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린지 브라운 로잔 국제총무, 로잔 3차대회 폐막 설교 (고후 4:1-7)

  • 잡초 잡초
  • 388
  • 0

첨부 1


린지 브라운 로잔 국제총무, 로잔 3차대회 폐막 설교 (고후 4:1-7)

- 린지 브라운(국제로잔복음화운동 국제총무)
- 번역 :서울신학대 최형근 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놀랍고 유일하며 참된 복음입니다. 그 복음으로 인해 우리는 한 주간 여기 함께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기억에 남을 모임이었습니다만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제3차 케이프타운 로잔 대회가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유산으로 남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크리스토퍼 라이트와 전 세계에서 모인 신학자들이 하나가 되어 오늘 아침 배포된 케이프타운 서약의 초안을 만들어 왔습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두 명령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근거해 있으며, 바울이 지속적으로 교리적 확신에 대해 개관하고 우리의 삶의 방식과 연관된 신앙의 함의들을 설명한 로마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의 형태를 따라서 작성했습니다.

초안 작성자들은 전문에서 제1차 및 제2차 로잔 대회의 유산을 명시했습니다. 1974년에 열린 제1차 로잔 대회에서 세계교회에게 준 귀중한 선물들은 로잔 언약과 미전도 종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성경적 복음과 기독교 선교에 대한 통전적 성격에 관한 참신한 발견이었습니다. 제2차 로잔 대회는 마닐라 선언을 낳았으며, 전 세계 국가들 간에 300개 이상의 전략적 동반자협력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3차 로잔 대회의 유산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지금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번 로잔 대회를 준비한 로잔 위원회의 비전과 희망이 무엇인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비전과 희망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성경적 복음과 진리에 대한 확증과 복음전도와 교회의 선교에 관한 명백한 진술 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에 관해 명확히 하지 못한다면 선교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헌신이 없이는 우리가 내 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는 위대한 선교적 동력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대회 조직위원회 위원들은 교리적 논의를 제외시켰습니다. 최근 존 스토트는 그 당시 지도자들이 분열을 두려워하여 교리적 이슈들에 대해 논의를 거부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적 합의나 교감 없이 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존 스토트는 “성경적 진리에 관한 숙고 없이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선교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명확성,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술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 회심의 필요성, 잃어버린 인류, 그리고 복음화 되지 않은 자들의 운명에 관해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이러한 명확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진술입니다. 케이프타운 서약은 우리들이 ‘복음주의적’이라는 단어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복음의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단어가 아닙니다. 또한 서구적인 단어도 아니며, 복음주의 분파가 사용하는 단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마르시온 이단에 대항하여 성경적 진리를 변증하던 2세기의 터툴리안과 같은 교부들이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참된 성경적 기독교를 전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로잔은 복음주의 운동입니다. 

둘째, 우리의 비전과 희망은 교회가 다가오는 10년 내에 진지하게 제기해야 할 핵심 이슈들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로잔 대회의 목적은 전 세계 교회가 온 세상에-지리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사회적 분야와 모든 사상적 분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증거를 품는 참신한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 활동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헌신해야만 합니다. 

나는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한 말을 좋아합니다. 그는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내게 속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나라들과 종족들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제대로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와 미디어, 비즈니스와 정부, 공공정책과 대학에 성경적 원리들을 적용하는 데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예를 들면, UN 총회를 이끌었고 UN 인권선언을 만든 레바논 정치가 찰스 말릭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학을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물었습니다. 놀라운 질문이 아닙니까?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대학을 되찾으려 노력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대학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라.”

이번 대회 기간 동안 우리는 종족성과 환경 같은 이슈들에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적용하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슈들을 형성하는 인간의 노력과 사상에 깊이 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세속성이며,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세속성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많은 세속주의자들은 우리가 사적인 것들로만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손을 떼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 메시지가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만 상관성이 있으며,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로잔 대회를 위한 우리의 희망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모두 땅 끝까지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할 뿐 아니라 성경의 영원한 진리들이 우리의 전 삶의 영역에 적용하게 만드는 것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온 창조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의 비전과 희망은 이 대회에서 많은 동반자 협력의 결실들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탁월한 돌봄과 배려가 소그룹이라는 아이디어를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소그룹을 통해 많은 참신한 우정과 동반자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굶주리고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경쟁심으로 치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정신은 남자와 여자뿐 아니라 다른 종족들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는 결심으로 그리스도 아래서 손을 맞잡고 함께하는 동반자 협력정신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동반자 협력은 교파와 조직의 분열을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같은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많은 선교단체들이 중복 투자와 소비적인 경쟁심을 피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1장에 나오는 바울과 같이 복음이 전파될 때 누가 앞장서서 이끄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인해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헌신하는 복음적인 남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대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같은 마음을 품은 신자들과 함께 동반자 협력을 위한 새로운 헌신의 마음을 계속하여 품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비전과 희망은 새로운 많은 시도들이 이 대회에서 제기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유지하고 너무 적은 것들을 개척합니다. 수백만이 복음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겠습니까? 1974년 제1차 로잔 대회에는 미전도 종족들에 대한 전 세계교회의 강력한 관심이 표명되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무엇이 이루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마도 문맹자들, 젊은이들, 디아스포라나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참신한 시도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대회를 통해 나타날 새로운 사역들이 무엇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모든 나라들의 가치구조를 형성하고, 담대하고 명확하며 응집력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미디어, 대학과 정부라는 공적 영역에서 성경적 진리를 전하는 참신한 에너지를 산출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고린도후서 4장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원리들, 즉 이 대회에서 우리가 품어야 하는 세 가지 원리들이라고 확신합니다. 첫째, 우리는 사역과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핵심에는 신성,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위대한 인도의 사도 썬다싱은 “기독교 신앙의 아주 특별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분은 단순히 한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 분은 유일하신 세상의 구세주이십니다. 그 분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유일하신 주님이시고 구세주이십니다. 그 분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그 분은 비교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와 선포를 통해 그 일을 하지만 신약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공적 영역에서 대화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마르스 언덕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같이 지역의 회당에서 뿐 아니라 중립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초대교회 전도자들이 얼마나 창조적이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대위임령 가운데 그 분의 주되심을 말로 입증하는 것을 대체하는 것은 없습니다. J. I. 패커는 “말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복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성찬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던 황홀한 주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옥스퍼드대학교 학생이었을 때, 저는 존 웨슬리가 250년 전 교수로 있었던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대학교는 웨슬리의 편지들과 설교들을 읽을 수 있는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웨슬리가 순회 사역을 하는 동안 매일 기록한 저널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한 구절이 저에게 부딪쳤는데 웨슬리는 하루를 끝내면서 그의 저널에 반복적으로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드렸습니다…오늘 나는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것이며, 우리의 최고의 사명입니다. 

둘째, 본문은 우리에게 독특한 생활방식을 유지하도록 권고합니다. 우리는 오만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타락하고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간사함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혼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연약함으로 복음을 나누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테크닉이나 교묘한 접근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지나친 확신이나 승리주의를 위한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돈과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과업을 성취할 것이라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과업은 복음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능력,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메시지,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성취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복음의 진리, 하나님 영광의 복음, 그리스도의 주되심,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의 말씀은 진정으로 변혁된, 기쁜 삶으로 보완되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출판된 설교 가운데 마지막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에 복음의 진보에 대한 최악의 방해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살아가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위대한 독일 교회사가인 아돌프 하르낙의 주장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는 초대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이유를 이교도들과 적극적으로 논쟁을 했고(공적인 장소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고 변증함) 삶에서 그들에게 본을 보여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가야만 합니다. 

이에 더하여 성경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앞에서 힘없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유행병에 감염된 사람들, 그리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빈곤하고 깨어진 세상에서 긍휼을 베푸는 경건한 삶으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말로만 하는 사람들과 복음을 말로 전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도전은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과 더불어 비참하게 깨어진 사람들을 품에 안고 돌보는 것과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긍휼사역과 돌봄 사역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도전은 우리의 긍휼의 표현들이 은혜롭고 조심스럽고 자비롭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으로 뒷받침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함께 행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낙심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58절에서 바울은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한층 강조하여 말합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대회를 마치고 열악한 환경으로 돌아갈 것이며 사역의 어려움으로 인해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들은 지난 한 주간 동안 경험했던 대회와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한 후에 더욱 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버티기 위해 우리의 소명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로잔 운동의 창시자들 가운데 한 분인 새뮤얼 에스코바는 20세기 인간이 발견했던 유일한 것은 속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속도를 유지하고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사역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하나님의 일은 천천히 일어납니다. 우리는 급속한 성장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종종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고 포기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성취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치기 전에, 그러한 일을 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두 가지 실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제리 가나(Jerry Gana)입니다. 그는 나이지리아의 정치가이며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을 섬기며 다섯 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제리는 부패로부터 자유로웠던 인물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30년이 넘는 정치가의 생애 가운데 청렴하고 공정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 그는 젊은 학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의미와 그 이야기를 지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웠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이 어리석은 실수를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동료들을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이 특정 정책과 개인을 확인할 때, 만일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러분은 그 결과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며 그것은 여러분의 증언에 손상을 입힐 것입니다. 

셋째,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유산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30년 동안 정치가로서 섬기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나는 25년 동안 이 일을 계속할 것을 희망합니다. 그 기간 동안 나이지리아의 젊은 복음주의 정치가들을 멘토링 하고 성장시키려고 합니다. 내 소망과 기도는 그들이 자신들의 세대에서 그러한 영향을 지속하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는 하나님께서 지난 60년 동안 복음주의 정치가들을 통하여 이 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비전이며 열망입니까! 두 번째 실례는 초기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 한 분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입니다. 여러분들은 저드슨 선교사가 1812년에 버마(미얀마)에 도착하여 38년 동안 사역을 한 후 1850년에 하나님 품에 안긴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의 선교사역 동안 그는 복음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여러 자녀들뿐 아니라 그가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첫 번째 아내 앤을 잃었습니다. 그는 족쇄에 채워져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가 죽을 당시 미얀마에는 12∼25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할 교회조차 없었지만 1850년 그가 죽기 전에 성경번역을 마쳤습니다. 

150년이 지난 후에 폴 볼스윅은 미얀마 성경번역 150주년 기념 연설을 위해 미얀마로 돌아왔습니다. 강연 바로 전, 그는 성경을 쳐다보다가 첫 페이지에 ‘아도니람 저드슨 목사 번역’이라는 작은 글씨를 보았습니다. 그는 통역자에게 물었습니다. “매튜, 이 사람에 관해서 알고 있습니까?” 그 질문을 하자, 그의 눈은 눈물로 글썽거렸습니다. 

“예, 우리는 그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이 미얀마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분이 복음을 위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굶어서 죽었습니다만 우리에게 성경을 남겨놓았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실 때 몇 명의 신자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60만명이 넘는 신자들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아도니람 저드슨 목사님의 영적 유산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 목사님은 그것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것은 여기 모인 우리들 가운에 어떤 사람들이 겪게 될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돌보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헛되지 않도록 하실 것임을 신뢰하면서 당장은 그 열매를 보지 못하는 사역에 우리의 삶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저는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말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품으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통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때에,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계속하여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