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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고 행하면 복 (요 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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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행하면 복 (요 13:12-20)


지난 주일 우리는 참으로 감동이 넘치는 임직식을 가졌습니다. 한 분의 명예 권사님을 추대하고 세 분의 권사님의 취임과 세 분의 집사 안수식을 진행하면서 저는 참으로 행복했고 참으로 가슴이 다 뭉클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수고하신 분들의 수고와 재정을 맡아서 모든 뒷수발을 다해주신 재정부원들 그리고 자칫 지루할 수도 있을 감사예배에 함께 참석하고 축하해 준 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과 아름다운 축가를 불러주신 강 디모데 전도사님 축복기도와 더불어 안수까지 해 주시고 거기다가 기념선물까지 준비해주신 두 분의 장로님들 그리고 기쁨으로 순종하고 섬기며 귀한 직임을 위임받으신 일곱 분까지 모두가 다 행복한 가족들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모두가 한 마음으로 잔치자리에 참석해서 온 마음으로 축하해 주시고 함께 기뻐해주신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더욱 외국 순방 중 잠시 귀국한 시간을 틈타 작은 교회까지 찾아와 주셔서 축하해 주시고 다음날 또 다시 출국하신 총회장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모든 것은 향남 교회를 어여삐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섬김의 실천자요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의 수혜자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임직하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함께 수고하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해 왔듯이 서로 격려하며 감사하며 끌어주고 밀어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이 우리 안에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한 남자의 간증을 읽었습니다. 아내는 폐결핵 환자로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남편은 눈물을 흘리면서 임종이 다가온 그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생명을 걸고 사랑해왔던 사람이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인데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살라는 거요.” 그러자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 “왜 당신은 그런 고백을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이제까지 얼마나 고민해 왔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인정해주지 못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서로 격려해주고 잘한 것을 마음껏 칭찬해주고 박수를 쳐주는 마음이 있을 때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의 흠만 들추어내고 남이 실수하기를 기대하고 경쟁에서 자기보다 못하기를 기대할 때 인간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교재에 두뇌나 기술의 훈련은 성공요인의 10%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대인관계는 성공요인의 85%가 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통계는 회사의 중견간부 중 해고당한 사람들의 원인을 보면. 대인관계의 실패에서 오는 원인이 직무수행의 실패에서 오는 원인보다 배나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일 것입니다. 남의 장점. 남의 성공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장, 단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다른 측면의 어떤 장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은 얼마나 자기의 단점을 줄이면서 자기의 장점을 잘 이용하느냐에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아름다운 섬김입니다.
라탄 타타(Ratan Tata) 타타그룹 회장이 간부들과 함께 차를 타고 뭄바이 시외로 이동 중일 때 일입니다. 도중에 타이어가 펑크 났습니다. 운전사가 급히 길가에 차를 세웠고, 일행 모두 차에서 내렸습니다. 간부들은 스트레칭을 하거나 잡담했습니다. 이때 누군가 “라탄 회장님이 어디 가셨지?” 하고 물었습니다. 급히 찾아보니 라탄 회장은 자동차 뒤편에서 어깨를 굽힌 채 운전사가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매는 걷어 올려져있고, 와이셔츠는 흘러내린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그는 손에 잭과 스패너를 쥐고 있었는데, 이를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했습니다. 이마에선 땀이 계속 흘러내렸지만, 얼굴에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가득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간부들은 라탄 회장의 겸손함과 격의 없음을 새삼 확인함과 동시에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고 합니다.

창업주의 증손자인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최고급 승용차인 롤스로이스로 등하교했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사치스러운 상류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언론들은 그의 재산을 한화 수백 억 원 정도로 추산합니다. 거대 재벌 회장의 재산치고는 매우 적습니다. 살고 있는 집은 20년 전 그가 그룹 회장이 되기 이전부터 살아온 평범한 아파트입니다. 출근용 승용차는 타타모터스가 생산하는 인디고로 매우 검소합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으며 골프를 그만둔 지는 오래됐습니다. 항상 연말에 연례휴가를 가는데 매년 성탄절 다음 날 사라져 8일 동안 연락을 끊고 지냅니다. 그의 생일(12월 28일) 축하파티는 당연히 없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일벌레입니다. 그에게서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합시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직원들은 말합니다. 그는 왜 열심히 일할까요?
“저도 자주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그 이유는 ‘도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가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도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돈이 없는 곳에 부를 창출해 이로 인한 행복을 보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의 기업 활동 목적은 ‘부를 창출해 국민들이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관과 경영철학, 삶의 목적, 애국심, 돈에 대한 생각 등이 응축된 이 한 마디는 그가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 기업을 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직원과 고객, 국민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기업 하는 목적을 국민 삶의 개선에 둔 기업인 라탄은 작년 말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라탄 타타 그룹 회장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섬겼던 또 한 사람을 꼽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제 본격적으로 봉사의 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십니다. 베드로 앞에 왔을 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발을 씻어 드려야지 어째서 주께서 내 발을 씻어주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겠지만 이 후에는 알게 될 거야.”
“안 됩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게 되는 거야.” 
“그래요? 그렇다면 주님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세요.”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는 거야. 온 몸이 깨끗하잖니? 하지만 너희가 깨끗하다고는 하나 다는 아니야.”

그렇게 그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다음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다. 내가 바로 선생이요 주이다. 선생이 된 자로서 제자 된 너희들의 발을 내가 친히 씻겨 주었다. 그러므로 선생도 너희들의 발을 씻겨 주었는데 너희끼리야 서로 발을 씻어주지 못할 이유야 없지 않겠느냐?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은 거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인 거야.”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은 아주 참 좋은 최고의 선생님이신데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이 최고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듣기에 꿀처럼 달다고 하는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최상의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저 말로만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르치신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겸손이라든가 봉사하고 섬기는 일도 그저 말로만 가르치면 제자들의 마음에 인상 깊은 교훈이 새겨지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소매를 걷어 올리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수건을 허리에 차고 제자들의 발밑에 예수님 자신이 무릎을 떡 꿇고 종처럼 앉아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겨주시는 그 행동을 통해서 제자들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몸소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도 제자들에게 겸손의 신앙,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가 먼저 위해 주는 봉사의 도리를 가르쳐 주고자 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빌 2:3에서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는데 반대로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수가 있어요.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라고 했으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낫게, 낮게 이게 우리말로는 똑같이 들립니다만 이 밑에 시옷 받침이 붙은 “낫게”와 지읒 밭침이 붙은 “낮게”는 그 뜻이 아주 다르지 않습니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나보다 남을 조금 높이 여기라는 얘기지만 시옷 받침이 아닌 지읒 받침을 붙여서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라는 말은 나보다 남을 낮춰보라는 얘기니까 어음은 같아도 뜻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단 말입니다. 마귀가 우리 귀에 대고 하는 “낮게”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낫게”는 뜻은 아주 정반대입니다. 하여튼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겸손의 신앙 봉사의 도리를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내가 선생이 돼서 너희 발을 씻었는데 너희가 너희끼리 먼저 남의 발을 씻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아마도 이 말씀은 제자들이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교훈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는 다들 그런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목욕을 시키거나 손발을 닦아 주다가 아이의 발을 뽀독뽀독하게 닫아주다가 너무 예뻐서 입 맞추던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부터는 아이를 씻기기를 그칩니다. 그리고는 남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런 시절을 오래도록 살아왔습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하기 힘든 것이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나보다 나은 사람도 아닌 나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겨야 된다. 그리고 나보다 나은 사람처럼 섬겨야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못한 사람 취급하려고 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그래 봐도 이런 점에서는 나보다 못한 사람이지 이렇게 우리 마음에 생각하고 그렇게 마음으로 무시하는 때가 또 종종 있지를 않습니까? 하지만 섬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섬길 수가 있겠는가 하면 그 출발은 따뜻한 인사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서로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조차 힘들어 하는 것이 오늘의 세대입니다. 오히려 낯선 얼굴에 인사라도 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기 쉬운 시대입니다. 더더욱 경비에게라면 더욱 내가 먼저 인사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하기 전에 가족 간에도 인사를 나누는 것조차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잤니? 안녕하세요? 안녕” 하는 인사조차 우리는 어쩌면 잊어버린지 오래 되지는 않았는지요? 

직장에를 가고 볼 일을 보러 나가고 학교에 가고 하면서 집을 드나들 때조차도 인사하기를 잊고 있는 우리는 아닙니까? 그냥 그렇게 무뎌진 세상을 살면서도 그러나 나는 남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어 하고 남들이 나를 좀 알아주기를 원하고 남들 위에 세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과연 우리가 몇 사람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저 예배 시간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함께 드립니다마는 바로 옆에 앉은 사람과나 겨우 눈인사 또는 고개만 까딱할 뿐 말씀을 듣기 전에 말씀을 듣고 나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하고 인사하라고 하니까 마지못해서 하지만 그것도 제대로 된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교회에 누가 왔다 갔는지조차 모릅니다. 오후 예배 시간에는 그래도 함께 돌아가며 허깅하는 시간을 가지니 조금은 낫습니다마는 그렇게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조차도 힘들어 하고 인사하는 것조차도 힘들어 하는데 거기서 무슨 섬김이 나오겠습니까? 섬김은 말 그대로 서비스입니다. 한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의 예배가 바로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비스이고 서로에 대한 서비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기에 서비스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되기에 서비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거창한 말을 쓰지 마십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하느냐 하면 먼저는 따뜻한 인사 나누기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마음에 품고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나는 집사님이 참 좋아요 권사님이 참 좋아요 장로님이 참 좋아요 성도님이 참 좋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따뜻한 말 한 마디 전해주는 것이고 조금 실수하고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해도 너그럽게 감싸주고 모른 척 하고 넘어가 주는 것 역시 아름다운 섬김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홈 플러스에 가면 입구서부터 인사를 합니다. “고객님 반갑습니다. 즐거운 쇼핑 되십시오.” 그들이야 돈이 목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사랑이 있지 않습니까? “안녕하세요. 한 주간도 평안하셨죠?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런 따뜻한 인사말 하나 “참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이런 귀한 섬김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알고 행하면 복이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아니 세상에 상전보다 더 높은 종이 어디 있습니까? 상전보다 높으면 종이 아니죠. 상전보다 높은 종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상전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상전인 예수님보다 더 높아지고 더 편안해지려고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내가 더 위가 될 수 없는 데 주님은 상전이고 나는 종인데 내가 상전된 주님보다 더 나아지려고 하는 종놈이 되려는 생각을 품은 것은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주님 이상의 대접을 은근히 바란다면 내가 상전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종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보다 내가 더 주님 이상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겐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하면 내가 상전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종이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그런 죄를 얼마나 많이 범했는지도 모르고 지금도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받은 대접이라는 게 뭡니까? 비난 험담 모욕 조롱 천대 멸시 그것이 예수님이 평생 받은 대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좀 버젓한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안 해 주는 걸 야속하게 생각합니다. 으레 대접을 받아야 되는 줄 압니다. 그러니까 이게 습성화 돼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예수님보다는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된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때로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기도 합니다. 

지금 사순절 기간인데 정말 내가 상전보다 높아지려는 종놈이 아닌가?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하나 더 생각한다면 내가 주님 이상으로 부요해지려는 생각을 품어본 일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 남긴 유산이라고는 몸에 걸치고 있던 옷 한 벌이었습니다. 주님은 반 세겔 세금도 제때에 못 내서 독촉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배고픔을 느끼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보다는 훨씬 잘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주님보다 더 부요해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못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주님보다 훨씬 부요하게 된 것을 큰 자랑거리로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상전보다도 높아지려는 종의 망령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정직하게 말한다면 우리가 내 앞집에 사는 사람보다 뒷집에 사는 사람보다 더 넉넉하게 산다는 얘기는 못하겠지마는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내가 우리 주 예수님보다 더 가난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가난한 분이 계시면 한 번 손들어 보십시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보다 더 가난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상전보다 종은 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 이상 더 대접을 받으려고 하면 내가 상전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종이 되는 것이고 주님보다 내가 더 부요할 생각을 하면 상전보다 더 높아지는 종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보다 우리가 더 평안할 생각을 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갈등을 늘 안고 살아야 되고 고민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상과 현실이란 언제나 일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고민하고 민망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고민도 민망도 없이 그냥 늘 기분 좋게만 살다가 죽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종으로서는 너무 망령된 생각입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분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종으로서 예수님보다도 높아지고 더 부요해지고 더 평안해 지려고 하여 교만에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깊이 새겨 살피며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 나아가심으로 우리 모두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영접입니다. 

토마스 카라일은 독설가로서도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독설에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상류사회의 부인들이 모이는 문학적인 모임에 강사로 초빙되었습니다. 그들은 값진 술을 마시면서 유태인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한 부인이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카라일 선생님,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도 유태인들이 아니었습니까? 만일 주님이 이 자리에 오신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 대접할 것입니다.”
카라일은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여러분이 예수를 대접하는 내용은 상황에 따라 조금 다르지 않을까요? 만일 예수가 땀내 나는 목수의 작업복을 입고 이 자리에 나타나시되 이전처럼 세리나 창녀나 어부 같은 하류계급의 인간들을 수십 명 동반하고 오신다면 여러분이 어떤 대접을 하실는지요. 더군다나 그의 말이 여러분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내용이 아니라 이전처럼 죄를 책망하고 생명의 떡과 같은 높은 차원의 설교라면 혹시 여러분은 ‘저 사람은 우리와 관계없다. 뉴게이트로 끌고 가서 교수형에 처하라’고 외치지나 않으실는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영접을 이야기할 때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도 누구도 영접치 않고 자기 외에는 누구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안하무인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사람들은 눈에 사람이 안 보이는 겁니다. 자기만 사람이고 자기밖에는 모르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대단치 않고 누구도 환영을 안 하고 누구도 영접을 안 하는 독불장군이 있습니다. 자기만 대단한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이 어떤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떤지 전혀 고려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무시당한다 싶으면 지금까지 자기가 한 일은 생각지도 않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내가 이런 처지에 있으니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스스로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유대인형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은 굉장히 영접을 합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배척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면 아주 끔찍이 생각하고 그 앞에서 설설 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굉장히 존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존중히 여기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영접을 안 하고 배척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아니 그냥 모른 척 한 것이 아니라 아주 대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반면에 셋째는 현대인 형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예수님을 배척한데 대해서 속상해 합니다. 아니 속상한 정도를 넘어서 유대인들을 아주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어떻게 예수님을 몰라봐도 그렇게 몰라볼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흥분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 자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보내신 자는 또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별로 영접도 안 합니다. 

영접이라 하는 점에서 안하무인형 인간들은 하나님도 인간도 다 무시하고 그저 자기만 잘났고 그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자기 의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형 사람들은 하나님은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무시를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말을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은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안 믿습니다. 예수는 뭐 하러 믿어. 하나님만 섬기면 되지 하나님의 은혜 모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표현하는 말은 다를 수 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감사하다고 합니다. 회교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단지 그 명칭을 알라라 부를 뿐 하나님을 끔찍이 생각하는데 예수는 오히려 자기들의 길을 가로막는 방해자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저 마호메트의 길을 밝히는 한 사람의 선지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예수님을 아주 무시를 해 버립니다.
그런데 신약교회 형인 우리들은 또 예수는 대단히 생각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데 막상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 자 예수님의 보내신 자는 별로 대단하게 생각을 안 합니다. 역시 자기 잣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래서 저 사람은 안 되고 이래서 이 사람은 안 된다고 합니다. 결국 이 세 가지는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도 “내가 주리고 헐벗고 목마르고 병들고 가난에 지치고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들이 나를 본체만체했다.”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습니까?”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중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예수님의 지극히 작은 자, 주님이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뒤집어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면 하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은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도 그게 하나님 앞에서 잘 하는 것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아주 끔찍하게 섬깁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광신자라고 아주 하나님에게 미쳤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하게 하나님을 믿는데 막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습니다. 

나를 믿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 내가 보낸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작은 자 하나를 환영하면 그건 예수를 환영하는 것이고 예수를 환영하는 것은 하나님을 환영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중의 하나요 주님을 전적으로 섬기며 전하는 사람을 우리가 흔히 교역자 또는 목회자라고 합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를 끔찍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는 그냥 희생만 해야 하고 목회자는 그냥 가난에 쪼들려 살아도 그게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 마음에 드는 그런 말씀을 전하면 아멘 하지만 조금 자기 생각과 다른 말씀을 전하면 이건 아니라고 하면서 반발을 합니다. 어떤 삶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자기 판단이 앞섭니다. 저 이는 이래서 되고 저 이는 이래서 안 된다고 아주 자기 생각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자기 판단에 맞으면 주의 사자고 주의 종님이고 자기 기준에 아니라 싶으면 주의 종놈으로 여깁니다. 아니 자기 종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외면을 하고 심지어는 대적을 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향남교회는 정말 모든 성도들이 목회자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고 있습니다만 많은 교회들이 지금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이 다 이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목회자를 섬기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서도 이런 저런 아픔들이 있는데 하물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어떨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들만 위해 준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그래 더욱 감사한 것이 향남교회에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지극히 큰 부자가 없습니다. 하나같이 우리 모두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더욱 감사한 것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까지도 우리는 잘 받아들여주고 함께 어울려 주고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기준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 관심 밖에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무시해 버리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소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별스럽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가 흥분할 이유도 없고요 혹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들 때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건 같은 사람을 두고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들 때는 잘 대해주다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보면 아주 냉정하게 외면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이 사람은 전혀 내가 사귈만한 사람 내가 섬길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거나 무시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은 내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마음을 닫아 버리면 그게 바로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을 닫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역자 또는 목회자들을 향해서 뿐 아니라 모든 교직자들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직분을 맡아서 수고하는 분들뿐 아니라 정말 저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맞냐고 할 정도로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사람까지도 우리가 끌어안고 품어주고 섬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전혀 사람 같지 않는 핏덩이를 뱃속에 넣고 열 달을 온갖 마음 고생 몸 고생을 하면서 키우다가 이제 몸을 풀게 되면 기쁨도 잠시 그 다음부터는 그 어린 것을 끌어안고 얼마나 씨름을 해 댑니까?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울어대기라도 할 것 같으면 정말 내가 이러려고 내가 이놈을 낳았나 싶은 마음도 들고 할 수만 있다면 내 팽개쳐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한데 그렇게 하면서 키워나가는 동안 그 아이가 자라면서 사람다워 가는 그 모습에 우리는 감사하고 또 기뻐하고 그게 사는 보람이요 아이 키우는 사람의 보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 안에서는 왜 그리도 조급한지 모릅니다. 그건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부모가 돼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다른 부모들 좀 보라고 하면서 부모를 대적하고 집을 나가고 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볼썽사나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같이 급하고 하나같이 냄비처럼 금방 부르르 끓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그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교회 앞에서 목회자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모든 교직자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생각을 한다면 함부로 말을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돼서 그럴 수가 있냐고 어떻게 장로요 권사요 집사라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면 하나님 앞에 그들 모두를 위한 중보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부족한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입어 점차 맛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가 되시는 모든 직분자들을 위해서도 날마다 기도하시고 축복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워 가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곰국을 끓일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센 불에 와르르 끓이고 마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센 불로 끓입니다만 그것도 잘 지켜보면서 끓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칫 다 졸아붙어서 타 버리기도 하고도 단내가 나서 버리게 되지를 않습니까? 그러나 오랜 시간 잘 다리면 진국이 우러나와서 정말 몸에도 좋은 곰국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대하고 진심으로 품어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오래 기다리며 지켜보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영접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고 저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모습으로 함께 세워나가기 위해서 중보하며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되고 이런 모습이 아니라서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함께 더 품어주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심으로 정말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귀한 저와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C. 6세기경 그리이스의 노예라고 전해지는 이솝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주인이 “목욕탕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하며 보냈습니다. 얼마 후 이솝은 돌아와서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목욕할 준비를 하여 목욕탕으로 갔으나 사람으로 가득한 목욕탕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돌아온 주인은 이솝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화를 내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태연하게 “주인님. 제가 확실히 보았습니다. 목욕탕에는 한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이솝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주인은 오히려 이솝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이솝이 목욕탕에 가 보았더니 길 가운데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가는 사람들이 이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고. 불평과 원망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 한 손님이 또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은 팔을 걷어 부치고 땀을 흘리며 돌을 치워버리고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사람다운 사람은 단 한 사람만 목욕탕에 들어간 것입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잠 25:13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처럼 내 자신이 먼저 팔을 걷어 부치고 길 가운데 돌을 치워야 합니다. 사람을 찾으려 하지 말고 내가 먼저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 인디언과 백인이 함께 설교를 듣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디언은 즉시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백인은 한동안 고민스런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백인이 인디언에게 “나는 시간이 꽤 걸렸는데 당신은 어찌 단번에 영접할 수가 있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은 “만일 대통령이 좋은 옷을 한 벌씩 준다고 하면, 당신은 지금도 잘 입고 있는 편이기 때문에 망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옷은 낡았기 때문에 당장 고마워하며 그 옷으로 갈아입게 되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격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혹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해서 그로 자족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자족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던 함께 하실 그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할 뿐 아니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까지도 주님처럼 섬길 수 있는 오히려 나보다 못한 사람 연약한 사람들이기에 더 섬겨줄 수 있고 사람 같지 않기에 더 섬겨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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