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런 가정이 되었면... (골 3:18-19)

첨부 1


이런 가정이 되었면... (골 3:18-19)

[골 3:18-19]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가정 이야기

결혼 주례 때 신랑 신부에게 묻는 말 중 가장 곤란해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결혼하는 이 순간부터 신랑(신부)은 신부(신랑)에게 더 잘해야 합니까? 부모님께 잘해야 합니까? 다시 말하면 우선순위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거나 눈치를 봅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 결혼예비학교를 공부한 사람은 쉽게 대답합니다.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부모님께 잘해도 결국 가정이 깨어지는 것은 불효입니다. 결혼은 부모와 떨어져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에 배우자에게 늘 우선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가정을 천국으로 이루지 못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어떤 곳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가정이 있다면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더는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행복”이란 결코 얼마를 소유했느냐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돈이 많거나, 집이 화려하거나 잘 꾸며놓았다고 가정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집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좋은 가정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정착해 사는 한국 이민 세대들의 자조적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꿈을 안고 새로운 땅에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한국에서 살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직업을 자기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회의 땅 미국에서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기에 Three jobs을 뛰면서 좋은 집을 삽니다. 그리고 그 좋은 집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고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해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 행복을 자녀와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제 돈을 벌고 쉴만한데 자식은 다 떠나갑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살만해지고 나니 말년에 병을 얻기도 하고 부부의 깨어진 관계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이제 원망과 회한이 몰려옵니다. 자신이 살았던 삶에 대한 후회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가고, 부모의 희생을 알아주지 않는 자녀를 향해 이렇게 푸념을 해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니?”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자녀는 정말 힘들어합니다. 
자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부모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인격적입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저는 “인격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인격적 관계가 깨지면 비인격적인 관계, 때로는 동물적이고, 때로는 물질적 관계로 변질됩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아내에게 명령하는 성경적 관점이 바로 “인격적”입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고 깨어질 때, 인격적 관계가 깨집니다.

그러면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 하는 인격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조금은 구시대적인 이야기, 요즘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남편에게 복종하라!” 영어 성경에도 보면 ‘submi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 의미가 상대방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굴욕적이라고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주 안에서 마땅하다!” 복종하는 것이 주안에서 마땅하다는 말이 이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남편에게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편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코 맺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을 보면 조금 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Wives, understand and support your husbands by submitting to them on ways that honor the Master.”

주인을 올바로 모시는 것은 그 주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영광을 받기 위해, 잘 세움 받기 위해서 내가 복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주인이 영광을 받아야 나도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 세미나에 가면 자주 그런 말을 합니다. 
교회마다 가끔은 사모님 때문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뛰어난 사모님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목회자가 잘하고 사모님도 잘하면 문제가 없는데 목사님이 가려지고 사모님이 잘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됩니다. 
제가 뭐 남성우월주의자는 아닙니다. 저는 제 아내가 저보다 잘하는 부분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제가 세워지지 않으면 가정이 올바로 설 수 없다는 진리는 분명히 압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라!”라는 말씀이 골로새서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아내라면 남편을 대할 때에 돕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남편이 가정의 머리로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이 완전하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노력하는 것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고, 그 노력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나에게는 무척 버거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복종이란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하라!”라는 것입니다. “복종”한다는 것이 결코 아내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가 없는 평등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이들이 귀하고 사랑스럽고 보호해야 하지만, ‘사제지간’의 질서가 잡히지 않은 사랑과 평등의 관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인 관계가 무너져 내리면 안 됩니다. 

요즘 군대의 규율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잘못된 상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된 사람 때문에 관계가 무너지면 그 조직이 무너집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런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불의한데, 자격이 없는데, 피해가 가는데” 그래도 복종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복종이라는 것이 무조건 따르라는 의미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방식” 그것이 무엇입니까? 불의한 방식이 아닙니다.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나의 방식이 아니라 주인을 이해하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때로 우리가 주인의 뜻과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남편들이 가지는 아픔, 남자가 지녀야 할 자존심, 그가 가지는 상처를 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차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여 주는 것입니다. 자격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남편이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받아들여 주는 것입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한때 큰 화제가 되었던 “오체불만족”이란 책이 있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학생인 ‘오토타케 히로타다’(乙武洋匡. 23세)는 세상에 태어날 때 선천성 사지절단 장애를 안고 태어납니다. 팔다리가 겨우 10cm밖에 되지 않는 아주 희귀한 병입니다. 의사가 그 아이를 받아놓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산모가 이걸 보면 기절할 텐데…”하는 생각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동안 그 아이를 어머니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 어머니와 아들이 첫 상봉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머니가 기절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사지가 없는 고구마와 같은 그 아이를 가슴에 안고는 “오 귀여운 우리 아기” 그러면서 가슴 깊이 꼭 안았습니다. 

그 엄마는 그 아이를 무척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자랑스럽게 여기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몸은 불편했지만, 정신적으로 전혀 장애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짧은 다리와 팔을 가지고 야구도 해 보고, 축구도 했습니다. 수영, 컴퓨터, 붓글씨, 못하는 게 없습니다. 그 청년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는 특별한 개성일 뿐이다.” 
“남과 좀 다를 뿐이지 개성이 강할 뿐이지 별거 아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이것이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대하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남편이 가정에서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결혼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정에 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당신의 남편은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팔이 짧든 발이 짧든 그것이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하면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남편을 격려해 주고 높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남편 뒤에는 현숙한 아내의 내조가 있습니다. 잠언 12장 4절에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라 하셨으니 현숙한 아내, 어진 아내는 그 남편과 함께 존영을 얻고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여 주님의 주권이 회복되도록 하십시오. 남편의 머리가 주님이십니다. 가정의 제사장으로 남편이 권위를 회복할 때 영적인 질서가 회복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인격적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상호적”이라는 말과 맥을 같이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절대로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 반응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격적 관계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에 이은 또 하나의 상호 보완적인 명령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의 말씀을 보세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편에게는 권위의 역할을 줬지만, 그렇다고 자기 아내를 ‘부하나 아랫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에게 요구되는 것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만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굉장히 굴욕적인 관계일 것입니다. 하지만 권위자가 사랑으로 대할 때 아주 이상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 사랑 앞에서 권위는 보호와 염려, 희생이 포함됩니다. 사랑이 없는 권위는 폭력적이고 위압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 가운데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마라!”라는 명령이 덧붙여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에 보면 좀 구체적인 지침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Don't take advantage of them”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로부터 이득을 취하려고 하면 고통을 느끼게 되지요. 아내가 존재로서 의미가 있어야지, 그리고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지요.
왜 아내가 결혼하는 데 혼수를 채워서 와야 하는가요? 흔히 하는 이야기지만, 결혼하고 내가 편해질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불행해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나요?

이제 우리는 “사랑”과 “복종”이라는 것이 인격적인 관계, 그리고 자기중심을 벗어난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관계를 이루어가려면 조금 기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싸움의 기술”을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안 싸우고 살 수 없어서 지혜롭게 싸우는 것이 필요하고요. 늘 사랑할 수 없어서 사랑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요. 늘 복종하는 것이 어려워서 남편을 존경하는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술 중의 하나가 바로 “대화의 기술”입니다. 대화하지 않는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려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미국의 유명한 외교관인 찰스 아담스 씨는 유명한 역사가였던 부르크 아담스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부자(父子)가 같은 날 쓴 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중요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아버지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아들과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하루를 어쩔 수 없이 애 돌보는 일로 소모해야 했다.> 

아들의 일기에는 이와는 정반대의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빠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 

서로 얼마나 다르게 느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행복 비법”을 강의하는 최윤희 씨가 강의하러 갔다 만난 새신랑이 투덜거리더란다.
“선생님, 결혼하기 전에는 친구들하고 마음껏 술 마셨는데 결혼하니 아내가 빨리 집에 오라고 성화예요. 며칠 전에는 아기가 다쳤으니 빨리 병원에 가자고 호출했어요. 결혼 전의 자유가 그립습니다.”

최윤희 씨가 그에게 살짝 딴죽을 걸었다. 
“왜 그렇게 잃은 것만 생각하시나요? 결혼해서 얻은 것이 더 많잖아요? 기적 같은 아기, 가정.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호출하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제3의 남자를 불러들이면 좋겠어요?” 

신랑은 까르르 뒤집어졌다. 
우리의 문제는 늘 ‘빼기 발상’으로 살기 때문이 아닐까요? ‘더하기 발상’을 한다면 얻은 것이 많음에 대하여 웃음이 피어나는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부부는 가위와 같습니다. 두 날이 함께 움직여야 기능을 발휘한다는 말입니다. 두 날 사이에 틈이 생기면 아무것도 자를 수 없습니다. 부부는 두 개의 물망울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여 주께 하듯 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 사랑하면 그곳은 행복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정 천국이 됩니다.  (김병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