떠했고 다윗은 어떠했나요? 신앙의 위대한 선진들은 모두가 다 이러한 고난과 아픔의 풍랑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징은 이 모든 사람들이 고난과 아픔과 풍랑 가운데서 그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계획 없이 그들을 고난의 삶으로 풍랑으로 그들을 몰아넣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풍랑과 고난을 이겨낸 다음에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물이 처 들어 오고 풍랑이 우리가운데 몰려오지만 그것이 우리들을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들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작품임을 믿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이런 인생의 항해에 반드시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너희들끼리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동행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너희들끼리 살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풍랑이 있을 수 있지만 절망과 좌절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한 가운데에 예수님이 같이 승선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네 가지 굉장히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우리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분명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방향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님과 함께 가면 끊임없이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만약에 커다란 배에 선장이 없고 초보자인 선원들끼리 있다고 한다면 배가 어디로 갈까요? 한 선원은 서쪽으로 가야해 또 다른 선원은 아니야 동쪽으로 가야해 그러겠지요? 그러나 노련한 선장이 배 안에 있으면 아무리 폭풍우가 분다 할지라도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선장은 가야할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압니다.  

사람들이 왜 인생에 곤란과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냐 하면, 그 배에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선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배에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선장이 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야 할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떤 직업을 가져야할지,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어떤 학교에 입학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몰라 방황하고 혼미해 있을 때, 기도하는 순간 우리 일생에 선장이 되시는 주님께서 저 쪽 건너편으로 가자고 분명한 방향을 제시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따를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는 길이 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일생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결정을 해 주십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우리 일생의 항해에 동행 하신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절대로 파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여기 배가 파선했습니까? 풍랑이 몰려왔습니다. 비바람이 쳤습니다. 배가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배 안에 바닷물과 빗물이 가득 차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안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다와 바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말씀 한 마디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바람과 물과 비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예수님이 만든 피조물이 바람과 바다와 비가 창조자 예수님을 삼킬 수 있을까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의 일생의 항해에 동행하신다는 것은 절대로 우리가 파산해서 죽지 않는 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우리 인생의 배에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님이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자연의 세계가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 줄 수는 있으나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반드시 중간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시다가 제자들이 깨우게 되자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보시고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잠잠하라.”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살면서 고난당하고 아파하고 힘들고 풍랑이 불어오는 순간, 우리가 주님을 깨워 주님! 살려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주님은 일어나 바다와 폭풍우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을 수 있지만, 주님 십자가 밑에 나아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주님은 다가오는 폭풍우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잠잠하라.”주님이 계시면, 반드시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주님이 배에 승선하신다는 말은 우리에게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배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지만 배 안에 물이 가득 찼지만 결국은 바닷가 저편에 도착했습니다. 바닷가 저편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에까지 갈 줄로 믿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영원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영원히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보장 되어져 있습니다. 좌절과 절망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넘어지기도 하지만, 쓰러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생에 빗물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저편 끝까지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지에 도착하게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요? 예수님은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지금 공황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고 계시는 것과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제자들이 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지요. 풍랑을 바라보지요. 비를 바라봅니다. 배안에 들어와 있는 물을 바라봅니다. 그 때 제자들은 절망과 그리고 공포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있고 또 영적인 눈이나 지혜의 눈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육신의 눈만 가지고 우리 앞에 다가오는 아픔과 고통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절망과 공포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보고 계시나요? 똑같은 배에 타고 있는데 왜 예수님은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고 왜 제자들은 이렇게 공포에 쌓일 수밖에 없었나요? 바로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풍랑을 바라보았지요? 배 안에 가득 차 있는 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보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바라보셨습니다. 풍랑을 누가 만들었나요? 바람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바람과 풍랑은 찻잔 속에 있는 흔들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넓으신 계획과 섭리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안에 우리가 있으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배 안에 들어와 있는 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절망이고 죽음이고 좌절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안에 내가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인생의 항해 가운데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려면,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고 사건을 바라보지 마시고 믿음의 눈으로 여러분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말씀으로 꾸짖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나무 막대기도 바다와 바람을 가리키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망과 아픔과 그리고 공포 속에 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무기는 우리의 능력도 우리의 조건도 아니라 말씀임을 믿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기적 자체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공포의 시간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워야 하고 훈련받아야 하고, 말씀을 외워야 하고 설교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 훈련을 받지 않고 부족했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만 보고 좌절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셨고 말씀 자체 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세상적인 능력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 담겨져 있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능력을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없으니까 세상적인 능력을 자꾸만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많으면 많을수록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세상적인 조건을 내려놓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온전하게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기적의 사건을 보고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혹시 오늘날 인생의 풍랑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혹시 인생의 폭풍우를 만나 좌절하고 절망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항해에 예수님이 승선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예수님이 여러분을 절대로 절망 가운데로 인도하지 아니하시고, 폭풍우를 지나 주님께서 승리의 항구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사용할 때마다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항해에 주님 때문에 주님의 말씀 때문에 승리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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